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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그리스도께서 끄지 않으실 심지에 속하는가?(리차드십스)

리차드 십스

by 김경호 진실 2012. 1. 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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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그리스도께서 끄지 않으실 심지에 속하는가?(리차드십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한 표지
꺼져 가는 심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표지 1.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거룩한 불이 조금은 있다.

첫째로, 만약 우리 안에 거룩한 불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고후 4:6)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리신 불이 틀림없습니다. 또 그 불은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여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그 불을 유지하는 일에도 은혜의 방편들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빛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빛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빛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빛에서 흘러 나오고, 두 가지 모두는 한 성령 하나님에게서 흘러 나옵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8:20)

천상의 진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천상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연인도 천상의 것을 보지만 그것을 이해할 만한 빛이 없기 때문에 열등한 빛에 의지하고 볼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심한 모든 사람들의 영혼의 눈에 빛을 주시고 그들이 계시되는 진리의 빛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영적인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표지 2.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사랑의 열기가 조금은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빛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열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해력에 빛이 비취면 정서 속에서는 사랑의 열기가 피어오르게 됩니다. 성화된 이해력이 어떤 사물의 진실함과 선함을 깨닫는 정도만큼 의지하는 그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빛이 약하면 갈망도 약해집니다. 반대로 빛이 강하면 갈망도 강해집니다. 아무리 미약한 영적인 빛이라고 해도 그것은 혈과 육의 강력한 반대에 저항하고 세속적인 모든 유혹들과 반대하는 장애물들을 꿰뚫어 볼 만한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주시하는 바 하늘에 속한 것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보다 훨씬 더 탁월한 것임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이지 않은 모든 빛은 성화시키는 은혜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작은 유혹에도 잘 쓰러지며, 특히 그 유혹이 개인적인 성향에 딱 들어맞을 때 더욱더 잘 쓰러집니다.

은혜는 영적 안목과 함께 미각을 바꾼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탁월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영적인 빛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쉽게 침륜에 빠지는 것이며, 반면에 아주 적은 양이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하늘에 속하는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견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영혼 속에서 빛이 차지하는 위치가 이렇게 중요한 까닭은 경건한 자들 속에는 영혼을 밝히시는 영과 함께 능력의 영(딤후 1:7)이 역사하여 마음을 계시된 진리에 굴복시키고 진리의 달콤함을 만끽할 수 있도록 의지 안에 맛과 풍미를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적인 의지는 영적인 진리들을 혐오하고 적대시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고 반항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진리들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영적인 안목이 열릴 뿐만 아니라 영적인 미각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사람의 미각도 바꾸어 놓습니다.

표지 3. 끄지 않으실 심지는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빛을 따른다.

셋째로, 점화된 하늘의 불을 올바른 길을 비춰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빛을 주시는 까닭은 우리에게 최선의 길을 보여 주시고 인생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일반적인 빛에 불과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식의 빛을 가지고 있으나 그 빛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이성과 명철(明哲)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사50:11).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자기 자신만은 특권을 강탈해 가고 자기를 대적하는 육적인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빛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등불을 켜 주셔야만 합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18:28).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켜 주신 불이 아니면 능력이 없으며 그 결과 우리는 슬픔 중에 누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빛이 조금만 있어도 종교를 버리지는 않는다.
미친 사람은 제 정신인 사람이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기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지 않은 불이 더 찬란하게 비취기도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지나치게 즐거워하는 것은 거짓된 빛에서 나오는 것이며 결국 악인의 빛은 꺼질 것입니다.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욥 18:6)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빛은 마치 번개와 같아서 홀연히 한 번만 번쩍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 그 사람들은 더 큰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 그 사람들은 더 큰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들은 빛이 반짝이면 그 빛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실체를 들추어내거나 자신들을 지도하려고 하면 그 빛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르신 것처럼 거룩한 빛이 조금만 있어도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종교를 버리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께서 끄지 않으실 심지에 속하는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한 규칙

규칙 1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보아야 한다.
우리는 두 가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불완전함을 보기 위한 눈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을 보기 위한 눈입니다.
아가서에서 교회는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아 1:5)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안에서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을 더욱더 악화시키는 쓴 뿌리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느때나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름의 어두운 면만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규칙 2 우리의 현재 감정은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현재 감정에 따라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유혹을 받을 때 우리가 우리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의심스러운 생각들의 연기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 속에도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숨은 불씨가 피어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철에도 나무 뿌리 속에는 생명이 숨어 있는 법입니다.

규칙 3 잘못된 추론을 주의하라
잘못된 추론을 주의하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불이 다른 사람들의 불처럼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는 전혀 불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잘못된 추론을 내려 우리 자신에 대해 거짓 증거함으로써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 합시다.
누가복음 15장 19절에서 탕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자기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 아니라,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으므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증거를 믿어서도 안 되며 참된 증거를 거부해서도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거짓된 증거를 믿거나 참된 증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불명예스럽게 하게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지켜 주며 우리를 낙심시키는 사단의 간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그런 증거의 도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잘못을 저질러 마치 자신들이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계12:10)인 마귀의 하수인인 것처럼 자기 자신들을 참소합니다.

규칙 4 은혜 언약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위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은혜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진실한 은혜이지 어떤 일정한 분량의 은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한줄기 불꽃도 활활 타오르는 불과 똑같은 불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불꽃에서도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포도만 맺혔어도 포도나무임을 알 수 있어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힘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배로운 믿음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으며 (벧후 1:1)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붙잡고 입는 것입니다. 연약한 손으로도 귀중한 보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무가 가시나무가 아니요, 포도나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몇 개의 포도알만 있으면 됩니다.

은혜 언약이 가장 자비롭고 온유한 이유
은혜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과 은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스스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기꺼이 열납하십니다.
" 그 여인의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레 12:9)

복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며 연약하고 결점 많은 우리의 순종을 모두 받아 주십니다.
그렇다면 복음이야말로 가장 자비롭고 온유한 언약이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은혜 언약 아래서 사랑과 자비의 방식으로 하늘 나라로 이끌어진 것입니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비교
우리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모세와 그리스도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안다면 훌륭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상한 갈대를 다 꺽어 버리고 꺼져 가는 (연기 피우는) 심지는 다 꺼버립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은 반드시 개인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한 순종이요, 그것도 완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죄요, 사망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극심한 저주의 위험 아래서 율법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율법은 잔혹한 노동 감독과 같아서, 옛날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은 많이 시키면서 짚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만, 율법을 준수할 만한 힘은 전혀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저주한 사람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가지고 찾아오시며 모세가 만들어 놓은 상처를 치료하는 향유를 가지고 오십니다.

은혜 언약에서는 전심, 곧 진실함이 완전함이다.
행위 언약이나 은혜 언약이나 둘 다 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것은 "너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라는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행위 언약에서는 이 명령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은혜 언약에서는 받은 바 은혜에 합당하게 진실한 노력만 기울인다면(요시아 왕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하였다"라고 할 때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완전하게 지켜지지 않아도 복음적인 관대함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두 언약의 혼동이 로마 가톨릭의 치명적인 약점
복음 안에서 율법은 달콤한 것으로 바뀌고 우리 속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게 됩니다(롬 7:22). 이 은혜 언약 아래서는 진실함이 곧 완전함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두 언약을 혼동한다는 것은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가톨릭은 두 언약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와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풀이 죽은 사람을 전혀 위로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는데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속하고 있던 감옥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는데도 그들은 감옥 안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규칙 5 작은 것 속에 위대한 생명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때때로 은혜가 너무 작아서 우리가 분간해 낼 수 없을 정도일 때도 있습니다. 때때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비밀스런 작업들을 행하시는데 우리가 한동안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때때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쓰디 쓴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지각하도록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에 빠진 영혼은 마치 풍랑 속에 빠진 것과 같아지고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며 풍랑이 거치지 않는 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진흙과 먼지밖에 없게 된다.

아무리 흐려도 낮은 밤보다 밝아
전혀 불가능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숨겨진 생명과 거의 꺼져 가는 불꽃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 있는 그 어떤 것을 분간해 낼 수 있습니다.

낮 시간의 날씨가 아무리 짙게 흐려 있다고 해도 그 시간이 밤이 아니고 낮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빛은 늘 존재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그리스도인됨을 의심할 만큼 어두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도 자신이 위선자가 아니요, 진실한 신자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무엇인가가 그 사람 안에 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은혜의 영역에서 완전한 어둠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영역이라고 해서 완전한 빛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둠의 왕국이 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느 정도의 빛의 광채가 은혜의 왕국에는 늘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표지 4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미약하지만 분별력이 있다.
넷째로, 이 불은 성질이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분해하며, 금과 찌끼를 분류하는 것처럼 사물들의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불은 영과 육을 나누고 자연에서 나온 것과 은혜에서 나온 것을 분별해 냅니다.

악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악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선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속에 선한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광석 속에서 금을 찾아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성령께서는 광석과도 같은 우리 안에서 금을 찾아 내실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의 마음은 마치 깜깜한 지하 감옥과도 같아서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고 오직 혼돈과 두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빛이 우리에게 비취면 우리는 하나님의 순결함과 우리 자신의 부정함을 더욱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결과 분별력을 얻게 되고 겸손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표지 5 끄지 않으실 심지는 하나님의 빛을 즐거워한다.

다섯째로, 사람이 영적일수록 그 사람은 이 빛을 즐거워하며 자신을 개혁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잘못된 것을 열심히 찾고 그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봉사가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진실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자신이 발견한 빛을 거스르고 행동하게 된다하더라도 그는 곧 뉘우칩니다. 이것이 빛이 그 사람 속에 자신의 협력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다윗이 나발을 죽이려고 계획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곧 지혜를 얻게 되고 모든 악한 길에서 자신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삼상 25:32)

반면에, 육적인 사람은 그 빛이 자기에게 갑자기 비추어질 때 그 빛이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입니다. 그는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성령께서 그 마음을 굴복시키기 전까지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빛을 거스르고 죄를 짓는 것뿐입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는 풀릴 수 없는 적대감이
육적인 사람의 마음은 빛을 아예 거부하거나 그것을 천한 육욕 아래 가두어 둡니다. 이를테면 땅 속에 파묻어 두는 것입니다. 또는 빛을 오용해서 육을 위한 심부름꾼이나 도구로 삼아버려 육욕을 채우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이유들을 찾는데 사용합니다.
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양의 빛을 오용하여 더 크고 더 고결하며 더 많은 양의 천상의 빛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 빛을 눈 먼 인도자로 삼아 결국은 전적인 어둠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육적인 사람들 속에는 이 빛이 의지할 만한 협력자가 없어서, 결국 영혼 안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요소만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사악한 평안을 말하고 싶어하지만 빛은 늘 그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격정 어린 증오감을 품고 그 빛을 노려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봄날의 태양이 사람들의 감정을 잔뜩 자극해 놓기만 하고 그것을 풀어 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화병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안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둑처럼 들키지 않고 죄를 짓고 싶어서 그 등불을 아예 꺼뜨려 버리는 사악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영적인 빛은 아주 분명하고 그것은 영적인 선을 알아보며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빛은 혼란스럽고 죄를 들추어 내지도 못합니다.
불의 크기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타오르는 곳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물질과 싸우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빛과 어둠 사이에 풀릴 수 없는 적대감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 영과 육 사이에도 적대감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불이 물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은혜는 죄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불은 반대되는 것과 결코 섞이는 법이 없으며 그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며 다른 원소들처럼 오염되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자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꾀를 내는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셈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영과 육의 갈등을 겪을 때 자기에게는 은혜가 전혀 없다고 자주 불평하지만, 그들의 불평을 잘 들어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불평은 시력이 있는 사람이 자기는 볼 수 없다고 불평하거나 자기는 잠들어 있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은 싫은 것이지만, 그것은 살아 있기에 나는 것
사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그런 불평 자체는 죄를 싫어하는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 죄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불평할 수 있습니까?
연기 속에서도 약간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것들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만 그 안에서도 약간의 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들은 약해 보이지만 겉보기에 선한 것들보다 오히려 더 선합니다.
악을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격정적인 것은 비록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땅히 감정을 느껴야 하는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냉랭함보다는 훨씬 더 나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예 흐르지 않는 물보다는 흙탕물이라도 흐르는 시내가 더 나은 법입니다. 겉으로 현명한 체하는 욥의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온 몸에 병든 욥이 더 많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약점 때문에 흠집이 난 행동들이 보속행위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더 많이 입습니다.

표지 6 끄지 않으실 심지에도 미약하지만 활동력이 있다.

여섯 번째로, 불의 규모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곳에는 어느 정도 활동력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하는 방식 때문에 자주 불에 비유됩니다.
육적인 사람들 안에서 시작된 죄는 결국 최악의 상태에 이르고 말지만 영적인 사람들의 경우, 부패 말고는 활동이 전혀 없어 보이는 죄에 빠져 있을 때도 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죄의 세력을 깨뜨리는 반대 원칙이 그들 앞에 존재합니다.

표지 7 끄지 않으실 심지에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다.

일곱 번째로, 불이 강철을 부드럽고 유순하게 녹여 주는 것처럼 은혜 또한 그것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렇습니다. 은혜는 마음에 역사하여 그것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선한 생각을 위해 준비하게 합니다.
반면에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꺼져 가는 심지만도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표지 8 끄지 않으실 심지는 미약하지만 선을 행한다.

여덟 번째로, 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에 옮겨 붙어 그것을 불로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는 다른 사람들 속에 똑같은 인상을 남겨 주기 위해 애쓰며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선을 창출해 냅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조차 은혜롭게 사용하고 그것들을 영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이 단지 일상적으로 행하는 것을 은혜를 입은 사람은 거룩하게 행합니다.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혹은 무슨 일을 행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또 모든 것이 그 목적에 부합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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