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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에 관하여(고재수 교수)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10. 12. 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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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에 관하여


By N.H. Gootjes

trans. by Seok-Jun Yun




본 글은 클라리온 Volume 49, Year End 버전(2000)에 실렸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성탄절의 제정


성탄절은 일년 중 중요한 기념일 중 하나이다. 성탄절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날을 자유의 날로써 기뻐한다. 하지만 이것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신약성경에는 교회가 성탄절을 기념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서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 특별한 날로 기념되었다는 어떠한 힌트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그의 탄생의 정확한 날짜에 대한 아무런 지시도 주고 있지 않다. 성탄을 기념하는 것은 신약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바가 아니다.


성탄절이 특별한 날이 되기까지는 몇 세기가 걸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특별한 축제들이 4세기 초에서야 발견된다. 동일한 세기의 후반부에 로마교회는 이 구속사건을 12월 25일에 연결시킨다. 거기서부터 우리 주님의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는 관습이 전체 기독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성탄을 기념하는 것은 인간의 고안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성탄을 기념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로 지정해 놓아야 할 좋은 관습인가? 비록 성경이 비록 그 날짜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를 특별한 날로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이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이를 인간 축제의 날로 내버려두는 편이 더 낫지 않는가?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몇 가지 축제들을 제정하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다. 이들 중 하나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축제였다: 유월절. 이것은 출애굽, 즉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압제로부터 해방되던 날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 축제가 애굽의 형벌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시행되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래서 그들이 동일한 형벌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주어야만 했다(출 12장을 보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던 것을 통해 보이신 위대한 일을 기념했다(시77:11.15). 이러한 예에서 기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례도 있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왕 에스더의 중재로 인해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이것은 새로운 축제일이 제정된 사례이다: 부림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에스더와 삼촌 모르드개에게서 기초하고 있다(에9:29-33).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사역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탄생의 중요성은 그것을 기념하는 것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기독교회가 4세기에 성탄절을 제정하였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지시하신 방향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성탄절의 폐지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의 세기였던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성탄을 기념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다. 살제로 성탄절을 포함한 모든 축제일들을 폐지하려는 광범위한 시도가 다소 존재했다.


1574년에 있었던 도르트 총회는 성탄절을 폐지하는 급진적인 결정을 내렸다. 총회는 사람들이 주일로 만족하기를 원했다. 12월 25일 바로 전의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복음이 설교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사람들은 성탄절이라는 특별한 날이 폐지되었음을 권고받아야만 했다. 성탄절은 더 이상 기념되지 않았다.


개혁교회들의 총회가 우리 구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특별한 축제의 날을 폐지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적인 시대상의 빛 아래서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이전 세기 동안에는 거룩한 날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이 날들 동안에 아무런 일도 해서는 안되었다는 사실은 곧 그들을 술취한 상태나 혹은 다른 종류의 무절제들에 탐닉하도록 내버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미 종교개혁 이전에 축제일의 숫자를 제한하려믄 몇몇 시도들이 있었다.


개혁자들은 이에 동의했다. 루터는 단번에 모든 축제일들을 없애버리기를 원했다. 나중에서야 그는 특별한 기독교적 축제일들을 기념하는 것을 허락했다. 칼빈도 이 날들을 폐지하려는 시도에 동의했다. 당시에는 참석가능한 설교가 주중 매일마다 시행되고 있었지만, 그는 성탄절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참석하도록 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는 12월 25일의 전 주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의 중요성에 관한 설교를 하곤 했다. 그리고 성탄절 당일에는 그가 해오던 대로 성경의 어느 곳에서건 설교하기를 계속했다.


이러한 빛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화란 교회들이 성탄절을 특별한 날로 기념하는 것을 없애버리려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축제일의 모든 시스템은 모든 종류의 악을 이끄는 것이다.


성탄절을 폐지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도시들 내의 권력자들은 시민들을 위해 축제일을 공휴일로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교회들은 기독 축제일에 예배를 조직하는 편이 더 낫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 때가 어쨌든 사람들이 기념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따로 떼어놓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것을 통하여 성탄의 중요성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지도하는 데는 더 나았다. 그것이 교회법 상에서 성찬절이 기념되도록 규정하게 된 배경이다.




오늘날의 성탄절


우리 사회에서 성탄절은 공휴일로 인식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하루를 쉬도록 허락받는다. 그것은 기독교에게 승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날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워지지만, 통상적으로는 그나 그의 탄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날이다.


모두가 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를 바꿔버렸다. 상점들은 우리에게 성탄을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고급스런 아이템들을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성탄절은 선물을 주는 날이 되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감소하고 있으며, 그의 위치는 기쁨을 주고 추운 계절에 심장을 덥혀주는 유쾌한 친구인 산타 클로스에게 뺏겨 버렸다. 상점들은 돈을 갈퀴로 긁어들인다. 또 다른 이들은 자유에 관한 아이디어들에 투자한다. 여행사들은 추운 계절을 벗어나기 위해 따뜻한 지역으로의 성탄 크루즈 상품을 제공한다.


이 모든 상업주의의 중심에 서안절의 중요성은 사라져 버렸다. 성탄절은 풍요로운 삶과 환대를 즐기기 위한 날로 발전해가고 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탄절을 아예 없애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기 위해 특별한 날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그리스도 없는 성탄절은 겉은 건강하나 속은 썩은 과일과 같다. 우리는 왜 16세기의 개혁주의자들이 성탄절을 없애버리기를 원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성탄절을 폐지하기보다 원래의 의미대로 그것을 존속하는 것이다. 이 날은 부림절 축제에서 그 구원을 기념하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인 우리 구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들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을 지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 구주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위대한 기적으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면 된다. 성탄절은 인간의 제도이다. 그러나 이를 기념해야 할 모든 이유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시게 될 때, 우리의 성탄기념은 공허한 즐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의 벼랑끝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깊은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http://lovereform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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