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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녹스(John Knox)

김영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1. 11. 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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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창립자(The founder of the Presbyterian)


 

하나님의 나팔수(God's Trumpeter)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Scotland's Reformer)


 

요한 녹스(JOHN KNOX)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에스겔 3장 17절).”


 


우리는 칼빈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는 있지만 녹스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칼빈은 1509년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에 속하는 노용에서 출생하였으며,『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녹스 및 많은 종교 개혁자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또한 칼빈은 스위스의 도시인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정립시켰는데 이러한 것들이 녹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녹스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칼빈에게로 와서 자신이 출생한 나라인 스코틀랜드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또한 녹스는 칼빈에게 무릎을 꿇고 성경을 배운 사람이며, 칼빈을 가리켜 ‘지상에서 가장 그리스도적인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녹스는 스코틀랜드가 로마 카톨릭의 손아귀에 넘어가려고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생명을 걸고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바로 이 녹스가 장로교의 디딤돌을 놓았으며, 녹스로 하여금 지금의 장로교가 출범하게 된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칼빈이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녹스인 것입니다. 칼빈은 말씀을 통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것을 녹스가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 오늘날 장로교의 효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녹스가 장로교의 창립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국 장로교의 뿌리는 칼빈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이어 받은 녹스가 세운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녹스는 교회의 3대 표지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첫째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며, 둘째는 올바른 성례의 시행이며, 셋째는 성경의 교훈에 따른 교회 권징의 시행입니다. 녹스는 1514년경에 스코틀랜드 동부 로티안주에 있는 해딩턴의 기포드게이트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여 세인트 앤드루스라는 스코틀랜드의 도시에서 종교개혁자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스코틀랜드에는 당시에 1,000개가 넘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900개 이상은 수도원, 대성당, 혹은 대학에 부속된 교회로서 수입만을 거두어 들였을 뿐이지 영혼을 구제하고 돌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양떼들은 굶주림에 못이겨 사방을 둘러보아도 먹여주는 이가 없었다.‘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당시에 교회를 장악했던 주교, 수도원장, 수사, 성당 참사회원들은 모두가 심각하게 무지하였으며, 그 무지는 성경에 대한 무지로써 그 결과 그들의 삶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결과로 인해 그들의 삶은 무너져 버리게 되었고, 성적 타락과 탐욕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은 순결을 지키며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의 삶은 극도로 부패하였고, 세인트 앤드루스의 대주교인 데이비드 비턴 추기경은 사생아를 20명이나 낳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고위 성직자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사제들까지도 음란하였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탐욕인데, 스코틀랜드 전체 재산의 반 이상이 교회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나머지 반도 사제들이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재주껏 긁어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악랄하게 그들의 재산을 착취하다가 죽을 때가 되면 재산 헌납을 받아내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지금 현 시대에도 이러한 헌금 갈취 사건이 교회에서 자행되고 있으며, 특히 기도원에서는 거의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도원에서는 소위 말하는 부흥사들이 축복이라는 거창한 미끼로 성도들의 돈을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갈취하며, 하나님을 헌금을 내면 복을 준다는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신성모독죄와 같은 무서운 죄악을 연발하고 있습니다. 특히 해가 바뀌면 신년 축복 대성회라는 이름으로 헌금을 갈취하는 자태를 해년마다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헌금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굳이 말한다면 우리가 말씀대로 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헌금을 드린다면 그 헌금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에게나 적합한 것입니다. 또한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교황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구원받기에 필수적이며, 산자난 죽은 자나 죄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죽은 성인들이 이름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기 보다 교황의 사면과 고해성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에 일반 사람들에게 성경이 주어졌다면 교회의 가르침이 분명한 거짓말이며, 사탄의 괴악한 소리임을 알았을 텐데 그 시대의 상황은 불행히도 성경은 소수의 사람들만 볼 수 있는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나마 일반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은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 받는 도중에 소매에 감추어 온 신약 성경을 꺼내들면 여기저기서 ‘봐라, 저 놈이 소매에 이단 책을 가지고 다닌다. 저 책 때문에 교회에 온갖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아우성을 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시대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었었으며, 거짓된 교회의 거짓된 가르침에 얽매어 따를 수밖에 별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을 우리 스스로 볼수 있다는 것이 감사를 뛰어 넘어 놀라운 기적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러한 시대에 종교 개혁은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고, 그 종교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버리는 것이 필연적이었으며,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거짓이 탄로날까봐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종교 개혁자들을 이단자로 내몰고 화형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 중에 20여명이 화형을 당하게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투옥되거나 무거운 벌금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는 패트릭 해밀턴인데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폭로하고 비판하였습니다. 교회는 해밀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회개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죄악을 기리고자 살인이라는 또 다른 죄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해밀턴에게 이단이라는 그럴싸한 죄명을 뒤집어 씌워 죽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결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살인을 서슴치 않고 범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중요시 여기는 말은 코람데오(CORAM DEO)인데 이는 라틴어로써 ‘하나님 앞에서’ 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항상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언행심사를 하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교회는 코람데오의 의미가 상실되어 버렸고, 또한 지금 현 시대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밀턴의 벼락같은 말에 세인트 앤드루스의 대주교인 제임스 비턴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깜작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턴은 교회의 잘못된 교리에 관한 토론을 벌이자는 핑계로 해밀턴을 유인하였고, 이에 해밀턴이 그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자 비턴을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화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해밀턴은 1528년 2월 29일에 화형을 당하면서 ‘지금 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다.’ 라고 외치며 죽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해밀턴의 죽음으로 인하여 개혁운동이 잠잠해 질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거의 온 나라안에서 해밀턴의 죽음을 듣게 된 사람들은 해밀턴의 죽음에 관해서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한 해밀턴의『교회 비판문』의 내용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 글의 내용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진리라고 믿었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또 다른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는 조지 위샤트입니다. 이 위샤트는 녹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자입니다. 이 위샤트는 학생들에게 헬라어 신약성경을 가르친 일이 화근이 되어 영국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해밀턴처럼 생애가 그리 길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교회의 최고 성직자는 해밀턴을 화형시킨 제임스 비턴의 조카인 추기경 데이비드 비턴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제임스 비턴처럼 종교개혁운동을 혐오하여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위샤트를 엉터리 재판에 회부한 뒤 위샤트를 1546년 3월 1일에 화형시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이 때의 사람들의 분노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복된 하나님의 순교자가 죽은 뒤 사람들은 노골적인 어조로 교회가 벌인 잔혹한 행위를 욕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해밀턴과 위샤트의 죽음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불을 지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단명하였지만 녹스가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녹스보다 더 큰 일을 한 사람을 없습니다.

녹스는 위샤트로 하여금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위샤트가 죽기 전 5주 동안에 녹스는 위샤트 곁에 머물면서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녹스는 위샤트의 신변을 보호하기도 하였습니다. 녹스는 종교 개혁자인 위샤트를 보호하기 위해서 양날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녹스는 1545년 12월의 어느날 밤에 위샤트가 마지막 설교를 전할 때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위샤트와 함께 있었고 그 날밤에 위샤트가 체포된 그의 집까지 동행하겠다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샤트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을 직감하면서 녹스의 동행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이 만약에 죽게 되면 녹스라도 살아 남아서 종교개혁을 단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위샤트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져서 언젠가는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샤트는 녹스에게 말하기를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로 가보게, 희생 제물을 나 하나면 족하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샤트를 핍박하는 자들이 그의 경호원인 녹스를 잡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에 녹스는 검거의 표적이 되어 은신처를 찾아 여기저기 도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고, 이러한 일에 지쳐 버린 녹스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피신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위샤트를 죽인 데이비드 비턴 추기경은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턴을 살해한 사람들은 당시에 수성파라고 불려진 사람들인데 이 수성파란 성안에 피신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턴 추기경을 무참히 죽이게 되었고, 비턴은 죽어가면서 외치기를 ‘난 성직자다. 난 성직자야 괘씸한 놈들, 아 이제 끝이로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수성파들은 비턴의 시체를 한 동안 성벽에 매달아 두었다가 소금에 절여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 성 안의 악명 높은 호리병 지하 감옥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 비턴을 살해한 수성파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안에 계속 머물러 있기로 다짐하였습니다. 당시에 스코틀랜드의 섭정이며, 통치자였던 애런 백작이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지만 성을 함락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섭정이라는 것은 군주인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녹스는 이 성에 들어가게 되었고, 얼마 후 녹스는 설교자가 되어 종교개혁자로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요한복음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헨리 볼네이브스와 존 러프도 있었는데 볼네이브스는 개혁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 피신해 있었던 사람이고, 러프는 성내의 설교자였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녹스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게 되었고, 러프는 자신의 설교 사역에 녹스가 동역해 줄 것을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녹스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러한 사역에 부르셨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청을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곳에는 달려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러프와 볼네이브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상의한 뒤에 녹스에게 알리지 않은 채 회중의 이름으로 그에게 공적인 사명을 맡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한 그 날에 러프는 목회자의 선출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러프는 회중에게는 자신들이 설교에 합당한 소명이 있다고 인식하는 한 사람에게 설교자로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 사람이 그러한 소명을 거절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러프는 그 설교를 듣고 있던 녹스를 바라 보면서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자네에게 하더라도 노하지 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 입을 빌어 지금 자네를 부르는 이 모든 이들의 이름으로, 이 거룩한 소명을 거절하지 말기를 요청하네. 자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며 형제들을 바르게 양육하고 과중한 사역에 눌려 있는 나를 도울 마음이 있을테니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를 피하고 그 분이 자네에게 풍성한 은혜를 더하실 것을 소망한다면 공적인 설교 사역을 맡아 주게’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러프는 회중들에게 ‘이것이 여러분이 저에게 맡긴 일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은 이 소명에 찬성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회중들이 답하기를 ’맞습니다. 찬성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녹스는 회중의 분위기에 압도 당하여 눈물을 쏟게 되었고, 그 곳을 떠나 며칠 동안을 홀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이제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설교자로써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시대와는 다르게 말씀을 바로 증거하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녹스는 다니엘서 7장 24절로 25절을 본문으로 삼고 설교하는 도중에 교황제도를 다름 아닌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녹스는 카톨릭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역대 교황들이 얼마나 추악한 삶을 살았는지를 폭로하면서 말씀을 통해 카톨릭의 교리와 교회법과 주장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녹스는 회중 가운데 누구든지 자신의 성경해석에 이의가 있다면 추후에 그 사람과 토론할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녹스의 설교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다른 이들은 카톨릭의 가지만 잘라 낼 정도였지만 그는 아예 카톨릭을 멸하려고 그 뿌리를 내리쳤다.’ 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조지 위샤트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한 적이 없는데 화형에 처해졌다. 녹스는 더할 것도 없다.’ 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교회의 당국자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은 녹스를 영영히 침묵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안을 수비하는 병사들이 계속 성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일들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자 교회 당국은 사원과 대학에 있는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주일마다 돌아가면서 설교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고, 그 결과 녹스는 주중에만 설교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러프는 성을 떠나게 되었고, 녹스가 수성파에게 남은 유일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녹스는 이들에게 말씀을 통해 많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1547년 6월 마지막 날에 성안 사람들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주된 요인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며, 통치자인 애런 총독이 레온 스트로치 제독이 지휘하는 2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함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녹스는 노트르담이라는 갤리선에서 족쇄에 묶인 채 19개월동안이나 노 젓는 일과 모진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곳의 생활은 음식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위생은 불결하였으며, 악취가 진동하여 사람이 지내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이 배안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자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답게 채색된 여인인 성모 마리아상을 가져와서 입을 맞추라고 강요하였고, 녹스는 이에 ‘나를 성가시게 마시오, 그런 우상은 저주받은 것이오, 그러니 난 떨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모상에게 손을 대라고 강요하게 되었고, 성모상으로 녹스의 얼굴을 거칠게 찌르고는 손에 억지로 쥐어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녹스는 그 성모상을 강물에 획 던져 버리고서는 말하기를 ‘이제 성모 마리아가 알아서 자기 목숨을 구할 거요, 몸무게도 가벼우니까 수영하는 법이나 배우게 놔 두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뒤로는 우상을 강요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녹스의 건강은 이 갤리선에서 겪은 고초로 인해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베 안에서 녹스는 심하게 앓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녹스의 생명을 단념하게 되었는데 녹스는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녹스는 잡혀 올때부터 언젠가는 자신과 나머지 죄수들이 자유의 몸이 될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이 속박에서 구원하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녹스를 실은 배는 세인트 앤드루스가 보이는 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녹스의 동료 죄수인 제임스 벨푸어가 녹스를 일으켜 세우며 이 곳을 아느냐고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녹스는 대답하기를 ‘물론 잘 알지 하나님이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내 입을 여셨던 저 곳의 첨탑이 눈에 보이네. 지금 내 모습이 아무를 초라해 보여도 내 입술이 저 곳에서 그 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할 때까지는 결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거라고 나는 확신하네.’ 라고 하였습니다. 녹스의 이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죄수로 19개월을 보낸 뒤 녹스는 수성파들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녹스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가 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자기의 민족을 버려서도 아니고,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것은 앞 날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녹스는 당시에 종교 개혁자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인 영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5년 동안 영국에서 목회하면서 그의 설교로 인해 한 도시가 변화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영국의 왕인 헨리 8세는 1547년 1월 28일에 운명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어린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이 에드워드 왕을 존경하였고, ‘가장 경건하며 덕스러운 왕’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짧은 치세를 ‘저 위대한 안식’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일로 하여금 유럽 등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갈망하는 자들이 영국으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이 에드워드 왕이 재임하는 기간 동안에 영국에서는 설교 허가증을 80명에게 발부하였는데 그 중 64번째에 녹스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녹스는 1549년 4월경에 버릭 어폰 트위드라는 국경도시의 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제 종교의 위대한 안식을 가져다 준 에드워드의 왕의 병세가 심해지자 녹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만 갔습니다. 왜냐하면 에드워드 왕이 죽게 되면 더 이상의 종교의 자유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 편을 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553년 7월 6일에 에드워드 6세 왕은 1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녹스는 이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는 미덕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정말 경건한 마음가짐을 지닌 한 왕을 모셨습니다. 역사상 어떤 선왕도 그를 능가하지 못했고, 제가 아는 바로는 그의 치세에 비할 만한 태평성대도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해 7월 19일에 에드워드의 누이인 메리 튜더가 여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수도인 런던 사람들은 그녀의 즉위를 환영하였지만 종교 개혁자들은 또 다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다음달에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관용을 베풀겠다고 공표하였고 몇 달동안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폭풍전야의 고요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메리는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에 대한 관용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11월 의회에서 교회 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법들을 폐기하고, 로마 카톨릭을 이전처럼 국교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에게는 한 달 동안의 유예 기간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는 12월 20일 까지는 자유롭게 개혁주의 예배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의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려 체포와 재판 회부와 처벌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위대한 안식은 에드워드 왕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렸고, 대부분의 개신교 목사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동안에 걸쳐 영국의 많은 성도들이 화형대에서 순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메리여왕을 가리켜 피의 여왕(Bloody Mary)이라고 합니다. 녹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사시에 배를 타고 영국을 떠날 수 있도록 해안가에 있는 안전한 피난처로 가게 되었습니다. 녹스가 피신을 선택한 이유는 형제들의 눈물과 간곡한 권유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녹스는 자신이 영국에 남으면 죽음을 모면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나 디에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영국에서 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배에 오르게 된 녹스는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그는 배에 오르기 직전에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나의 매일의 기도는 그 지역에서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향한 것이다. 때때로 나는 어떤 나라나 지역도 나에게 똑같이 소중하게 느껴질 만큼 스코틀랜드에 대한 나의 애정이 줄어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 땅에 있게 될 현재의 이 고통이 스코틀랜드에서의 고통보다 내게는 갑절로 더 가슴이 아프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라고 기록하였다. 녹스는 프랑스 디에프에 몇 주 동안만 머무르다가 스위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는 바로 칼빈이 있던 곳입니다. 녹스는 칼빈과 만나게 되었고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칼빈과 함께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대담하게도 영국의 메리 튜더 여왕을 강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녹스는 ‘이세벨이 온 이스라엘에 세운 단두대 숫자도 저 악독한 메리가 영국의 수도인 런던 한 곳에서만 세운 단두대 숫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라고 하였습니다. 녹스가 남긴 말 중에서 ‘진리는 교수대 위에 있고, 불의는 왕좌에 있도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또한 메리여왕을 꼬집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녹스는 메리를 가리켜 ‘약속 위반자’ 이자 ‘사악한 여자’ 라고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녹스는『첫번째 나팔소리』(The First Blast)라는 책을 제일 먼저 출판하였는데 이 책 역시 영국의 메리 튜더 여왕을 겨냥하여 쓴 것입니다.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은 여자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특히 남편이 다른 나라의 통치자일때에는 남편에게 통치권을 양도해 주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메리 튜더 여왕이 실제로 왕국을 남편인 스페인 사람 필립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영국을 로마카톨릭의 손아귀에 집어 넣었다는 것이다. 이는 스페인의 국교가 로마 카톨릭이기 때문이다. 녹스는 이처럼 어떠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녹스는 또한 영국의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지는 메리 튜더 여왕에게는 물론이고, 메리 스튜어트라고 하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에게도 강한 어조로 잘못을 지적하고, 여왕에게 눈물을 흘리게까지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녹스와의 대화 중에 종교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자신은 로마 카톨릭 교회야 말로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녹스는 메리 여왕에게 대답하기를 ‘폐하, 폐하의 뜻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제가 로마 카톨릭교회를 창녀라고 부른다고 놀라지 마십시오, 로마 교회는 교리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서나 온갖 영적인 간음으로 완전히 더럽혀져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메리 여왕은 자신이 더 이상 녹스의 말에 항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내게 말씀을 전한 이들이 여기 있다면 그들이 그대에게 답변해 줄 것이요.’ 라고 하면서 녹스의 질문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러자 녹스는 말하기를 ‘폐하, 그들이 유럽에서 가장 학식있는 교황주의자였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녹스는 메리 여왕이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 참여한 것을 강하게 비난하였는데, “미사는 만 명의 무장한 적들이 거룩한 종교를 억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군해 오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미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천주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1563년 여름에 녹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아들인 돈 카를로스와 메리 여왕의 혼담이 오고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의 여왕 메리 튜더도 스페인 사람 필립과 결혼하게 되어 스페인의 국교인 로마 카톨릭이 영국의 국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가 스페인 국왕의 아들인 돈 카를로스와 결혼하게 되면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로마 카톨릭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입니다. 녹스는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미래는 암담할 것이라고 설교를 통해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이렇듯 녹스의 설교는 단순한 정도를 뛰어넘어 국가의 흥망성쇠를 하나님께 맡기고 강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메리 여왕은 이 일로 하여금 심하게 노하게 되었고, 녹스를 불러서 눈물을 흘리며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대가 내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요? 아니, 이 나라에서 당신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요?“ 이 여왕의 질문에 녹스는 대답하기를 ’폐하, 저는 이 나라의 백성입니다. 제가 비록 이 나라의 백작도 귀족도 남작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저를 만드셨습니다. 제가 폐하의 눈에 아무리 미천해 보여도 이 나라에 유익이 되는 백성입니다. 폐하, 참으로 저는 어느 귀족 못지 않게 폐하께 큰 해를 끼칠 일을 미리 경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소명과 양심 때문에라도 솔직히 말씀드릴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귀족들이 폐하께 신앙없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들은 자기 본심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진리를 몰아내며 이 나라의 자유를 배반하고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폐하께 별 위안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메리 여왕은 녹스의 말을 듣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메리 여왕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녹스는 오래도록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녹스는 마침내 말하기를 ‘폐하, 저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컨대 하나님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는 모습을 보면 결코 즐겁지가 않습니다. 참으로 저는 제 손으로 제 자식을 때릴 때에도 제 자식의 눈물을 차마 보지 못합니다. 하물며 폐하께서 우시는데 제가 어찌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폐하께서 당연히 기분 상하실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저의 소명이 요구하는 대로 진리를 말씀드렸다는 것을 아는 이상 저는 내키지는 않지만 제 양심을 상하게 하거나 저의 침묵으로 인해 제 조국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폐하께 눈물을 흘리게 하는 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녹스는 이 충성스러운 말로 인해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하여금 녹스는 메리 여왕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메리 여왕은 녹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녹스는 너무나도 휼륭하게 자신을 변호하여 메리 여왕의 생각과는 반대로 무죄를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녹스는 그날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날 밤 궁정에는 무도회도 바이올린 소리도 없었다. 이는 귀족들의 투표를 통해 나를 손아귀에 움켜쥐려는 여왕의 계획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메리 여왕은 말하기를 ‘유럽 전 군대보다 녹스의 한 마디가 더 위협적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녹스가 세인트 앤드루스에 도착하게 되자 한 경고의 메시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인트 앤드루스의 대주교는 녹스가 도시의 설교 장소나 주요 교회에 나타난다면 수십 자루의 총이 녹스의 코를 겨냥해 불을 뿜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녹스의 친구들은 이 소식에 놀라 그에게 설교하는 것만은 삼가하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녹스의 의지를 결코 꺽을수는 없었습니다. 녹스는 말하기를 ‘내게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해서는 아무도 염려하지 말게, 내 생명은 그 분의 것이고 나는 그 분의 영광만을 바라니 말일세, 그러니 주님이 당신의 자비로 내게 기회를 주시는데도 그들의 폭압이 두려워 내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그만 둘수는 없네, 어떤 사람의 손이나 무기도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바라지 않네, 오로지 나는 말씀에 귀 기울일 사람들을 간절히 원하네, 여기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찻아봐야지.’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녹스는 주일에 교구 강단에서 주님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어좇는 복음서의 내용을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이 녹스의 설교를 감히 방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설교로 하여금 대학의 여러 학자들을 비롯한 수 많은 청중들이 대단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고, 대다수의 성직자들과 사람들이 카톨릭에 대한 복종을 철회하였습니다. 녹스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인 것은 오로지 복되신 영광의 주님 덕분이라고 말하며, 그래서 나팔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1572년 11월 24일 월요일에 녹스는 죽음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정오쯤에 자신의 부인에서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시간 후에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여기는 내가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이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녹스는 ‘이제 때가 왔소’ 라고 속삭이며 아무런 고통도 움직임도 없이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 자택에서 58년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죽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잠을 잔 것 같았습니다. 이 때 시간은 약 11시 경이었습니다. 녹스는 이틀후인 수요일에 세인트 가일스 교회의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무덤을 덮는 가운데 당시에 잔인하고도 교만했던 백작이 말하기를 ‘그 어느 누구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던 육체가 여기에 누워 있다.(Here lies one who never feared any fiesh)'라고 하였습니다. 녹스는 일평생 하나님의 나팔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며, 그 증거함에 있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친 자입니다.

1567년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567년 12월 의회는 로마 카톨릭에 대해 규제하는 법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가 스코틀랜드의 국교임을 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메리가 왕위에서 물러감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이며, 녹스의 목숨을 건 끝없는 저항 때문입니다. 바로 이 개신교로 하여금 오늘날 장로교가 비로소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개신교란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라고 하는데 이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하다, 이의를 제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의미처럼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점을 강하게 주장하고, 그에 대해서 항의하며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당시에 개신교가 오늘날의 기독교이며, 로마카톨릭은 오늘날의 천주교인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를 구교라고 하며, 기독교를 신교라고 합니다.

녹스는 자신의 설교를 가리켜 ‘주인의 나팔을 부는 것’(blowing the master's trumpet)이라고 묘사하였다. 나팔수란 나팔을 부는 자는 의미하며, 성경에서 찾아 본다면 오늘 말씀인 에스겔 3장 17절에 기록된 파숫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숫군의 히브리 말은 ‘초페’ 로서 이는 먼 곳을 응시하거나 어떤 사물을 관찰하거나 소식 따위를 기다리는 자를 의미합니다. 즉 망을 보는 사람을 의미하며, 위험성을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임이 주어진 자를 의미합니다. 파숫군이란 성의 높은 망대에 올라가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자를 가리킵니다. 파숫군은 적군이 쳐들어 올라치면 나팔을 불어 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위험성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만약이 파숫군이 나팔을 불지 않는다면 성 안에 있는 자들은 순식간에 몰살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파숫군이 졸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파숫군이 졸지 않고 깨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령 깨어 있다고 할지라도 적군이 쳐들어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군이 가장 먼저 노리는 제일 타켓은 누구겠습니까? 바로 파숫군입니다. 왜냐하면 파숫군을 제일 먼저 죽여야만 그가 나팔을 불수 없고, 그 결과로 인해서 성을 정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파숫군이 나팔을 분다는 것은 단순히 적군들의 침략을 알린다는 개념을 뛰어 넘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복음을 증거해도 죽음의 위협을 당하지는 않지만 녹스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면 교회의 비리가 탄로날까봐 이단이라는 죄명을 뒤집어 쓰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녹스는 하나님의 나팔수로서 어떠한 권력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른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교회가 오늘날의 장로교입니다. 이 장로교는 현실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 시대의 장로교는 그렇지가 않는다는 것이 큰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해 버리며 개인의 체험이나 생각으로 쉽게 매도시켜 버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러한 교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성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거짓 부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다섯가지 구호가 있는데 첫째는 ‘Sola Gratia’(오직 은혜)이며, 둘째는 ‘Sola Fide’(오직 믿음)이며, 셋째는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이며, 넷째는 ‘Solus Christos’(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다섯째는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 중에서 가장 종요하다고 말할수 있는 것은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번째인 ‘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입니다. 이는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tes' 즉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라는 의미이며, 성경만이 성경을 해석할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도 교황의 말도 목사의 생각도 교인의 체험도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오직 성경으로써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할 때 비로소 바른 은혜가 주어지며, 바른 믿음을 소유할 수가 있으며, 그 바른 은혜와 바른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드릴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니고 있는데 이 모서리를 인간의 철학과 이성과 여러 가지 잡스러운 것들이 무디게 만들고 둥글게 만들고 있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입니다.

기독교 방송매체를 통해서 여러 설교자들이 성경을 모독하고 있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입니다. 성경을 인간의 편에 맞추어서 인본주의적인 관점으로 증거하여 성도들을 헛된 은혜에 매료시키고 있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무서운 죄악을 서슴없이 범하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입니다. 마치 홍수 가운데 정작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설교자들은 많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설교를 찾아볼 수가 없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입니다.

녹스가 좋아했던 두 사람의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아모스입니다. 이 두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것과 같이 녹스 자신도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둘 중에 아모스는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모스 시대나 지금의 현 시대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선포는 백성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하는 것보다 그 상처에 소금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이 죄에 대해서 쓰라린 고통을 겪게 되어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고 진리가 땅에 떨어져 가는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종교 개혁자들이 생명을 내 걸고 지켰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도 지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 소망이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진리로써 바로 증거되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최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시대를 하나님께 맡기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늘 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멘- Ω

 

 

김영재 박사

http://blog.daum.net/ktsdmin9182/3838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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