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85년에 플라벨은 다트머스로 돌아가서 가정에 제한된 목회를 재개했다. 매주 주일에 설교했고 많은 주중 저녁에는 사람들이 그의 집에 모여들었다. 같은 해에 그를 경멸하던 무리들은 플라벨의 형상을 만들어 불태우곤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며 사랑하는 다트머스를 위해 기도했다: “오, 이 마을에 기도하지 않는 가정이 하나도 없다면!” 1687년에 제임스 2세는 비국교도들을 위해 또다른 관용령을 선포했고 플라벨은 다시 한번 공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이 자유는 후에 오렌지의 윌리엄이 영국으로 온 일과 1688년에 일어난 명예혁명으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플라벨의 회중은 그가 강단으로 복귀하자 커다란 교회를 지었다. 요한계시록 3:20(“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한 그의 공적 설교 기간 4년은 큰 축복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급속도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무거운 짐과 한낮의 열을 견뎌왔습니다; 우리는 거의 탈진 상태에 놓인 나이든 병사와 같습니다.” 1691년 6월 6일에 설교하기 위해 엑세터를 방문했을 때, 플라벨은 갑작스런 뇌출혈을 맞이했고 그날 저녁에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은 이러했다: “나는 내가 잘 해내고 지내게 될 것을 안다.” 플라벨은 겸손하고 경건하며 박식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연구에 투자했다. 그의 자녀 가운데 한명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기도로 충만하고 넘치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뛰어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같은 표현을 좀처럼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플라벨은 아울러 교회의 치리와 훈련 및 유아세례와 몇몇 동방 언어에 정통했다. 플라벨의 설교는 성령이 축복하신 그것이었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열다섯살에 영국에서 플라벨의 설교를 들었던 것을 기억하는 미국 이민자인 루크 쇼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맥체인의 본문은 이렇다: “만일 누구라도 주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예수가 오시는 날에 저주를 받을지어다.” 플라벨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는 두려움에 대해 설교한 것을 들은지 무려 85년 후에, 성령께서는 쇼트로 하여금 그 설교를 숙고하는 가운데 100세의 나이에 회심하도록 이끄는 결과를 낳으셨다! 플라벨의 설교자로서의 능력은 그의 영적 경험의 깊이에서도 나왔다고 하겠다. 그는 미들톤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듯이 묵상과 자기 점검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견고한 토대를 둔 믿음의 확신과 수차례 그의 영혼 밖으로 흘러나온 넘치는 위로와 평안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를 자신의 영혼의 음성으로 말해서 듣는 이의 영혼에 이를 전달하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설교자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고 다루어본 것 및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맛보고 목격하고 역시 느낀 것을 설교했다.
http://rnrbook.com/front/newpage.php?code=22
|
신자가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존 플라벨) (0) | 2011.09.05 |
---|---|
하나님의 섭리(2)-존 플라벨- (0) | 2011.05.19 |
하나님의 섭리(1) -존 플라벨- (0) | 2011.05.19 |
은혜의 방법 중에서(존 플라벨) (0) | 2011.05.18 |
"고난" - 하나님의 지혜 / 존 플라벨 (0) | 2010.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