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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이란(호라티우스 보나르)

호라티우스 보나르

by 김경호 진실 2011. 12. 2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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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이란(호라티우스 보나르)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백성을 죄악된 세상에서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그들을 어떤 피조물 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여 그들과 가장 친밀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도 바로 이로한 목적때문입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그리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전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능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연합으로 인하여 기준의 피조세계의 질서가 완전히 와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친밀하고도 고귀한 동질의 연합이 형성된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셨으며 우리는 그분을 형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인성을 입으시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되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뼈를 나누는 몸의 한지체가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친밀감은 곧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되고 하나님의 본래 목적이 성취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우리는 만물의 으뜸가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부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핵심층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함"(엡 1:23)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지체의 한 부분으로서 천사보다 더 가까이 그분의 보좌 곁으로 다가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 그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한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특히 '가족'이라는 이름을 기뻐하십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여러가지 이름을 가집니다. 즉 우리는 그분의 선민이요 백성이며 그분의 양떼이자 기업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가장 즐겨 사용하시는 호칭은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신의 장자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자녀로 대하시며 사랑으로 품으시고 기뻐하시며 바라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 대하여 더욱 세밀히 살펴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도 원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고 지금까지도 본질적은 면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선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기원이자 그들에게 부여된 최상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함을 입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가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써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로 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그분의 이름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인함입니다.
그분은 실제로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그들을 위해 나타내신바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며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고 장차 회복될 세상을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들은 영원 전에 확실히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늘의 왕족에 속한 자들로서 그들의 혈통은 만왕의 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하기에 지금은 비록 비천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장차 지금껏 듣고 본 그 어떤 것보다 영광스럽고 빛난 미래를 맞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그러나 이와 같이 구원받은 가족에 대한 영광으로 가득한 묘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단순조건'은 더욱 심도 있는 주의를 요합니다. 가장을 이루거나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외형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랑의 맥박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부요나 빈곤은 가정이라고 하는 '하나로 결속된 마음'이 지닌 본질적인 특성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이나 햇볕도 이들의 끈끈한 유대를 끊지 못하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관계를 결코 막지 못합니다.
곤고한 날이나 시련의 비바람 역시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으며 설사 갈라놓을지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그 결속이 한층 친밀해질 뿐입니다.
구속함의 받은 자들의 가족은 이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것은 외적환경이나 장래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심오한 어떤 것입니다.
즉 그것은 위에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품에서 내려와 모든 지체 가운데서 고동치고 있는 천상의 맥박이며 그들을 오늘날과 같은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는 직접적인 동인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도 신성한 단어로 통합니다. 이 단어 속에는 극도로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성스러운 분위기가 담겨있습니다.
한 세속시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험악한 저주에 누군들 견딜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어머니 살아 숨쉬는 가장 신성한 존재"
물론 이 구절에 담긴 정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본문에 사용된 어휘는 지나치게 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세상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유대를 얼마나 끈끈하고도 신성한 것으로 느끼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구절에는 상당한 진리가 담겨있거나 적어도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그 어떤 집단도 가정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모든 애정이 교차되며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장소이자 그들을 하나로 녹여내는 자유와 기쁨의 도가니 입니다.

가족이라는 단어 외에 금광처럼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여러 가지 소중한 기억이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연상들을 모두 담고 있는 단어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가정은 인간존재의 중심 즉 마음의 가장 깊은 좌소에 호소합니다. 이 한 단어 속에는 달콤하고 부드럽고 온유하며 진실한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일회적인 상호관계나 유대가 아니라 가족 간의 다양한 상호작용이나 결속과 연결됩니다. 함께했던 주거 공간 난롯가 식탁 그들의 습관과 음성 기념이 될 만한 추억 친밀한 언사와 노래 기쁨과 슬픔 등의 온갖 추억이 한 단어 속에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없는 세상은 마치 앙상한 뼈만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공동묘지와 같을 것이며 인간은 수많은 모래 알갱이나 기껏해야 바람에 찢겨 휘날리는 꽃잎조각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한 단어 속에는 인간관계의 모든 아름다움과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에 나타나는 모든 부드러움 사람들 사이의 교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친밀함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의 감정에서부터 겉으로 드러난 감정에 이르기까지 심리적 흐름에 나타나는 사랑스럽고도 소중한 모든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긴밀한 유대감과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랑 끝없는 연민과 자비 시련과 위기를 헤쳐 나가는 인내와 같은 것들을 이 땅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외에 달리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부부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자식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자매간의 사랑은 모두 가족에 관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 가정으로 흘러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분출되는 수많은 감정의 흐름은 이 땅을 더욱 풍요롭고도 즐겁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어가 교회를 일컫는 고유한 명칭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아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불리는 선민 가운데서 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바로 교회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교회 중에서 거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엄격하며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로서 자녀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그들을 돌보고 사랑과 지혜로 모든 집안일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 그분의 마음이 특별히 머무시는 곳이 바로 그분의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다른 피조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여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그분의 마음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충만함으로 가득합니다.

햇빛이 무지개의 일곱 빛깔로 나타나듯이 애정이나 사랑이 다양한 빛으로 분산되어 퍼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감추어진 온갖 아름다운 색상이 풍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강도나 다양성에 있어서 풍성 하고도 온전하게 드러나는 유일한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그리고 성도 상호간에는 마치 새로운 사랑의 힘과 사랑할 대상이 주어진 것처럼 풍성한 사랑의 공간이 있습니다.물론 이 이름 외에도 성도를 지칭하는 이름은 많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름이 의도하는 바를 온전히 함축하고 있는 이름은 또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를 종종 자신의 '양떼'라고 부르십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며 우리는 의지할 데 없는 무력한 자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포도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됨과 함께 원줄기로부터 양분이 쉬지 않고 공급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전'이라는 이름은 구조적인 조화 설계의 균형 형식의 아름다움 그리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곳으로서 그에게 예배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몸'은 공동체내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지체간의 신비적 연합과 생명체 의식, 그리고 친밀한 결속력과 상호간의 유기적인 조화의 협력관계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읍'은 시민으로서의 특권과 권리 질서 있는 통치가 시행되는 행복한 공동체를 보여주며 안전과 평안과 풍성함을 누리는 가운데서 이웃 간에 즐거운 교제를 나누며 사랑으로 봉사하는 아름답고도 평온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나라'라는 이름은 성도가 기업으로 받은 것들 왕권과 영광과 통치 그들의 고귀한 신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러한 이름들이 다양하고도 풍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들은 각각의 이름에 나타나는 외형적 특성에만 초점을 맞춘 단편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내적영역 즉 영적존재의 본질적인 면은 함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사랑하사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시고

그 사랑이 더욱 풍성히 차고 넘쳐서 바깥세상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답고 온화하며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가족'이라는 신비스러운 이름뿐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가족과 관련하여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말씀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요17:12)
이것이야말로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입니다. 그분에게 가족구성원 모두의 이름과 얼굴은 결코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수 없을 만큼 그립고도 친숙합니다.
어느 누구도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 자신뿐입니다.
지인이나 이웃이 방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결코 아쉽거나 그리운 대상이 아니면 그들의 자리는 쉽게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명이라도 빠지면 그 빈공간은 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일 죽음이 형제나 자매나 부모를 데려간다면 누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시든 꽃은 새로 피어난 신선하고도 향기로운 꽃으로 인해 잊혀집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꽃이 시들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가 죽으면 그곳은 영원히 공백으로 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자신의 가족을 둘러보시면서 친숙한 얼굴들을 향해 하나라도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셨을 때 반드시 이런 뜻에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그분은 마치 아버지께서 주신 자 가운데 하나보다 더 아끼는 것은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심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가지고 계신 관심이 얼마나 깊은 자는 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로 개인적이고도 특별한 애정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혹시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림으로써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까? 이것은 자칫 간과하기 쉬운 것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막연히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 감정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장자와 막내에 대한 사랑이 다르며 각자의 특성과 형편과 사정에 따라 요구되는 사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순간마다 세심하고도 특별한 사랑이 요구되며 그것이 채워질 때 사랑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만일 그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의 한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며 마땅히 우리에게 속한 모든 권리를 누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본질을 깨달을 때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독차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형제나 자매도 역사 동일한 사랑을 누리고 있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족은 마치 창공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소유물인 동시에 각자가 그 전체를 온전히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오직 온 마음이 나에게만 있는 것처럼 그분의 사랑은 특별하고도 개인적이며 독특합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돌볼 사람이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오직 나만 주시하시면서 세심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개인적 사랑과 집요한 보호하심의 특별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사랑을 덜 받거나 소외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확신합니다.
또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빛이요 영원한 영광임을 압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구속함을 받은 행복한 가족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특히 시련의 날에 그분이 각자에게 베푸시는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사랑을 누리는 것만큼 행복한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히 누리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때로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분깃으로 주어진 개인적인 사랑을 인식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복된 일입니다.

아가서에 언급된 신부의 고백에는 바로 이러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아 6:3)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처음으로 열어 복은이 들려주시는 사랑의 메시지를 들려 주실 때에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찾아 그분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처음으로 받아 그것이 선포하는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아버지의 풍성한 식탁을 맛보고 그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된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라는 말씀대로 그분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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