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세상 가운데 있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로 하여금 선택하신 자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죽음으로써 택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를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아무든지’ 라는 말이 아니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전부 다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수가 있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 말씀하나만을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 말씀이 기록된 전후 문맥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특히나 그 말씀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잘 관찰해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로마서 10장의 앞장인 9장 21절에 토기장이에 관한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토기장이는 우리를 흙으로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 이 말씀에서와 같이 똑같은 흙으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단순히 귀히 쓰느냐? 천히 쓰느냐? 가 아니라 귀히 쓸 그릇인 택함 받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것이고, 천히 쓸 그릇인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선택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인데 그 믿음을 가리켜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하나님의 선물’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물이란 모두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받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기념품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성경에서 믿음을 기념품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모두 다 받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선물은 받을 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선물은 받는 자에게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에게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물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주는 자에게 불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는 자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 믿음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받는다면 아무런 감사도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귀한 믿음을 우리 스스로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열심을 다한고 해도 이 믿음은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우리가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귀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그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제 3위이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죄인된 우리들은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통해 어두워진 우리들의 심령은 도무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지혜를 주셔야만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 하나님의 강림하심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성령하나님이 오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으며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게 가장 은혜로우신 분을 굳이 말하자면 십자가에 죽으신 제 2위이신 성자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구원을 믿을 수 있게 하신 제 3위이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시지 않습니다. 제 1위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믿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제 1위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란 과연 무엇이겠습까? 방언을 하고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며 은사를 행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러한 것들은 성령께서 주시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은사를 행하는 것보다,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하고 겸손하고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방언을 말하고 은사를 행하는 자들은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행위이므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3절의 말씀처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고 하실 것입니다. 특히 이 말세지말에는 이러한 자들이 우리를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헛된 것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까지 성령이 오신 목적과 성령의 충망함의 대해서 잘못되게 들어 왔고 잘못되게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인양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은사를 행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인양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성령 강림의 의미인양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오순절날에 제자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사도행전 1장 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모여있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 말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등장하시는데 ‘내게’ 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고, ‘약속하신 것‘ 은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약속하신 것은 요엘서 2장 28절에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14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여 주신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여기에서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인데 이 말의 의미는 위로자, 조언자, 조력자라는 뜻입니다. 위로자란 말 그대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고, 조언자란 상담자란 의미로써 변호자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변호사에게 말하여 변호해 줄 것을 맡기고, 부탁하는 것으로서 우리 또한 우리의 죄를 성령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용서받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또한 조력자란 말 그대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 목적은 그들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 복음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복음의 의미를 알수도 없을뿐더러 증거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순교의 각오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증인에 해당하는 헬라어느 ‘마르튀레스’ 인데 이는 순교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을 각오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강림의 진정한 목적이고 성령 충만함의 의미인 것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 들이 지켜온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오순절은 구약시대에 칠칠절로 지켰습니다. 이 오순절은 50일 째 되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시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가 승천하셨고, 50일째 되는 날인 10일 후에 성령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성령하나님이 오실 때에는 본문 2절의 말씀처럼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는 헬라어로 살펴보면 여기에서 ’같은‘ 은 바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상태, 즉 급하고 강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람이 내는 것 같은 소리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닌 것입니다. 담반 바람 같은 것입니다. 또한 3절의 말씀에서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불‘이 아니라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2절과 3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이 바람과 불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각각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사들이 흔히 말하는 ’불 받아라‘ 는 말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며, 오히려 불을 받으면 타서 죽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라고 말하였고, 이어서 12절 후반부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는 11절에서 말하는 블이 12절을 통해서 볼 때에 멸망의 불임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성령세례와 불 세례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 다 구원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는 구원의 세례이고, 불 세례는 심판의 세례인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받는 구원의 세례이고, 불 세례는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받는 심판의 세례인 것입니다. 비록 성령 세례와 불 세례를 똑같은 구원의 세례로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불은 성령의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므로 불 받기를 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3절 말씀의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 의 정확한 의미는 불과 같은 혀들이 각 사람에게 분배되어서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불이 아니라 불과 같은 혀입니다. 그리고 누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불이 아니라 혀입니다. 혀는 바로 언어를 상징하고 복음 전파를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서 3장 6절에서도 ‘혀는 곧 불이요’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혀은 헬라어로 ‘글롯사이’ 입니다. 이 ‘글롯사이’ 는 4절에 기록된 방언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3절의 ‘혀’ 와 4절의 ‘방언’ 은 똑같이 헬라어로 ‘글롯사이’ 라는 말입니다. 이 ‘글롯사이’ 는 영어로 ‘tongues'로서 이는 혀, 말, 언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언어라는 의미로서 사람들이 알아들을수 있는 말인 것이며, 반면에 알아들 수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성령을 통해서 만이 알아들을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제 4절의 말씀처럼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 후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새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방언은 순전히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오순절 방언 사건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된 것입니다. 이 오순절 날 방언 사건은 창세기 11장에서 인간의 교만함으로 쌓게 된 바벨탑을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나누이게 하시므로 무너뜨리신 것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여러 가지 언어가 모두 소통될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오순절날에 5절의 말씀처럼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6절로 11절의 말씀처럼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하여 각기 자기나라 말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그들은 복음을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방언을 말하게 하시고 그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 때 모인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의 말로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한 방언을 하게 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고린도 전서 14장에 기록된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입니다. 또한 오순절날의 방언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이 담겨져 있고, 고린도 전서에서의 방언은 개인의 기도를 돕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오순절 날 방언은 단회성으로서 이 오순절말에만 임한 방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 오순절날의 방언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 종결된 것입니다. 이 오순절날 성령의 춤만함으로 인하여 계집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가 사도들과 함께 36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고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이 일로하여 그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게 되엇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41절에 삼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성령 충만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음을 들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방언을 말하거나 은사를 행하거나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되지만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또한 성령이 강림하신 목적은 복음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 그 복음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란 말씀충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을 동일하게 행하십니다.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여 그 말씀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도행전을 가리켜 성령행전이라고 하는데 그 말도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로서는 말씀행전이며,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보다 말씀행전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더 말씀을 가깝게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9절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라’ 는 말씀을 완성시키시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신 것이고, 제자들에게 그 복음으로 세상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전할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능력을 부어주시되 충만하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야 만이 그들이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이 충만해야만이 말씀을 증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임하실 때 혀의 모양으로 임하신 것이고, 그들의 이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수 있는 언어의 능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 충만을 받고 사도행전 2장 13절의 말씀처럼 새 술에 취한자 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정이 강햇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1장 1절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았다‘ 고 해야 맞는 말 같은데 성령이 아닌 말씀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말씀과 성령이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이고 성령을 받은 것이 곧 말씀을 받은 것이며, 말씀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방언을 말하거나 능력을 행하거나 은사를 행하는 것 보다도 말씀을 바로 믿고 그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은사 충만’ 보다도 ‘말씀 충만’ 이라고 해야 더 성경적으로 합당한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성령 충만을 은사충만이라고만 보는 잘못되 사상에 빠져 있습니다. 성령 충만에는 비록 은사의 부분도 있지만 꼭 은사충만이라고만 본다면 악한영의 미혹에 바질 경향이 다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 자들이 우리 주위에 참 많이 있음을 우리가 직접 목도할수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간증을 통해 자기의 영광을 취하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래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비록 간증을 어쩌다가 백에 한 번 하는 것은 괜챦을는지 몰라도 너무 자주하는 것은 교회가 삼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간증을 원해도 본인 스스로 정중하게 사양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간증이 아니라 오직 말씀만이 성장시킬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동안 성령의 충만함에 대해서 어리석었던 우리의 지난날을 회개하고, 개선 시켜서 오늘 말씀을 들은 대로 성령이 강림하신 의미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 믿게 하여서 구원 받게 하시고, 또 그 복음을 증거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생명의 예수님게로 인도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제 부터라도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함 삶이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외형적인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생명을 다해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에 모인 저와 여러분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아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시고,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교회의 직분들을 겸손히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야 만이 자기에게서 하나님이 존귀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되며, 복음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다 되어서 우리를 통해 교회가 부흥되고 가정이 복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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