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미련한 방법이 좋다: 노방전도의 효용성?
전도하면 떠오르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얼마 전 필자가 강남역 근처를 걷다가 두 사람이 전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사람은 마이크로 뭔가 소리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학원이나 기타 유흥업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판촉 행위를 할 때와 비슷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는 것 같지 않았고 전도지를 받아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나라도 전도지를 받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분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전도자는 필자에게 전도지를 건네주지 않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사람들 앞에 전도지를 내밀었다가 거두는 동작을 하고 있었고 필자도 여느 사람처럼 전도지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전도지를 든 손을 내밀었다가 빨리 거두어 버린 것이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 전도자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도 않았고 다만 자신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에 빠져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가끔 큰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본다. 지하철역이나 시장, 번화가에서 주변 사람들을 향해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당당하게 소리치는 사람들은 과연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노방전도의 효용성은 과연 있는가?
이렇게 전도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좀 미련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열심에 주눅이 들고 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저런 열심이 없는데......’ 더구나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전도는 너무 고상하게 해서는 안 돼! 성경에도 전도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하라고 돼 있어.’라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성경 구절 때문에 우리는 전도는 미련하고 무식하게 해도 된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에 대한 오해
정말 전도는 미련하게 해도 되는가? 고린도전서 1장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의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원어를 살펴보면 그 답이 있다.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한글 개역개정 성경과는 사뭇 다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성경에서 ‘전도’라고 번역한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일단 ‘전도’는 ‘도를 전하다’의 명사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지를 나눠주거나 복음을 들려주는 것 혹은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 책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 등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사용한 단어 ‘케리그마’(kerygma)는 ‘설교’ 혹은 ‘선포’라는 단어이다. 즉 ‘케리그마’는 전도 방법 중 하나인 설교나 선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방법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설교’와 ‘선포’가 미련한 방법이라고 하셨다. 왜 미련한 방법일까? 이 표현은 설교의 방법이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도를 전할 때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한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거나 설교하는 방법으로는 감동도 없고 설득도 쉽지 않다. 이 방법은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고 그래서 교회는 도를 전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다. 사람이 보기에 지혜로운 방법 말이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기 위해 교회는 시대마다 다른 효과 있어 보이는 여러 방법들을 고안했고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교회는 그런 방법을 찾고 있고 이런 방법을 알려주는 수많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인지 선택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 설교의 본 뜻!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잘 읽어보면 ‘설교’와 ‘선포’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알 수 있다. 단지 우리와 교회가 그 방법을 신뢰하지 않을 뿐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사도들에게 맡기셨다. 사도들은 그 진리의 말씀을 잘 보존해 교회의 직분자에게 맡겼다.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이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를 구원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셨나? 그것은 ‘설교’의 미련한 방법이었다.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교하네!’ 혹은 ‘설교하지 마!’라는 말은 ‘설교’라는 단어 속에 얼마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담겨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또 이 말 속에는 말하는 사람이 손수 실천하지 않고 말만 앞세운다는 뜻도 들어 있을 것이다. 목사 자신도 이런 표현의 영향을 받아 ‘설교’가 일방적인 ‘선포’가 되지 않도록 애를 많이 쓴다. 설교 가운데 청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함께 읽기도 하고,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연극을 하기도 한다. ‘설교’ 곧 ‘선포’라는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설교가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의 종인 목사를 통해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개념이 없어진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부터인가 목사도 교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은혜 받은 것을 나눈다는 의미가 강조되어 왔던 것 같다.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설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는 사라진다. 설교를 통해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QT 쉐어링(sharing) 정도로 격하시켰음을 보게 된다. 설교자 스스로가 말씀을 선포한다는 영적인 자신감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설교(선포)의 미련한 방법’을 주셨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3-25절을 보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게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여기서 ‘전하는 것’은 바로 ‘설교(선포)’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설교가 경홀히 여김을 받는 때도 없을 것이다.
설교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는 수많은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전도 프로그램 주창자들이 하는 공통된 말이 있다. 그것은 ‘설교로는 안 된다’이다. 어떤 전도 방법의 효용성과 유용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교를 통한 전도를 평가절하한 말이다. 서울의 유력한 한 교회의 목사님도 어떤 프로그램을 몇 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해 소위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그가 가르친 것이 바로 ‘설교로는 안 된다’였다.
이런 주장들이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있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 곧 십자가에 점철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강단에서 정확하게 선포되지 않고 온갖 세상 신변잡기들로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설교가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부담은 설교를 하나님의 뜻(사랑과 공의)의 선포가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설교가 시원찮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설교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길 기뻐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사람들이 고안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교회 교인의 숫자가 증가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은 설교와 선포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회복해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좋은 전도의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설교’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가장 오래 애용되었고, 지금도 통하는 방법이며, 주님 오실 때까지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교회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쇠퇴해 갈 때 취해야 할 방법은 무엇인가? 교회의 무능력과 침체의 문제는 참된 복음 설교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할 일은 외부사람을 끌어 들이기 위해 ‘전도 특공대’를 조직하는 것보다 말씀을 선포하고 선포된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 우선이다. 교회가 바르게 회복될 때 가장 왕성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나 부흥기의 교회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설교)를 듣고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각성할 때 부흥이 일어났다. 바울이 초대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해야 했다. 그리고 성도는 그 복음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바울은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바울이 강조한 것은 교회가 교회답게 바로 서고 성도가 성도답게 바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기초가 없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만 전하려고 하는 전도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기독교 혹은 교회라는 세력을 넓히는 데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소금이 맛을 잃어 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이 없는 전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히려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우선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선포해야 한다.
성례를 회복해야!
하나님의 복음, 곧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방법은 성례를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 있다. 이 두 가지는 교회에서 제사 드리는 것 같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이 시간은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이다. 성례를 행함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성례는 우리가 만든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해 주신 방법이다. 우리는 이 성례를 행함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성찬에 대해 바울이 가르친 말씀을 보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찬을 행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자가 성찬에 참여하며 복음을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듣는다. 불신자는 성찬을 보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복음을 보고 듣는다.
교회는 의식으로 전락해 버린 성례를 회복해야 한다. 성례는 빨리 끝내 버려야 할 부담스런 행사가 아니다. 성례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동원해 멋지고 그럴 듯하게 기획해 지겹지 않게 만들어야 할 잔치도 아니다. 성례는 예수님이 정해 주신 것이기에 언약의 하나님과 그 사역을 잘 드러내도록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에 머물러 버린다면 핵심인 복음은 선포되지 못할 것이다.
권징을 회복해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권면과 징계라는 방법(마 16:19; 18:17-18; 고후2:6-8)도 주셨다. 오늘날 교회에 권(면)징(계)이 사라지면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권징은 하나님의 사랑의 매로서 죄를 범해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권징은 권징을 집행하는 자나 권징을 당하는 자나 피차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방법이다.
또 한편 권징은 교회의 성도가 죄를 범해 누룩처럼 거룩한 교회에 누룩처럼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의미도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것도 권징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 성도들이 사회에서 죄를 범해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럽힘을 당하게 되니 복음 선포를 통한 영혼구원에는 나쁜 영향이 있음을 당연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마당에 권징을 행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방법이 교회를 부흥시키기는커녕 어렵게 만들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은 인간보다 지혜롭다. 믿음으로 권징을 잘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살 길이며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나가며
복음 전도는 ‘사람의 일’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이 하는 전도이지만,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자칫 인본주의적 사고방식과 방법론이 지배하면서 이 부분이 헷갈린다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당신의 방법을 사용해 부르신다. 그 방법으로 교회의 ‘설교’와 ‘성례’와 ‘권징’이 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설교’가 미련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선포하신다. 신자는 그 말씀을 받아 성숙해 가며 불신자는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어 거듭난다.
임경근목사
코람데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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