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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투레틴의 "그리스도의 속죄" 중에서...

프란시스 튜레틴

by 김경호 진실 2010. 10. 2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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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투레틴의 "그리스도의 속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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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올리는 글은 종교개혁 이후 칼빈과 베자의 뒤를 이어 개혁신학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프란시스 투레틴 목사의 '그리스도의 속죄' 중에서 발췌한 한 대목입니다. 이 글에서 투레틴 목사는,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른 복음 제시인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가 올바른 내용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는 관계로 소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는 하나 참으로 회심치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양산되고 있다고 많은 목회자들이 경고하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투레틴의 이 글은 명쾌하게 그 문제를 풀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어떤 길을 따라야 할 질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올해 10월 종교개혁주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출판하려고 준비한 이 귀한 책의 일부분을 여기에 올려 놓으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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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무조건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첫째로,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어야 할 의무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둘째로, 심지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처음부터 곧바로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것이 먼저 있은 후에 믿어야 할 내용이다. 믿음과 회개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가 먼저 선행되어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기 전에 먼저 믿음과 회개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오직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모든 불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반드시 믿어야 한다"라는 말도 전혀 옳지 않은 말이다. 반드시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불신자들을 설득하는 사람은 그들을 지독하게 우롱하는 셈이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현재적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정죄 받은 상태에 있음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피하여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꼭 믿어야 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믿건 안 믿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그대로 무조건적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어야 하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믿어야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죄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뿐이며, 목이 마르며 자신의 갈증을 분명하게 지각하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자신의 비참함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뿐이다(마 11:28, 사 61:1).

[반론]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참되고 의롭다하는 믿음이다. 그런데 참되고 의롭다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지점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성립한다."

[답변] 물론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또 그 믿음이 단순히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참되고 의롭다하는 믿음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모든 행위를 처음부터 다 행사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별히 믿음의 궁극적이고 특별한 행위, 곧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행위를 그렇게 요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믿음이 비록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여러 가지 행위들 안에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음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맨 처음부터 요구하시는 믿음의 첫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맨 마지막 행위이며 다른 것들을 전제로 한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제부터는 믿음의 여러 가지 행위들을 구별하도록 해보자. 첫째로, 직접적인 행위이다. 이것은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것을 그 대상으로 삼는 행위이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도움을 구하고 그가 약속하신 것들을 받아들인다. 믿음의 두 번째 행위는 내성적(內省的) 행위이다. 이것은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하며 복음의 모든 약속이 우리의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 안에는 두 가지 활동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모든 약속에 대한 믿음의 동의이다. 즉, 죄를 회개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피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모든 약속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동의이다. 구원 얻는 믿음의 또 다른 활동은 그리스도를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구주로 인정하면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피난처로 삼으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다. 바로 이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복음이 우리에게 명하는 믿음은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에 속해 있는 첫 번째 활동과 두 번째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충족된 후에 비로소 복음은 믿음의 내성적 행위이며 앞의 두 가지 활동을 필히 전제하는 바 믿음의 세 번째 활동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명한다. 이는 앞의 두 가지 활동이 선행되지 않을 경우 믿음의 세 번째 활동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위의 반론의 오류를 분명하게 간파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위의 반론은 복음이 명하는 믿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죄인이 그리스도를 붙잡는 수단인 저 행위, 곧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말할 때는 믿음의 최종적 행위, 곧 믿음의 내성적 행위를 언급한다. 믿음의 내성적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갖추어진 증거를 토대로 과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게 되는데, 위의 반론은 바로 이런 행위를 복음이 명하는 믿음의 내용으로 언급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계시하지 않는다. 다만 믿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계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믿음과 회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근거로 과연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나는 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께 피하였음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는 이렇게 추론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이렇게 추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명하시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직접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런 사실은 다음과 같은 숙고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또는 사도들이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믿으라고 명하는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체적으로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그 말씀들은 단지 믿음이라는 의무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 또는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모든 복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6장 16절을 보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유명한 신앙 고백에서 베드로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할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요한복음 6장 69절을 보라.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오직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라"(롬 10:9)라고 요청할 뿐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는 명령을 들을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하고, 믿음과 회개로 자기들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유일한 주가 되심을 알고 그에게 피해야 한다. 이와 같은 믿음의 행위들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계명은, 우리가 믿음에 속한 여러 행위 가운데 위로를 주는 마지막 행위에 도달하여 그것을 통해서 과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게 되기 이전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적인 비참한 상태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전적인 무능력에 관해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 자신의 노력에 대한 건전한 절망이 생기게 되고 우리에게 외부로부터 오는 구제책이 절대로 필요함을 알게 된다. 둘째로, 이와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계명이 주어진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지신,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유일하신 구주이심을 믿으라는 계명이 주어진다. 또한 진실하게 그리스도께로 피하고 참된 회개로 회개하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과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음을 믿으라는 계명이 주어진다.
셋째로, 이와 같이 회개하고 참회하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 피하라는 계명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완전하고 충분한 공로임을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계명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그 공로 안에서 감미로운 안식을 누리라는 계명이 주어진다. 그리고 오직 그것을 통하여 죄사함, 의, 그리고 구원을 기대하라는 계명이 주어진다. 마지막 넷째로, 자기 자신이 회개하였고 그리스도께로 피하였으며 구원의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께 두고 안식하고 있음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 덕분에 자기들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믿어야 한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적 비참함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식해야 하며 구원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해당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영적 비참함을 자각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 그리고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마 11:28, 사 61:1).
또한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이것이다. 즉, 복음의 이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도록 만드는 믿음의 두 번째 행위를 즉각적으로 그리고 제일 먼저 요구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피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만드는 믿음의 첫 번째 행위를 먼저 요구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첫 번째 행위는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죄인이 자신의 영적 비참함을 자각한 후 낙담하여 있다가 복음의 부르심을 듣고 크게 각성되어 다른 모든 희망을 버리고 오직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께로 피하며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모든 은혜를 전심으로 갈망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간추려서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복음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의 근원이시며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활짝 열려진 구원의 방주이심을 알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피하여 피난처를 삼는 것이다.
내 자신이 이와 같은 믿음의 공식적인 행위를 실행했음을 나 스스로 의식하게 될 때, 바로 그 때 나는 믿음의 그 다음 행위를 실행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믿음의 그 다음 행위는 나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피한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믿게 하는데, 믿음의 앞선 행위가 내 자신에게 이루어졌을 때 이와 같은 믿음의 그 다음 행위를 실행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이것을 일컬어 믿음의 필연적인 행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구주이신 줄 믿고 그에게 피하도록 만드는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 다음에는 그와 같은 믿음의 두 번째 행위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믿음의 위로적 행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자의 영혼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를 크게 베풀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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