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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속에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생명 - 헨리 스쿠갈

헨리 스쿠갈

by 김경호 진실 2011. 1. 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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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 (2) - 참된 기독교

헨리 스코우글(Henry Scougal)(1650-1678) 씀 / 김태곤 옮김

 

3. 자연적인 생명이란

 

신적인 생명에 관해 보다 상세히 살펴보기 전에 자연적인 생명을 간략히 묘사하려 한다. 내가 이해하는 자연적인 생명은 인간의 본성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바라는 갈망을 특징으로 한다. 자연적인 생명의 뿌리는 '자기 사랑'이다. 이 자기사랑이 맺는 열매들은 사람들 속에 있는 욕구와 취향들만큼이나 많다. 자연인은 육체적 감각의 지배를 받는다. 그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산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이나 고통 중 어느 것을 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 자연적 욕구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사실 이들은 창조주의 지혜를 반영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욕구를 주셨다. 짐승들의 경우, 이 욕구는 피조된 목적을 수행하도록 돕는 법칙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짐승보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보다 높은 법칙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자연적인 생명의 통제만 받고 보다 높은 피조 목적을 무시할 때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자연적 욕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억눌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영적인 생명으로써 통제하고 다스려야 한다.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전자가 신적인 생명의 지배를 받는 반면에, 후자는 자연적인 생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생명의 특징

 

자연적인 생명은 매우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선한 일들과 그들 자신과 비교했던 사람들의 죄악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참된 기독교로 간주되는 것이 실제로는 자연적 성향의 산물임을 고려하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어떤 이들은 천성적으로 쾌활하다. 그 결과 종종 다른 이들에게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을 한다. 그런가 하면 진지하고 보수적인 사람도 있다. 그들의 행동방식은 어떤 사람의 눈에 매우 영적이며 의로운 듯이 보인다. 어떤 이들은 상스럽고, 거칠며, 날카롭다. 그들은 스스로 행복할 수가 없으며, 다른 사람의 행복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상하고 친절하다. 그들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긴다.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같은 사람들은 세상을 훈훈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훈련과 교육도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의 행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 관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들은 양육 과정에서 배운 대로 행동할 뿐이다. 어떤 규범을 따르도록 배운 적이 없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즐거움이나 개인의 이득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예의 바르고 덕스럽게 처신하도록 배웠다. 그런 교육 때문에 그릇되거나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사람들의 기질은 매우 다양하다. 자연적인 힘이나 연약함, 지성이나 지혜 또는 이들을 잘 활용하느냐 아니면 무시하느냐에 따라 성경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탐욕, 불법, 잔인함, 불경건 따위가 자기사랑의 결과임을 알고 있다. 이 악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이나 자연적인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연적인 생명의 결실이다. 만일 자연인이 상식과 좋은 판단력과 지성을 갖추고 있다면 이 죄악들을 거부할 수도 있다. 심지어 덕스럽고 거룩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만일 그가 죄와 탐욕으로 인해 자신의 건강과 소유와 명성에 미칠 수 있는 해악을 충분히 자각한다면, 자기사랑을 통해 자신의 죄악된 욕구들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잘해 주는 것이 자신의 이득과 명성을 지키는 최선의 길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자연인의 삶이 너무나 도덕적이어서 그 선량함이 마치 경건이나 참된 기독교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비 그리스도인도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할 수 있다. 신학은 다른 어떤 공부와 마찬가지로 자연인에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자연적인 생명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유지하고 장려하는 열심을 생기게 할 수도 있다. 효과적인 대중 연설을 그 주제와는 상관없이 즐기는 자연인은 기독교에 관한 설교도 좋아할 수 있다.

 

어떤 자연인들은 기도생활을 하기도 한다. 천국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 개념에 빠져들기도 한다. 천구에 대한 묘사를 성경에서 읽고 깊은 매력을 느낀다. 거기에 묘사된 영적 기쁨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천국을 마련하셨다는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는 비록 지금은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있지만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도 있다.

 

요컨대 사람들은 실제로 영적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지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들의 선한 일과 다른 이들의 악한 일이 자기사랑이라고 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를 배제한 상태에서는 사람들의 선한 일과 악한 일이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

 

이 자연적인 생명을 숙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 역시 살아가면서 이루는 많은 업적이 타고난 재능의 결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성이나 이성과 더불어 자연적인 생명은 형통함을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들 자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형통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특성을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성공적인 업적으로써 자신을 평가하거나 천국 소망을 자신의 인간적인 일에다 두지 않게 된다.

 

4. 신적인 생명의 특성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시점에서 나는 신적인 생명의 특성을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 생명"이다(골 3:3). 이 생명은 보이지 않으며, 세상은 이것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자연인에게 이 생명은 거의 무가치하며 따분한 주제일 뿐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죄악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적인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신적인 생명이 자연적 욕구를 지배하여 그릇된 것들에 속박되지 않도록 막아준다. 신적인 생명은 믿음을 뿌리로 심은 나무와 같다. 이 나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자애로움과 개인적인 정결, 겸손 등의 열매들을 맺는다. 어느 현자가 말했듯이 비록 이것들은 다들 지겨울 정도로 이야기하는 평범한 주제들이지만, 사람이든 천사든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신적인 생명의 뿌리는 믿음이며, 그 주요 열매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정결, 겸손이다. 믿음과 영적 삶의 관계는 감각과 육체적 삶의 관계와 같다. 믿음은 영적 실재들을 감지하도록 도와준다. 믿음을 통해 모든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타락한 상태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에게 긍휼과 구속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든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불린다.

 

신적인 생명의 첫 번째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며 헌신하는 마음을 조성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 목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기꺼이 감수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분과의 친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이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조만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라고 성숙해지며 더 높은 동기를 갖추게 된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위대하시며 사랑받을 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두 번째 열매는 '동료 인간들을 향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이라는 열매를 통해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의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다른 이들이 상처를 받거나 누명을 쓸 때,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정결'은 신적인 생명의 세 번째 열매이다. 이것은 죄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심령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심령은 죄로 말미암은 쾌락을 거부한다.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죄악되지 않은 것들마저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의에 대한 욕구를 가라앉히거나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기쁨을 감소시키는 것이 생각나면 그것을 기피한다. 또한 정결한 마음을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신실하기 위해서라면 곤경마저 꿋꿋이 견딜 것이다. 정결이란 자제심과 도덕성을 보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용기와 희생을 발취하는 것도 뜻한다.

 

신적인 생명의 네 번째 열매는 '겸손'이다. 겸손은 우리의 눈을 열어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죄인인가 하는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한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 자신의 모든 소유와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운 선물임을 고백한다. 겸손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게 한다. 참된 겸손은 세상의 찬사나 사람들의 칭찬에 연연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믿음, 사랑, 정결, 겸손은 사람이나 천사들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특성들이다. 이 같은 영적 열매들을 지닌 사람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자리 잡을 기초가 놓인 셈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알기 위해 굳이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캐묻거나 천국의 책들을 뒤적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자신과 관련한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심령 속에서 발견한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신시켜 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변화되면서 체험하는 기쁨은 참된 삶을 나타내는 확실한 표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기쁨이 온전해지고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증거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환상으로 보거나 천사를 통해 듣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성품이 내 영혼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증거를 보고 싶다."

 

5. 그리스도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낸다

 

새 성품과 신적인 생명의 신비를 말로써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말로써 이들을 아무리 묘사해도 충분하지 않다. 영적인 것들을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는 심령을 지닌 자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이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욥 32:8)

 

기독교의 생명과 능력은 말보다는 행동 속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행동은 말보다 더 강력하며, 내적인 생명을 보다 정확하게 증거한다. 이 때문에 영적인 열매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속에 이 열매들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최선책은 자신을 주님의 완전한 본(本)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성육신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목표들 중 하나는 다른 이들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그분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완벽한 본이었다. 참된 선은 오직 그분의 삶을 통해서만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사랑

 

그리스도의 마음은 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깊은 사랑으로 불탔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셨다. 그리스도께 있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자신의 사역을 완료하는 것은 양식(糧食)과도 같았다. 예수님께서는 성인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열중하셨다. 지상 생애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힘든 여행이나 시련도 기꺼이 감수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서 큰 만족을 얻으셨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긴 여행길에 지쳐 우물가에서 쉬셨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다. 그들의 대화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논의로 이어졌다. 영적인 일들에 관한 대화는 예수님께 너무나 큰 기쁨과 힘과 생기를 주었던 까닭에, 그분은 자신의 갈증마저 잊으셨다. 심지어 제자들이 동네에서 가져온 양식을 잡수실 생각마저 없으셨다(요 4:4-3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셨을 뿐만 아니라, 고난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분의 뜻에 기꺼이 복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가해질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참으셨다. 그럴 때에도 결코 불평하거나 불만을 갖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충분히 아는 상태에서 십자가로 나아가셨다. 하지만 광신자나 숙명론자의 모습으로 나아가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여느 사람처럼 큰 고통을 느끼셨다. 겟세마네에서 흘리신 땀과 겪으신 슬픔은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혹독할지 그리스도께서 다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고난을 맞으셨다.

 

예수님께서 "오 나의 아버지,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은 사실이다(마 26:39).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라고도 기도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2:27-28에 수록된 주님의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예수님의 영적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분은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십자가를 지연시키거나 피하시고 싶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또한 그분은 "아버지, 나를 이 때로부터 구원하옵소서."라고도 기도하셨다. 이것은 구원을 구하는 기도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철회하셨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까지 왔나이다." 그리고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는 기도 속에 그리스도의 참된 의도가 드러나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셨다.

 

이 기도들을 예수님께서 흔들리거나 나약해지셨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여기지 말라. 그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난을 잘 알고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담대히 받아들이셨다. 이 기도들은 예수님께서 감내하셔야 했던 압박감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그 고통은 너무나 끔찍해서 생각만 해도 공포에 사로잡힐 만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아버지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는 기도를 즐겨 하셨다는 점이다. 종종 그분은 혼자 물러나서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을 즐기셨다. 자백할 죄가 없고 간구할 물질적 필요도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도하셨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같은 간구가 필요할 때에만 그나마 기도한다.

 

예수님의 온 생애가 기도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교류하셨기 때문이다.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의 희생을 드리지 않으실 때에도 항상 희생단에 불을 지피셨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영적 무감각이나 냉담함과 먼저 싸워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결코 사로잡히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인간사랑

 

나는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여기서 모두 소개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자면 그분의 생애 전부와 그것에 대한 설명을 다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다른 누군가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이적들은 자신의 능력은 물론이고,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사랑은 동료 유대인들이나 가족 또는 친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한 가족처럼 사랑을 받았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마 12:50).

 

신실한 동기로서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은 누구나 환영받았다. 그분은 간구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젊은 부자 관원 외에는 슬픈 기색으로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이 없었다. 그 관원이 슬펐던 것은 자신의 영혼과 돈을 동시에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나타내셨다. 영생을 제시받고도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그 젊은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셨다. 젊은이는 나름대로 열린 마음으로 영생에 관해 여쭈었고, 그 점이 예수님의 마음을 끌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막 10:21). 예수님께서 비록 그를 사랑하셨지만 천국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려 하지는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지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깨뜨리실 수 없었다.

 

입맞춤으로 배신하는 유다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대적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 외에 그분의 뜨겁고도 무한하신 사랑을 입증하려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피를 흘리시는 동안에도 대적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자신의 죽음을 그들 탓으로 돌리지 마시기를 아버지께 간청하셨다. 또한 자신의 죽음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을 위한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의 정결

 

앞에서 말했듯이 신적인 생명의 세 번째 열매는 '정결'이다. 정결은 이 세상의 쾌락을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 정결을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험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쾌락에 전혀 얽매이지 않은 이는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생활을 즐길 자유를 사람들에게 허용하셨다. 결혼식에 참석하심으로써 결혼제도를 인정한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러나 자신은 독신으로 사셨다. 어떤 결혼식에서 예수님께서는 동난 포도주를 채우는 이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광야에서 굶주릴 때는 기적을 일으키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정당한 쾌락을 즐길 기회를 주시는 자애로운 분이셨고, 자신은 엄격히 절제하는 경건한 분이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보다 심각한 필요사항들은 물론이고, 덜 중요한 것들도 기꺼이 제공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여러 차례 언급하지만, 그분의 웃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사야가 대언했듯이 그분은 "사람에게서 멸시를 당하고 버림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으로 고통에 익숙하신" 분이셨다(사 53:3).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시련과 고통은 모두 스스로 택하신 것이었다. 세상에서 그분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를 능력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그물에 가득 걸리게 하며 물고기 입에서 납세용 동전을 취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실 수도 있었다.

 

그분의 능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시저의 군대를 충분히 물리칠 정도로 많은 군대를 간단하게 소집할 수도 있었다. 그분의 이적들은 그 크신 능력을 분명히 드러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 세상 것들이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분은 너무나 겸손하셔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자기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마 8:20). 예수님께서는 부자나 권세자들과 함께 지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목수의 아들로 알려지셨고, 어부들과 가난한 자들을 친구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겸손

 

이제 신적인 생명의 마지막 열매인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겸손의 본보기셨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법을 배운다(마 11:29). 여기서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겸손함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빌 2:5-11). 다만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보여 주신 겸손에 대해서만 언급하려 한다.

 

우리 같은 죄인이 겸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겸손은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무한한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인성을 입으신 그분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셨다. 자신의 삶을 통해 비추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22). 그분은 이 영광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인사를 거부하셨다. 그 젊은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무지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8:19). 그 젊은이는 예수님을 단지 한 사람으로만 여겼다. 그의 무지를 염두에 두시고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므로 사람에게 그런 찬사를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http://lloydjones.org/zbxe/Puritan07/5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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