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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9...% 기독교인 (The Almost Christian) 조지 휫필드

조지 휫필드

by 김경호 진실 2012. 3. 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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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9...% 기독교인 (The Almost Christian) 조지 휫필드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 : 28).

이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사도행전 26절에서는 이방인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를 변론할 때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떻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경이롭게 개종했는지 그 사실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는 일찍이 예언하시길 인자(예수님)가 들려 올라갈 때 “그 제자들은 주의 이름을 위해, 또 주를 증거하기 위해 왕과 통치자들 앞에 불려가리라.” 이러한 일들을 예정하신 이유는 그 나름대로 무한히 지혜로운 계획에 의한 것이니 정녕 온당하도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십자가의 교리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 땅의 왕들이나 통치자들은 교만하여 기독교의 미천한 선생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고, 아니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 행복해 기독교의 진리를 달갑잖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낼 수밖에 없다.

이들이 사도들을 불려 심문하는 일이 없었으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잡힌 이유를 충분히 알았다. 우리의 복된 주님이 이번에 대적들에게 바울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심문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이런 거룩한 뜻에 순종하여 바울은 단순히 자신을 변론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심문하는 자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다.

바울은 이 일을 영감있고 능력있게 한 것이다. 베스도는 바울이 제시한 너무나 강력한 증거에 굴복하지 않으려 하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바울,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이런 외침에 우리의 용감한 바울 사도는 (거룩한 예수님의 참된 제자답게) 온유하게 대꾸한다.

“베스도 각하여, 나는 미치지 않았소.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그런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얘기에 상당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고, 또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음을 간파하고 바울은 특별히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그런 다음 가능하다면 바울이 간절히 바라는 바 아그립바의 회심을 이루게 하려고 바울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긴장된 수사법으로 더욱 절실하게 말한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이 말에 왕의 감정이 너무나 강렬하게 격발하기 시작했다. 공개적인 법정에서 이 죄수(바울)의 설교에 왕이 감흥을 받았다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외쳤다.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오늘날에도 사도 바울의 권능과 정신으로 나선 그리스도의 대리인들이 주님의 교리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을 찾아가지만, 진리를 영접하는 양식은 서로 다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사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위대한 사도 바울처럼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님의 종들이 진력을 다해 열심히 전하면 어떤 적대자도 이를 부인하거나 진리에 대항할 수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베스도 각하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다. 이런 자들은 교만하여 가르침을 받을 수 없거나, 지나치게 감각적이거나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또 지나치게 세속적인 마음이어서 진리에 따라 살 수가 없다.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넨 너무 많이 배웠어. 학문이 지나쳐. 그건 설명할 수 없는 거야. 참 불쌍하군. 이래서 이 자가 미친 거야”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찬양할지라.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야기를 불신하지는 않는다. 기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아그립바는 반쯤 99.999...% 기독교인(almost Christian)인데, 사실 아그립바 왕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도 거의 없다. 즉, 말씀을 들어 almost Christian 이상 나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 설교를 듣는 분들께 이런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다음 세 가지 사항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첫째, almost Christian이란 어떤 의미인가?
둘째, 많은 사람들이 그저 almost Christian에 머무는 주된 이유들은 무엇인가?
셋째, almost Christian은 그 영적 상태가 위험하고, 불안하고, 전혀 어떤 효력이 없고, 어리석은 일임을 살펴보겠다. 결론적으로 전반적인 권면을 하겠다. 반쯤이 아니라 전적인 (altogether) 크리스천이 되도록 모두 투쟁해야 한다.

첫째, almost Christian이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관련하여 보면 almost Christian은 두 개의 의견 사이에 양다리 걸치고 서 있는 자다. 그리스도와 이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다. 마치 하나님과 물질의 신(마몬, Mammon)이, 빛과 어두움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종교적 성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종교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한다. 그의 거짓된 마음은 항상 이렇게 외친다. 나 자신을 용서하라. 나에게 해가 없도록 하라. 또 실제로 기도도 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순종은 철저히 부분적이며 자기가 고의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체크하고 계신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고무하는 사도의 말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일에 범죄하면 모든 것에 범죄함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로 외적인 종교의식에 신앙을 의지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타인을 경멸한다. 이러한 삶은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간단히 말해 이런 사람은 형식(폼)을 좋아한다. 절대 그 가슴 속에 거룩함의 힘을 느낄 수 없다. 이런 사람도 변함없이 해마다 계속 생명을 부지하지만 은혜의 본질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그 형식적 의식에만 충실한다. 마치 파라오의 깡마른 암소보다 나은 게 없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나쁘다.

그 이웃사람들과 견주어 이 자를 살펴본다면 이 자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엄격하게 공평한 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또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애(自己愛)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이 자는 자신의 부정직함이 자기 명예를 더럽히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에서 번영을 구가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대단치 않은 선행에 안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도 복음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된 것을 읽었을 것이다.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 내어쫓으라.”(마 25 : 30).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나쁜 열매를 맺어서가 아니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뿌리부터 말라버리게 했다.

이 자는 공적인 자선 기부금 납부에 반대하지는 않으며 자주 그런 자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은밀하게 병든 자와 죄수를 돌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배고픈 자를 구제하는 자선단체와는 친하지 않다. 이런 일은 성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짓된 가슴이지만 오로지 자신의 교만 때문에 겸손한 자선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느끼기는 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저주받아 영영 형벌을 받을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은 간음자요, 술 취한 자요, 강탈한 자일 뿐만 아니라 자선을 베풀어야 할 대상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영원한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중 략 -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주님)이 대답하여 가라사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처하리라.”

예수님께서 이웃을 돌볼 것을 특별히 강조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장문의 관련 성경 구절을 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행위로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는 구절이 너무 사소하게 언급되고 있어 성경에는 마치 이런 구절이 없는 것처럼 미혹되게 생각하게 된다.

almost Christian 문제를 계속 생각해 보자. 순전히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웃에 철저하게 정직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중하게 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이런 정직함과 제정신을 차리는 것 모두 허황된 자기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아주 난폭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체질이 무절제에서 떠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명예를 잃을까 조심하고 또 이 세상 사업에 부적격하게 될까 염려하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앞에 언급한 그런 이유들 때문에 폭주나 무절제를 피할 정도로 신중하다. 그는 너무나 합법적이다. 사실 그는 술주정꾼이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자기부정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자는 우리의 구주께서 아주 엄한 주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몇 가지 특정한 일에 방종해도 주님이 우리를 부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방종과 여타 범죄의 상태에 있는 만큼 참된 종교의 감각 없이 살아간다. 이 자는 자신이 행하는 관행뿐만 아니라 삶의 원칙들을 원만히 잘 지켜나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보다 점점 더 세상의 인도를 받게 된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몇몇 사람이 주장하듯 천국으로의 길이 그토록 좁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그저 그렇고 그런 선량하다고 하는 자들처럼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상당수 무시한다. 아니면 자기의 부패한 성향과 가장 잘 맞는 것만 취한다. 이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용의주도하며 천국으로 얼굴을 돌린 갓 회심한 사람에 대해서도 매우 신중하게 대응한다. 이자는 항상 마귀의 역할을 하며 갓 회심한 자들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뭐 그렇게 엄격하게 구냐고 말한다. 회심한 자는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인데 말이다. 그 결과 이 자는 “스스로 고난을 겪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장애가 되는 삶을 산다.”

almost Christian은 이렇게 산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대략의 윤곽만으로도 당신 양심에 비추어 판단해 보면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바로 이런 사람의 모습이 가증스러울 정도로 똑같이 있음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오늘 본문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말씀에 동참하고 스스로 “almost가 아니라 전적인 크리스천이 되도록” 간절히 염원하라.

둘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왜 almost Christian에 불과한지 그 주된 원인들을 살펴보자.

1. 첫 번째 원인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종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기독교 국가에 살면서도 기독교가 뭔지 모른다. 이 말을 하기 좀 거북스럽지만 슬프게도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 보면 기독교가 뭔지 모른다는 말은 사실이다. 어떤 곳에서는 종교를 이런 저런 교제모임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좀 우월하고 이런저런 의무를 수행하며, 전형화 된 의식이 집행되는 것이 종교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주 많다. 그러나 종교를 그 본질적인 의미로, 즉 본성의 철저한 내적 변화와 거룩한 삶,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의 역동적(생생한) 참여, 하나님과 자기 심령의 연합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주님과 연합한 자는 한 영이라.”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인 회심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됨을 말하는데, 신생의 문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 마치 니고데모처럼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almost Christian에 불과하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을 취하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들은 경건의 본질에 대해선 너무나 아는 게 없으면서 그 그림자만으로 만족해하는 자들이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almost Christian인 반면, 전적인 크리스천이 그토록 적은지 알만하다.

2.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almost Christian에 불과한지 그 두 번째 이유는 줏대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이 어떤 것인지 각성하여 느끼고 내세의 맛을 보았지만 남에게 특이하게 보여 경멸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을 벗어던진다. 이것은 죄악 된 본성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유태인들의 눈이 무서워 밤에만 예수님을 뵈러 오는 자이며, 또 예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지만 은밀히 예배하려고 하는 자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되 이것이 남에게 알려질까 두렵고, 또 함께 식사를 하던 친지들의 비웃음과 조소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예수님께 올 수 없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 대해 우리의 구주께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다. “서로에게 영광을 취하는 자들아, 너희가 어찌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읽지도 못했는가? 주님께서 직접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이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온 영광보다 인간의 칭찬을 더 사랑하니” 당연히 다들 almost Christian에 불과한 것이다.

3. 세 번째 이유는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아주 불쌍한 젊은이의 경우를 접하게 된다. 그 젊은이는 복된 우리 주님께 달려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묻기를 “어찌해야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고 대답했다. 이에 그 젊은이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계속 말하길,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이 말에 젊은이는 소유가 많으므로 근심걱정하면서 떠나갔다. 불쌍한 젊은이 같으니라고! 그는 크리스천이 되어 영생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
러나 그는 크리스천이 되는 값이 자기 재산을 다 써야 할 정도니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늘날에도 늙고 젊고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우리 복된 주님께 달려와 경배하고, 사적으로도 주님께 무릎을 꿇으며 주님의 복음을 구한다. 이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는가? 자기 부를 자기 혼자 향유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깨닫지만, 자기에게 있는 애착가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님께서 이 문제(재산 문제)에서는 우리를 용서하셨어. 우리가 당신께 기도하니, 우리를 용서하셨어.”

하지만 천국이 이 조그마한 땅덩이만큼도 가치가 없는 그런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영생이 이 세상의 덧없는 부를 일시적으로 포기할만한 가치도 없는 그런 형편없는 물품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하지만 인간의 행태는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almost Christian에 머물게 하는 일반적이면서 치명적인 원인이 된다.

4. 무수한 사람들을 almost Christian으로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다른 요인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이고 치명적인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서 떠나는 것으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면 기꺼이 부를 경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만 한다.”고 말했다고 하면 앞에서 언급한 불쌍한 젊은이처럼 너무나 감각적인 쾌락을 사랑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떠나게 된다.”

이들은 어쩌면 헤롯왕이 세례 요한을 청했듯이 그리스도의 목자들을 청해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 모른다. 그러나 응큼한 쾌락에 붙잡혀 있어 그런 쾌락에서 떠나야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사악한 아합 왕의 경우처럼 부르짖어야 한다. “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발견했구나?” 이들에게 반드시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이 말은 아마 이들에게 “오른쪽 눈을 뽑고, 오른손을 잘라버리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들려 잘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많이 요구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영감에 넘치는 사도 바울이 분명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들을 죽이라.”(mortify our members which are upon earth.)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천 명을 회심시킨 후라도 자기 자신은 매일 “자기 육체 아래 있고, 육체의 종노릇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교한 것을 자기는 따르지 않는다면, 이 자 자신이 던져 버려질 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사도 바울보다 더 현명하여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보다 쉬운 길을 제시하겠다고 헛된 생각을 한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감각적 취향에 철퇴를 내리지 않고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아첨한다. 즉, 세속적인 성향에 대항해 싸우지 않고도 우리가 좁은문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감각적인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적인 크리스천이 되지 못하고 almost Christian이 되고 만다.

5. 마지막으로 기질이 변덕스럽고 안정되지 못한 경우도 almost Christian을 양산하는 한 요인이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회심의 가망성이 있지만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 만나게 되면 그들의 불행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외관상 처음에는 영적으로 잘 출발하지만 잠시 후 실족하여 결국 육적인 상태로 가고 만다. 이 사람은 종교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겁내지도 않으며, 돈이나 감각적 쾌락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단 그 기질이 변덕스럽고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 이들은 종교를 단순히 어떤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보아 잠시 동안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곧 자기 호기심이 충족되면 다시 종교에서 떠난다. 마치 자기 벌거벗은 몸을 린넨 천으로 가리고 예수님을 보러 온 젊은이가 예수님을 한 철 동안만 따르다가 유혹이 자기를 덮치자 약간의 결단력이 모자라 자기의 모든 좋은 의도를 다 버리고 벌거벗은 채 달아나버리는 꼴이다.

처음에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잠시 동안 잘 자라 번성하지만 뿌리가 없어, 즉 내적인 거룩함과 경외로움이 없어, 요나의 호위병처럼 곧 말라 시들어버린다. 이들의 좋은 의도는 막 목이 잘린 짐승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처럼 격렬하게 움직이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즉 천국을 향한 여행에서 출발은 좋았으나 그 길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갈수록 좁고 멀다는 사실을 알고는 꾸준하지 못한 기질 때문에 아예 영원히 멈추어 서 버린 격이다. 이렇게 “개처럼 자기가 토한 것으로 돌아가고 몸을 씻은 돼지처럼 다시 더러운 곳에서 뒹군다!”

그러나 내가 떨림으로 변덕스러운 자들의 운명을 선포하노니 저들은 자기 쟁기를 들고 결단력이 부족해 부끄럽게 뒤돌아 본 자들이다. 내가 그 무시무시한 결과를 다시 반복해 말하노니, “누구라도 뒤돌아보면 그 심령은 예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다.” 또 “한번 비침을 받은 자고, 천국 선물을 맛보고, 내세의 권세를 맛본 자가 실족하면 다시 회개하기란 불가능하다.” (회개하기 너무너무 어렵다.) 이렇게 복음은 배교자에 대해 엄중하다. 시작은 좋았으나 변덕스러운 기질 때문에 (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길!) 다시 지옥에 떨어져 파멸할 자들이 많다. 변덕스러운 기질, 이것이 수많은 사람을 전적인 크리스천이 아니라 almost Christian으로 만든다.

셋째, 이제 almost Christian에 불과한 짓이 왜 어리석은 것인지 전반적으로 고려해 보자.

1. almost Christian은 구원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almost 신자는 ‘거의’ 훌륭하다. 다시 말해 거의 목표에 도달했지만 실제로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마음과 모든 혼과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라이벌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만큼 우리는 불행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솔로몬 왕 앞에 나타난 가짜 어미가 아이를 두 쪽 내기를 바랐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분열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짜 엄마처럼 전부를 얻지 않으면 하나도 얻지 않으려 한다.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내게 다오.” 너의 전 마음을 다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거룩한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은 위선을 떨지라도 하나님은 심판날에 자기의 가장 큰 몫을 뒤에 감추었을 때 자기의 모든 마음을 주님께 바친 척한 그 위선자를 쳐 죽일 것이다(그리스도의 종 베드로의 입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였듯이 말이다). 이들은 잠시 동안 위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의 아내가) 아들의 병 문제로 여로보암의 아내인 것을 숨기고 위장하여 찾아왔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설교문에는 엘리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 내용이 나온 열왕기상 14장을 보면 아히야로 나옴 - 역자)에게 알려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외식하는 자의 너무나 교묘한 위선을 드러나게 하신다. 만약 이들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합치하지 않으면 이들은 외식하는 자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다.

2. 이들이 더욱 나쁜 것은 이들의 이중적 태도가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전혀 효력이 없는데다 타인에게도 (기독교에 대한) 엉뚱한 편견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almost Christian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피조물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거짓 선지자들 중의 하나요, 이들에 대해 우리의 복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경계하라고 설교하셨다. 이들이 사람들을 미혹하여 천국으로 가는 길이 실제보다 더 넓다고 하는 자들이다.

이에 관해 전에도 보았듯이 이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막는다.” 이들은 세상을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정신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들은 거짓 빛이며 따라서 각성하지 못한 영혼이 아무 생각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항해하는 중 파선을 당하게 된다. 이들은 불신자들보다도 더 큰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적들이다. 왜냐하면 불신자는 각성하게 될 것이지만 almost Christian은 교묘한 위선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들을 닮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더 큰 저주를 받게 되는 게 당연하다.

3. ‘almost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하고 남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만큼 이것 자체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최대의 배은망덕을 저질렀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내려와 우리의 심령을 위해 자신의 보혈을 뿌렸다. 그런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반만 드린다고? 오, 우리 마음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심성의껏 노력하여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받아들여지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지 않을 때 어떻게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드릴 때 그 심령의 고통을 보시고 예수님이 족하게 되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 중 누가 아주 비싼 값에 노예 한 명을 샀다고 가정해 보자. 이 노예는 최악의 비참한 상태와 고통 속에 있었다. 만약 그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으면 비참한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노예가 이후 반역하게 되었다. 아니 주인에게 반만 충성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우리는 이 자를 두고 어찌 이토록 배은망덕할 수 있느냐고 소리칠 것이다. 이 배은망덕한 노예가 바로 당신이다. 오, 인간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피할 수 없었던 영원한 비참과 징벌에서 구원된 자가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리려 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도 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려는가! God forbid!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진저! 이 일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almost가 아닌 전적인 크리스천이 되도록 한두 마디 권면을 덧붙이겠다. 우리가 우리의 왕이요 구세주요 우리의 하나님이요 창조주께 범한 모든 천박스러운 짓거리와 반역한 것들을 스스로 경멸하여 부인하자. (이런 죄악된 상태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려고 약간의 수고라도 하지 말고, 그 결과대로 스스로 지옥에 뛰어들자.

하나님께 우리 마음 전부를 드리자. 더 이상 두 개의 입장 사이에 머물지 말자. 이 세상이 하나님이라면 이 세상을 경배하자. 쾌락이 하나님이라면 쾌락에게 예배하자. 그러나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라면 오로지 그 분께만 예배하자. 슬프도다. 왜, 왜 우리는 이토록 오래 밖에 서 있어야 하나? 왜 우리는 노예와 이렇게 사랑에 빠져 있는가?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전적으로 떨쳐버리지 못하고 수많은 영적 속박처럼 우리의 심령을 속박시켜 하나님께로 날아가지 못하고 있다.

슬프도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적인 순종에 보답해 주실 수 없는 분인가?
하나님께선 능히 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절름발이 반쪽 신자 모양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좀 더 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반쯤 종교적이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이 상태로 더 나아가다간 당신은 불행하고 비참하게 되지 않겠는가?
슬프도다, 형제들이여, 반쯤 신앙은 완전히 미혹이다.
반쯤 경건하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 걸치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보아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기독교가 주는 위로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종교적인 것(경건한 것)을 취하되 자기 탐욕이 약간 흔들릴 정도만 취하고, 자기 탐욕은 종교적 위로를 완전히 빼앗아버릴 정도로 취한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모든 애착에서 신실하게 떠나고 자신의 마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면 이들은 하나님 자체와 연합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운 마음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평안을 누린다. (하긴 almost 신자가 그런 순간이 올 때까지 갈 수도 없지만.)

이런 평안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며, 과거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평안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경멸을 당하게 된다. 우리의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선 경멸을 당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또 감각적 쾌락도 포기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감각적 쾌락이 영적으로 우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리는 영적인 것은 감각적 쾌락보다 무한히 더 좋은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사랑도 버려야 한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일단 우리의 마음을 넓히면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을 위해 일했던 것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아무리 지겨운 고충을 겪어도 못 견디겠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소중한 구세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은 이 세상의 삶에서도 쉽고 기쁜 것이 될 터이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육신을 벗어 던지고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채워질 때, 어떤 가슴이 이를 품을 수 있으며, 어떤 말로 이를 표현할 수 있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 속에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신실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여기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너무했음을 회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이 일을 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로 작정한 이후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너무나 지체했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히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권면을 하노니, 형제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하나님을 향유(享有)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지니시기 바란다. 그리고 명심하라. 당신이 나태하여 사소한 거룩함도 간과하거나 조금의 경건한 행동도 놓쳐 버리게 되면 이것이 다 당신의 면류관에서 취해 빠져나가는 보석이다. 하나님 앞에서 조금씩 축복을 상실하는 것이다. 오, 항상 이렇게만 생각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당신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에서 복잡하게 문제를 뒤섞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과 뒤섞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더더욱 하나님께 드리려고 매일매일 노력하게 된다. 항상 깨어있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성결과 사랑의 수준을 높여가려고 열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항상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풍성한 모습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기쁨의 충만함이 있고, 하나님의 오른편에는 영원 이상 지속되는 기쁨들이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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