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특징
임경근 목사(현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SFC간사저널 2007년] 겨울호 3-7페이지에 실린 글.
이 글은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살피고 개혁신앙의 자리를 찾기 위한 서론이다. 한국 교회 역사에 미친 유럽 개혁신앙(학)의 영향은 미약하다. 반면에 미국을 통해 들어온 복음주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개혁신앙은 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가 일ㆍ이차에 걸친 대 각성 운동을 거치면서 복음주의와 혼합되면서 상당부분 희석된다. 한국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선교사를 통해 전파된 복음주의적 신앙의 특징이 한국 교회의 오늘 모습을 낳게 된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음 글에는 복음주의가 무엇이며 그 특징을 살펴 볼 것이다. 복음주의가 한국 교회의 주류로서 상당역할을 감당했지만 또 한국 교회의 취약한 점을 양산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대안으로 복음주의와 대비되는 개혁신앙을 살펴보고 그 특징과 독특성을 추적해 볼 것이다. 그리고 개혁신앙이 한국 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이끌어 갈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해외여행을 나가면 한국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어떤 분이 성지순례 페키지 여행을 하며 새벽에 시내산에 올라 일출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다른 단체 여행객들이 정상에 모여 찬송을 부르며 산이 떠나갈 듯 ‘주여’를 외치며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하고 있어 민망했다는 말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있었던 일이란 점에서 비난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모습은 한국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기도하면 통성기도다. 분위기가 시원찮으면 ‘주여! 주여! 주여!’하고 외치고 천정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기도한다. 필요하면 금식기도도 하고 깊숙한 산에 들어가 나무뿌리가 뽑힐 정도로 씨름을 하며 기도하기도 한다. 통성으로 기도하면 남이 기도하는 소리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한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이 이렇게 기도하는데 익숙해 져 있다는 사실이다.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면 뭔가 찝찝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조용히 기도하면 뭔가 열심이 없어 보이고 허전한 생각이 든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정서는 한국 개신교 안에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공통된 모습이다. 대단한 열정이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열정적인 새벽기도는 세계 교회가 놀라워한다. 수많은 외국 개신교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의례히 방문하는 곳 중의 하나가 명성교회이다. 명성교회에는 매일 5만 명의 성도들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한다. 그 중 9천 명은 주일학교 학생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곤한 잠에 빠져 있을 이른 새벽에 매일 모여 기도하는 모습은 분명 한국적인 신앙의 색깔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수요일에도 모여 수요 기도회를 하고 금요일 늦은 밤에는 밤을 새며 기도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본 외국 성도들은 한국 성도들의 열심에 혀를 내두른다.
한국 개신교인들이 전도할 때 보여주는 열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철이나, 버스, 그리고 역이나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하는 분들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도 불쾌한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열심과 열정을 생각하면 그렇게 용기 있게 전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존경하는 마음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 성도들의 현 주소이다. 분당 샘물교회의 아프카니스탄 피납 사건 이 후 교회 앞에서 대모를 하는 ‘반기독교연합회’는 “노상방료 금지, 노상전도 금지”라고 쓰고 피켓 시위를 하고 텔레비전에서 한국 개신교를 상식 이하라고 비난을 하지만 그 전도의 열정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는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열정도 이러한 한국 교회의 열정적인 신앙의 양태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언젠가 한국 교회에 ‘큐티’(Quit Time)가 유행처럼 번지더니 이제는 일반화 되었다. 성경을 매일 정
해진 분량만큼 읽고 묵상하고 적용한다. 전통적으로 행해오던 새벽기도를 위협한다고 생각한 목회자와 장로와 권사들은 큐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큐티는 성경 텍스트(Text)의 해석보다는 현 상황(Context)에 적용하는데 강조점을 두기 때문에 성경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지만 말씀을 살아가는 데 적용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된다. 교리적 바탕이 약한 한국 성도들에게는 큐티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약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 교회의 일상화된 자연스런 모습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독특한 모습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것을 진단해 보자.
1. 복음주의 영향
한국 교회의 특색은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의 영향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이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대부분(캐나다 선교사를 제외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오류 없는 말씀으로 믿었다. 일본에 온 많은 선교사들은 훨씬 더 자유주의자들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다. 이들은 대부분 세계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이 동의하는 아홉 가지 기본 교리에 동의한다. 이 교리는 1846년에 영국 성공회 안에 속해 있던 복음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을 만들고 작성한 것이다.
1. 성경의 영감과 권위와 충족성. 2. 성경의 개인적인 해석의 권리. 3.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4.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 본성의 전적 부패.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보혜사로서 사역과 통치. 6. 이신칭의. 7. 회개와 죄인의 성화를 위한 성령의 사역. 8. 영혼불멸, 육체의 부활, 의인에게는 영원한 복과 악인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 9. 직분과 의무와 세례와 성만찬 제도의 신적인 기원
캐나다 YMCA에서 1888년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은 바로 이 ‘복음주의 연맹의 교리적 기초’(The Doctrinal Basis of the Evangelical Alliance)에 서명했었다. 이 복음주의 연맹은 모든 교파를 초월하는 신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에 온 다른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이와 같은 영향 아래 있었고 신학적으로 여러 교회들의 신학들이 혼합된 형태였다. 미국과 캐나다의 장로교는 이미 미국의 대 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복음주의적 색체가 짙었다.
선교초기 선교사들의 복음주의 경향은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되어 남아 있다. 복음주의는 ‘복음주의 연맹의 교리적 기초’가 보여주는 것처럼 큰 몇 가지 점에서는 일치된 관점을 보인다. 한국에 전파된 교회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복음주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일 수 있다. 모든 한국 교회인 순복음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를 통합하는 교집합이 있다면 그것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월간지인 [빛과 소금]과 [목회와 신학] 같은 것이 복음주의적 기독교 문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2. 웨스트민스터 표준 신앙고백과 대ㆍ소교리문답의 영향 미약
한국에 온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ㆍ소교리문답에 동의했다. 1907년 세워진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한다. 평양 신학교 초대 교장이었고 1924년까지 교수로 사역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 선교사는 개혁신앙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1905년에서 1910년까지 있었던 한국 교회 연합 운동에 그렇게 열심이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교회 연합 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장로교 신학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윌리엄 블레어(William N. Blair) 선교사는 회고한다. 그렇지만 신학교에서 신앙고백을 가르쳤지만 학생들에게 칼빈주의적인 신앙이 전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들은 감리교ㆍ침례교 선교사들과 연합하기 원했다. 결국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한국 교회는 여러 교파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하는데 낯설지는 않았다. 특별히 성경공회, 출판, 교육, 의료, 주일학교와 교회협의회 영역에서 연합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모습은 개신교 각 교단들이 각각 한국 교회사의 발전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교회의 차이를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 것은 각 교단마다 특색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의 예를 들면 더 분명해 진다. 한국 장로교는 각 교단마다 시기는 다르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ㆍ소교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정식 채택한다. 그렇지만 개 교회 현장에서 그것을 신앙고백으로 소중히 여기고 가르치지 않는다. 신앙고백은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하다. 우선 목사들이 신앙고백과 대ㆍ소교리문답을 잘 모르고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교인들은 그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인지도 모르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현 주소이다. 한국 교회가 복음주의적이라는 단적이 예이다. 개혁교회가 매 주 오후 예배 시간에 교리문답 설교를 통해 교리 설교를 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렇다 보니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그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는다. 그 교회의 목사가 어떠하냐, 로 교회를 결정한다. 교인들이 교회를 쇼핑하듯 선택하는데 그 기준이 신앙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한 교단 안에 있어도 개 교회마다 가르치는 신학과 신앙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신앙고백이 유명무실하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단과 교회를 넘나드는 교인들의 철새 이동 같은 교회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3. 세대주의의 영향
세대주의의 가장 특징은 전천년설을 믿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천년왕국 이전에 재림한다는 신학이다. 영국인 다비(John N. Darby: 1800-1882)가 주장한 세대주의는 19세기 말엽 미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로교 여자 선교사 가운데 스왈론(Swallen)은 1894년에 기록하기를 전 한국에 대한 장로교 선교는 전천년설에 기초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와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는 후천년설을 가르치고 있었다. 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렇지만 한국에 온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이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천년설을 믿는 선교사들의 선교 방향은 복음이 사회와 문화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가기보다는 세상에 대해 염세적이었다. 19세기 말엽에 미국을 휩쓸었던 무디(D. L. Moody: 1837-1899)의 세계관이 선교사들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디는 세상을 부서져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배에 비유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선교사로서 생명보트를 주셔서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믿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에 사회를 개혁시키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제임스 게일과 호레이스 언더우드(H. Underwood) 선교사는 세대주의자들의 성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 ‘스코필드 해설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몇 년 동안 번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일 자신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전천년설적인 분위기는 복음전도에 대한 대단한 동력을 불어 넣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건강한 교회 건설과 사회 각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관심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반 율법주의적(antinomian)인 모습을 보였고 은혜와 율법을 분명하게 분리했다. 십계명에 대한 관심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당시 유럽 대륙 네덜란드에서는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 Bavinck)가 사회에서 기독교적인 정치와 기독교 학교와 기독교 사회와 기독교 문화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전혀 다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ㆍ소교리문답을 표준 신앙으로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관점의 분위기 가운데 칼빈주의적인 요소는 부족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 한국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한국 교회는 성장했다.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1위권으로 발전했다.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전천년적인 설교를 하지 않는다. 20-30년 전만 해도 부흥사경회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세 설교를 많이 했지만, 요즈음은 그렇지 않다. 설교의 내용은 가벼워지고 세상사는 얘기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의 관심 분야가 말세가 아니라, 구원받고 세상에서 복 받고 누리는 현세적인 내용으로 대체되었다. 세상 외적인 어려움과 고통이 많이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혔던 시대와 동족상잔의 비극과 빈곤의 악순환의 시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한국 교회가 어쩌면 예수님의 재림이 복지국가를 완성하고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교회는 후천년설적인 신앙으로 탈바꿈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까?
4. 부흥운동
1) 미국의 부흥운동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들의 가장 큰 동인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흥의 필요성에 대한 갈망이었다. 미국에서는 제1차 대각성운동이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 1703-1758)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19세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부흥운동 가운데 칼빈주의는 점점 그 영역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감리교와 침례교는 부흥운동의 결과로 엄청난 성장을 했다. 물론 이러한 부흥운동의 영향은 장로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북장로교에서는 부흥운동을 지지하는 ‘신학파’(New School)과 19세기 부흥운동의 경향에 반대하는 ‘구학파(Old School)간의 논쟁이 치열했다. 남북전쟁 이 후 1869년에는 부흥운동이 광란적이지 않으면 허용하는 쪽으로 결정을 한다. 장로교 인이었다가 나중에 회중 교인이 된 찰스 피니(C. Finney: 1792-1875)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러한 미국 부흥운동의 모양은 너무나 다양해 기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대체로 대중 집회를 통하여 회개하는 자들을 만들어 내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정직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이러한 것은 특별하고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되어야 했다. 은혜를 받는 형식은 극적인 감정의 고조 가운데 일어나며 한 없이 흐르는 눈물과 신비한 환상과 가슴을 치는 통곡이 이어진다. 부흥사가 요구할 때 선교사와 전도자로 헌신한 자들이 손을 들고 그 자리에 서거나 앞으로 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다. 부흥사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목소리가 보통과 달라야 했고, 드라마틱하고, 소리를 치며, 울며, 박수를 치도록 하는 것이 청중을 압도하기 위해서이다. 부흥 자체를 위해 기도했고,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거나 눈물과 회개를 요구했다. 감리교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성화’로 표현하고 장로교에서는 ‘더 높은 삶의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권장했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 교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것은 미국 교회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2) 부흥 운동의 영향
그러면 부흥 운동이 미친 영향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번째, 부흥운동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복음찬송(gospel song)이다. 미국 부흥운동의 영향은 찬송가에서 나타난다. 본래 장로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시편을 찬송했지만, 미국에서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복음찬송을 부르게 되었다. 복음찬송에는 알미니안적(arminian)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데 감리교의 영향이 크다. 특히 무디와 함께 동행 했던 생키의 노래는 부흥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장로교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복음찬송은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고 이들이 한국에까지 와서 전해 준 것이다.
두 번째, 목사들의 자질이 떨어진 점이다. 부흥 운동은 수많은 젊은 헌신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신학적으로 준비되지 못했다. 헌신된 이들을 빨리 교육하는 기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경학교’(Bible Institute)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간단한 성경 공부와 부흥을 갈구하는 교육을 받고 선교사나 복음 전도자로 일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훌륭한 신학교가 있었지만 이러한 부흥운동은 질이 좀 낮은 사역자들도 선교사나 전도자 혹은 목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세 번째, 교회의 중요성이 희미해 졌다. 부흥운동은 고백적인 교회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왜냐하면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보다 ‘중생했느냐’ 혹은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부흥을 주시기 때문에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교회와 사회 보다 개인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교회에서 행하는 유아세례나 성찬은 케케묵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 1907년 평양 대 부흥
선교사들의 마음에 담고 들어온 세계 부흥운동의 영향은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갈구하게 되었고, 성령세례를 받고, 공적으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경험하게 되면서 한국 대 부흥이 시작된다. 이것은 1903년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선교가 실패하고 있음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선교사 모임에서 고백했는데 그 때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다. 1904년에는 감리교 사경회에서 다른 선교사들이 똑 같은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은 다양한 다른 모임에서도 일어났다. 1906년 8월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하디(Hardie) 선교사의 성령 충만의 간증을 들었다. 이즈음 미국과 인도와 웨일즈에는 소위 성령세례를 매우 강조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오순절운동을 통해 그것이 시작되었고 웨일즈에서는 10만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으며, 인도에서는 미국과 웨일즈의 소식을 들은 선교사들 사이에 소위 성령세례를 경험한다. 그 후 장로교 선교사들이 다시 서울에서 연례 모임을 가졌는데 이 때 뉴욕에서 한국을 방문한 존슨(H. A. Johnson) 목사가 인디아와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얘기한다. 나중에 그는 평양을 방문해서 똑 같은 얘기를 전한다. 한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세계적인 부흥의 불길이 한국에도 있기를 기대했다. 1906년 가을에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부흥을 위한 특별 집회를 계속했다. 1906년 12월 26일에 장로교 선교사들이 평양에 모여 성령의 능력을 간구했다. 이러한 복은 회개의 고백 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서로서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1907년 1월에 열린 장로교 연례 사경회에서 성령의 부흥이 일어난다. 하디 선교사와 미국과 인도와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성령이 충만했다고 한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부른다. 몇 명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위하여 청중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머리를 마룻바닥에 쾅쾅 박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 8시에 시작된 집회는 새벽 5시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 부흥운동은 전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러한 1907년 평양 대 부흥은 한국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교회는 기도를 하면 언제나 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지 아니든가 참된 기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성도들의 감정적인 예배가 한국인의 독특한 감성적 특징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평양 대 부흥의 영향은 미국 선교사들의 설교와 교육과 모범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쨌든 평양 대 부흥이 한국 교회에 가져다 준 영향은 대단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개혁신앙이 약화된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비록 개혁 신앙고백을 한국 장로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유명무실한 것이 현실이다.
한국 교회는 2007년인 지금 100년 전에 일어났던 대 부흥을 꿈꾸고 있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개신교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부흥만이 살 길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도 부흥을 바라며 하고 있는 것들이 새벽기도, 큰 소리와 가슴을 치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범 교회적 대형 연합 행사에서 드러난다. 한국 교회는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과 열심이 있다. 그렇지만 감정이 신앙의 시금석이 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의 열매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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