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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ugal과 퓨리탄영성의 진수

헨리 스쿠갈

by 김경호 진실 2011. 1. 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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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ugal (헨리 스코우글)과 퓨리탄영성의 진수

 

1. 헨리스코우글 소개:
그는 스콧틀란드의 절정기 퓨리탄신학자로서, 퓨리탄들 중에서 28 (1650-1678)년이라는 가장 짦은 생애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삶을 가졌었지만 매우 진귀함 신앙의 업적을 남긴 사람중의 하나이다. 그 중의 하나가 “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영혼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 이다.

 

이책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 1677에 그의 이름도 없이 London 출판사에서 첫 발간했으나 1773년까지 여섯 차례나 재 발간한 이래, 1819년까지 17회 이상 재 발간됐다. 특별히 1742-1808년까지에는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이의 권두언을 붙여 발간하였고, 1722년에는 네델란드어로 번역됐으며, 1727년에는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교였고 그가 가르치던 Aberdeen의 King's College에서 1892년에 재 발간하였다. 1934년 에는  Henderson에 의하여 발간했고, 1937년에는 캠브리지대학에서 Religious Life in Seventeen-Centry Scougal" 이라는 주제로 하여 발간한 퓨리탄영성의 진수중에 하나인 그의 책자 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영혼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을 발췌한 내용을 두 차례로 나누어 소개한다. - (이 완재 박사)

 

영혼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 -1. (참된 기독교)

헨리 스코우글(Henry Scougal)(1650-1678) 씀 / 김 태곤 옮김

 

1. 기독교에 관한 그릇된 개념들

 

부활은 우리를 돌이켜서 갈보리에 이르게 합니다. 십자가에 이르는 길은 겟세마네를 통한 길과 부활절을 통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장소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길로서 '십자가에 이르는 산 길'입니다. 믿음의 체험은 믿음의 사실들과 상응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의 사실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충분히 검증되었지만, 믿음은 어떤 사건을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믿음은 사실들에 관한 설명을 분별하고, 사실들에 관한 진리뿐 아니라 사실 안에 있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 사실들을 개인적으로 전유(專有)하고 적용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실을 아는 지식과 사실의 권능을 아는 지식의 차이입니다. 사실을 아는 지식은 들음으로 오고, 증거에 의해 확립되며, 이성에 의해 확립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실의 권능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사실을 아는 지식을 체험의 증거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통해 와야 합니다. 사실의 권능을 아는 지식은 그 사실의 확실성에 달려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 전체는 날조이며, 사도들의 증거는 사기이며, 교회의 믿음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그 권능으로 증명되며, 권능을 아는 지식은 사실에 관한 검증이자 해석이며, 이 둘은 십자가의 부활에서 유래합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어떤 이들은 특정 교회의 신조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유일한 증거는 자신이 특정 교회나 교파에 소속되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 그들은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고, 과음이나 과식을 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이따금 가난한 사람을 돕기 때문에 하나님을 흡족하게 해 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정서적으로 깊은 종교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항상 열정적인 기도를 시도하며, 천국에 대한 묵상을 통해 감정적으로 깊은 체험을 하길 원한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 상태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한다는 증거가 자신의 감정 상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믿는다. 그들로서는 구원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느낌이다.

 

진리를 알고, 선한 일을 하며, 감정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이긴 하지만, 구원 그 자체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은 기껏해야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들일 뿐 그 뿌리는 아니다.

 

참된 기독교의 모조품들이 많다. 심지어 죄악된 태도나 행위들을 참된 기독교의 표시인 양 곡해할 수도 있다. 나는 이교도의 우상숭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기독교답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이다.

 

그들은 자신의 죄와 악한 마음을 좋은 것인 양 여긴다. 자신의 신랄한 말과 교만이 그리스도인의 진지함을 나타내는 증거인 듯이 행동한다. 자신의 격렬한 분노와 쓰디쓴 악감정이 진정으로 거룩한 열심인 것처럼 여긴다. 더욱이 지도적 권위를 지닌 자들을 대항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용기와 결단력의 표현이라고 믿는다.

 

2.기독교란 

 

참된 기독교는 앞에서 묘사한 것과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아는 자들은 참된 신앙의 모조품들을 전부 버린다. 참된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생명이 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실제로 공유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영혼에 새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그것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골 1:27).

 

내가 아는 바 참된 기독교의 특성을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두 단어는 '신적인 생명(divine life)'이다. 이들 두 단어는 참된 기독교에 관해 내가 묘사하려는 내용의 기초에 해당한다. 먼저 나는 그것을 '생명'으로 묘사하는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신적인' 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참된 기독교는 영원한 생명이다

 

내가 기독교를 무엇보다도 '생명'으로 묘사한 것은 그것이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감정적인 체험을 하고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참된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선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삶을 급속히 바꾼다. 그러나 이내 지치고 포기하게 된다. 열정적으로 시작하지만 그 열심은 이내 식는다. 선한 일을 하고 성장하는 듯이 보이지만, 마치 뿌리가 없는 식물처럼 급속히 시든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종교적 흥분은 마치 목 잘린 닭의 모습과 같다. 그것은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생명이 없기 때문에 곧 쓰러진다. 반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신실하며 지속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힘과 권능에서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영적 침체를 경험하거나 시험에 직면하여 고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침체된 때에도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 결코 속박되지 않는다.

 

참된 기독교는 마음속에 있는 생명이다

 

기독교를 '생명'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생명이 마음속에 거하는 내적 권능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영혼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는다. 그 사역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그 무엇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징벌의 위협이나 어떤 약속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하고, 그럼으로써 기쁨을 얻으려는 내적 열망을 지니고 있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명령 때문에 하나님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 속에 새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 생명이 사랑하도록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강요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양심의 가책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과 친교를 통해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이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은 단지 그렇게 하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죄악된 삶에서 비롯된 문제와 곤궁함을 알고 있다.

 

그는 관대해지도록 강요받은 것이 아니다. 그의 자선행위는 억지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기꺼이 베풀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베풀어야 할 의무가 없을 때에도 그의 심령은 "너그러운 일"을 모색할 것이다(사32:8).

 

자제력 결여나 부정행위 또는 다른 어떤 악행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특성에 위배된다. 가장 친절한 사람이 결코 불친절하지 않고 가장 겸손한 사람이 결코 무례하지 않듯이, 이 죄악들은 그리스도인의 특성과 거리가 멀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치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음이요, 그가 죄를 짓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음이라"(요일 3:9)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몹시 존중한다.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징벌의 위협이 아니다. 그들이 순종하는 까닭은 율법이 얼마나 순수하고 선하며 이치에 타당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 그 자체가 탁월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지키면 큰 상급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누가 율법을 명하겠는가?사랑은 그들을 움직이는 보다 강력한 율법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도 적용된다.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요 4:34). 식욕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음식이 우리의 몸을 어떻게 유지시켜 줄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는 먹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선하고 옳은 것을 사모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지니고 있다.

 

외부적인 것들은 우리가 영적인 삶을 원하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영적으로 미숙하거나 연약할 때 특히 그렇다.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은 두려움이나 난관에 의해 강요받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권위나 율법 또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만일 미숙한 그리스도인이 신실하고 일관되게 순종한다면, 그는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 갈 것이다. 만일 그가 영적 연약성을 미워하고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연약하여 비틀거리는 그들의 걸음마저 존중해 주실 것이다.

 

반면에 이 같은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바라지도 않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단지 교육, 전통, 지옥에 대한 두려움 또는 현세적인 천국 개념 때문에 '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는 꼭두각시를 사람이라고 지칭할 수 없음과 같다.

 

강요되고 가식적인 기독교는 생기가 없고 무감각하다. 억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자는 마치 무거운 짐을 머리 위에 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 그들의 신앙은 냉담하고 활기가 없다. 그들은 마치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의무감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자와 같다.

 

명목상의 기독교는 인색하고 이기적이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 욕구에 반하는 일을 만나면 거부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이들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한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것만을 한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많이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해석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낌없이 남을 돕는다. 참된 기독교는 편협하고, 형식적이며, 계산적인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긴 사람은 그분을 위해 아무리 헌신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참된 기독교는 신적인 생명이다

 

이제 나는 기독교를 '생명'으로 정의한 의도가 분명히 이해되었기를 바란다. 또한 기독교를 강요되거나 외적인 원인에 의존하는 영성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도 분명히 이해되었기를 바란다.

 

다음으로 기독교를 '신적인 생명'으로 묘사한 이류를 설명하려 한다. 그 이유는 단지 하나님께서 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거듭난다). 하지만 이것을 '신적인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생명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 속에 비취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은 그분의 성품을 실제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빛이라고 하는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한 줄기 광선이다.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구분의 무한하신 선이라고 하는 바다로부터 나오는 한 방울의 물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며(요일 4:12),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갈 4:19).       ---(계 속)

 

 

http://lloydjones.org/zbxe/Puritan07/5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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