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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그 권능(호라티우스 보나르)

호라티우스 보나르

by 김경호 진실 2012. 1. 1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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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그 권능(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전에, 나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필히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 사실을 아는가? 그리고 그 사실을 앎으로 내가 누구에게 속한 자이며 누구를 섬기는 자인가를 아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름에 대한 나의 자격은 여전히 미심쩍으며, 여전히 심사숙고하여 음미해야 할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로 살고자 한다면, 나는 필히 아들이어야 하며, 필히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삶은 인위적인 모조품과 메마른 기계장치가 될 것이며, 어떤 뛰어난 활동을 한다 할지라도, 생기 넘치는 열렬함과 힘이 부족할 것이다. 이 점에서 많은 이들이 실패를 한다. 그들은 아들됨이 단 번에 얻는 하나님의 단순한 계획임을 잊은 채, 스스로 아들이 되기 위하여 아들과 같이 살려고 애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믿음은 믿으려고 애쓰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회개는 회개하려고 애쓰는 것에 불과하며, 회개하는데 있어서, 단지 다른 이들로부터 배운 단어들을 사용할 뿐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작용하는 거룩의 사랑이 아니다. 거룩의 사랑을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채우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진리의 사랑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뿐이다. 혹자에게 그것은 진리의 사랑의 감상적인 일면일 뿐이다. 혹자에게는 논리적인 일면일 뿐이다. 혹자에게는 전통적인 일면일 뿐이다. 혹자에게는 회화적이며, 혹자에게는 시적이며, 혹자에게는 아름다운 일면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말한 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받지 못함이라"라고 한 실패가 아닌가(살후 2:10)?

그렇다. 이것은 사도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강한 미혹"과 "거짓말을 믿는 것"과 일치한다(살후 2:11). 이것은 흔히 "물 없는 샘"과 "폭풍에 밀려다니는 구름"과 "두 번 죽은 나무들"과 "칠흑 같은 어두움이 영원히 예비되어 있는 떠돌아다니는 별"을 구성하는 사람들과 물질들로부터 나온다(벧후 2:17; 유다13).
그리스도인에 관한 하나님의 설명은 분명하고 명확하다. 모호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관해 어떻게 실수가 발생할 수 있으며, 모호하고 거짓된 주장이 그같이 많이 제기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은혜로우심을 맛 본" 자이며(벧전 2:3), "다시 태어나...생기 넘치는 소망에 이르게" 된 자이며(벧전 1:3),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이며(엡 2:5),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이며(히 3:14),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 자"이며, "악한 현 세상에서" 건져진 바 된 자이다(갈 1: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십자가로 가는 길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안티오크인의 명칭인 "그리스도인"과 사도의 명칭인 "성도"를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 값없이 죄사함을 받기 전에는 그는 자신의 선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는 생명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사랑스러운 것과, 신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기에 합당한 것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자신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며"(요일 4:16), 믿는 가운데 단지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거룩한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였다.
과연 나는 십자가로 가는 길을 발견하였는가? 그렇다면 나는 안전하다. 나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다. 그 십자가를 처음 실제로 접할 때 영원한 복을 보장받았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으며, 그 누구도 거기서 나를 끌어낼 수 없다(요 10:28).

십자가는 나를 완전케 한다. 십자가는 일시에 나를 완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역사한다. 십자가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는 완전하지 않았으며, 이끄는 중심이 없이, 상(傷)하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십자가는 그 중심을 형성하여, 무질서하게 널려진 파편과 같은 우리들을 함께 이끌어서,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며"(시 86:11),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지 못하는 대상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완전함이나 하나됨(unity)을 낳는다. 이러한 완전함이나 하나됨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대규모로 만들어지지만, 동일한 중력 중심을 갖는다.

십자가는 영적 건강의 근원이다. 가벼운 것이든 치명적인 것이든, 십자가로부터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효능(virtue)"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으며"(사 53:5), 그분 안에서 치유하는 잎을 가진 "생명나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계 22:2). 골고다는 숙련된 의사와 상처에 바르는 유향이 있는 길르앗이 되었다(렘 8:22; 사 53:5).
고대의 라티머는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 여인에 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그분을 만지자마자 건강하게 해 주실 치유자라고 믿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지만"(사 1:5), 그러나 이제 질병은 사라졌고, 연약한 마음에 활기가 다시 찾아왔다. 바라 봄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바라본 대상이 구원을 이루었다(사 45:22).

놋뱀은 이 땅의 어떠한 약으로도 완치시킬 수 없는 것을 이루었다. "너를 치유할 약이 네게 없도다(렘 30:13). 왜냐하면 위대한 치유자의 말씀이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라고 하시기 때문이다(렘 33:6).
우리의 치유는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평안과 진리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치유는 한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치유가 시작되어, 마침내 완전히 치유된다. 새로운 건강의 맥박이 우리의 모든 혈관에 뛰기 시작한다. 우리의 온 존재는 신성한 약의 효능을 깨닫고 우리의 질병은 항복을 한다.
그렇다. 십자가는 치유한다. 십자가는 죄를 죽이고 거룩을 살리는 이중 효능(virtue)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모든 육신의 열매들을 시들게 하는 반면에,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인 성령의 열매를 품으며 익게 한다(갈 5:22). 십자가는 혼의 상처를 약간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철저히 치유한다.

십자가는 마치 먼 북쪽의 서리와 습기에 의해 침식당하는 구조물을 향해 남쪽 공기의 신선한 향기가 불 듯이 작용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기능에 새로운 기분과 에너지를 주고, 우리의 모든 의도에 새로운 성향과 목적을 주며, 우리의 모든 소망과 갈망에 새로운 고결함을 준다.

십자가는 자아에게 치명타를 주며,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지체들을 죽음으로 처리하며, 육신과 함께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리하여 처음과 같이, 매일, 계속하여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우리 혼의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알게 된다. 선(善)은 강화되고 원숙해지는 반면에 악(惡)은 지배력을 잃는다.
우리는 단지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갈 6:14), 십자가로부터 힘을 얻는다. 십자가는 약함의 장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약함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고후 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권능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나오듯이, 약함으로부터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한 가지를 위한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을 위한 힘이다.

십자가는 일 뿐만이 아니라 활동이나 인내나 거룩을 위한 힘이다. 거룩해 지고자 하는 자나 유용한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권능의 비결이며 승리의 보증이다.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는 싸워 이긴다. 어떠한 무기도 십자가에 대항하지 못하며 어떠한 대적도 이기지 못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가지고 내부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외부의 싸움에 대처한다. 십자가와 함께 우리는 선한 전쟁을 치르며, 정사들과 권능들과 대항하며, "견디어 내고(withstand)" "서 있는다(stand)"(엡 6:11-13).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다(딤후 4:7).

십자가 옆에 서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모방하는 자가 된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사람(롬 15:3), 자기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였듯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 대적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욕을 받되 되받아 욕하지 않는 사람, 고난을 당하되 위협하지 아니하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는 사람, 자신을 위하여 죽지 아니하는 사람, 기꺼이 "무명한" 자가 되고자 하며, 오직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당하며", 종의 지위와 이름을 취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치욕을 이집트에 있는 보화들보다 더 큰 부로 여기는"사람이 되고자 한다(히 11:26).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십자가 옆에 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의 의미를 깨닫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이 구절에서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것'과 '죄의 몸이 멸한 것'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 두드러지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결되어 있다.
다시 우리는 다른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구절은 한 사람의 바울이 (두 사람의 바울 또는 두 인격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 완전하게 동일시 된 것으로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에 달리고, 죽으며, 사는 이는 한 사람 바울이다!
이삭과 같이, 바울은 죽은 자들로부터 모형으로 받았고, 모리아 산에서의 사건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로부터 되돌려 받은 자로 여긴 것과 같이, 예호바께서는 이 바울을 부활한 사람으로 대하셨다! 이삭은 같은 이삭이었지만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같은 사람이지만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무엇인가를 통과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상태를 합법적으로 변화시켰고, 그의 성품을 도덕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새로운 자이다. 땅에서 난, 땅에 속한 자였던 첫 사람 아담 대신에, 그는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신 마지막 아담을 취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마치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결과, 바울은 이 땅에서의 남은 생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과의 연합을 견고히 붙들며 사는 것이다.
다시 성경을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 옆에 서서, 우리는 보증인(Surety)의 죽음을 깨달으며, 다음 구절들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골 2:20)

그분의 죽음과 (그분과 함께 죽은 당신의 죽음은) 이러한 것들과의 관계를 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이니라(즉, 그리스도께서 형벌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또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사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그리스도께는 지불할 두 번째 형벌이 없으시며, 치러야 할 두 번째 죽음이 없으시다),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 한 번 죽으심이요(그분의 죽으심은 죄를 짊어진 사역을 영 단 번에 성취하셨다), 그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진정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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