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불타는 가시덤불(조지 휫필드)

조지 휫필드

by 김경호 진실 2011. 10. 11. 09:12

본문

불타는 가시덤불(조지 휫필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출 3:2-3)

날이 새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깜깜하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 말은 얼마나 자주 진실로 확인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스스로 겪은 경험들을 거짓 없는 눈으로 직시해 봐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을 다루신 예들을 가만히 생각해본다면 역시 그 말에 수긍하게 되실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이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그리고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하는 말씀은 참으로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사 59:19). 누구도 모른 체 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가 처한 현실이나 각자가 처한 상황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차차 좋아지길 바라며 살지만, 사실 우리의 몸과 혼 그리고 세상의 일들이 덧없는 것들임을 감안하여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 생이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기가 힘들고 오히려 변화와 기복으로 가득찬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얼마 안 가 다시 구름이 몰려오고, 가장 풍요로운 상황은 바로 그 몰려온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는 그런 날 뒤에나 찾아옵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종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잊으셨나이까?”라고 부르짖곤 합니다(시 116:11, 시42:9).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들어 있는 장도 바로 그런 사연이 담긴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애굽ㅇ로 데려오기 위해 사람을 보내었던 날, 야곱은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이 이스라엘의 선조는 오랜 세월 동안 아들이 죽었다고 여기며 살아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날아온 기쁜 소식에 그는 온 가족과 함께 깜짝 놀람과 동시에 너무도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합니다. 이 선한 목자는 그곳에서 아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간의 파란만장한 삶을 평안히 마무리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바로와 그의 종들이 아낌없는 조의를 표함으로 더없이 장려한 가운데 치루어졌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에 있는 선대들의 무덤에 합장합니다. 그 이후로도 요셉은 애굽의 주로 불리며 장대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도 두 말 할 것 없이 부요한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당대의 바로가 죽고 나자 상황은 서글픈 국면으로 돌변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1:8)

새 왕은 요셉을 몰랐기 때문에 야곱의 자손들을 감시하면서 새로운 주인들을 섬기고 생소한 법을 따르도록 했으며, 고센 땅을 다스리는 대신 거기서 노예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긴 세월 동안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인들은 분명 야곱의 자손들의 신앙을 짓밟고 애굽의 우상들을 경배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작금의 미국 흑인 노예들보다 더 비참한 상태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조상들이 누렸던 번영을 의심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그제는 세월이 너무 흘러서 자신들을 잊어버리셨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것입니까?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그리고 하나님이 마음에 계획해 두신 시간이 오면, 즉 예정해 두신 시간이 차면, 인간들과 마귀들이 어떻게 발악을 하며 저항을 해도 그분은 유유히 지상으로 내려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던 자들은(그들과 한패였던 자들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임을 명백하게 깨닫게 됩니다. 출애굽기에서 주님이 쓰신 구원자는 바로가 유념하여 높은 자리에까지 격상시켜준 덕에 애굽인의 학문을 배우며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에게 최상의 특혜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요즘에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을 붙잡기까지 항상 선하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였음에도, 명예를 단호히 거부하고 오히려 경건한 마음으로 그것을 모욕하고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 세워져온 궁전들 중에서 가장 장대한 것에 속하는 바로의 전에서 즐거움과 영화 누리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어영부영하는 세월을 40년이나 지속해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비하신 계획들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자질, 즉, 깊은 지식들과 역량들을 습득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아무 탈 없이 잘 나가던 어느 날, 유대인들 간에 일어난 다툼을 중재하다가 그 중 한 사람으로부터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릴 왕과 재판관으로 삼았더냐? 네가 애굽인을 죽인 것같이 나도 죽일 생각이냐?"하는 말을 듣고 낯선 땅으로 도망해 왔었습니다. 모세는 그 광야에서 자신을 낮추어 노예의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는 그러한 삶을 40년 동안이나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나이 80을 갓 넘긴 즈음, 꿈도 못 꾸고 있던 상태에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즉, 자신의 백성을 속박에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주님께로부터 하달받은 것입니다. 모세 자신이 우리에게 밝힌 바를 살펴보면... 우선 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 3:1)

그는 속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나 같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겨우 양치기라니, 나 같은 학자가 고작 천한 노예들이나 하는 일에 종사해야 하다니…….' 그는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위인입니다. 세상에는 소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 중에는 교만이 폭발하기 직전인 지경으로 마음에 꽉꽉 들어차 있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억센 참나무처럼 그 어떤 바람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끔찍한 폭풍이 불어닥치면 나무들은 뿌리채 뽑혀버리고 맙니다. 겸손한 갈대들은 몸을 숙였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지만 그들은 기어코 맞서다가 결국 그런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갈대와 같이 자신을 숙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인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산 호렙을 오가곤 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시간을 계획적으로 운명하며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감리교도('형식주의자'라는 뜻)들이 아무리 경시 받아도 우리 중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나 질나쁜 주인은 없습니다. 일을 적절한 시기에 맞추어 체계를 잡아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여 사역하는 것과 평범한 일상의 일을 잘 운영하는 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확언컨데 모세는 시간을 체계적으로 경영한 감리교도였습니다. 성실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엄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양무리를 돌보고 있었지만, 그 양무리가 호렙으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직전에도 양들을 광야로 데리고 가는 등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으름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이들을 반대합니다.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을 부르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혹자는 이 천사가 가브리엘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거기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우 십중팔구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천사" 말입니다. 어느 주석에 보면 이 세상에 오시길 원하고 계시던 영원하신 말씀께서는 이런 식으로 종종 이 땅에 오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지상의 모든 인간들을 위하여 죽으러 오실 것임을 알리시려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는 천사가 나타난 특별한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모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동료는 물론하고 작은 아이 하나도 옆에 없었습니다. 저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혼자가 되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 친구 저 친구를 원하지만, "주님, 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만으로 족합니다."라고 고백할 줄 아는 이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 광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이런 사실이 그를 칭송할 이유가 될 진 잘 모르겠지만), 그는 단순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덤불 가까이 간 것이 아니라, 타고 있는 가시덤불 자체에 주목하여 그것을 보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뭔가 특별한 점을 발견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그는 이 사실에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반드시 그 말씀하시고자 하는 사람의 주의를 끄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출 3:3)

그는 처음엔 덤불에 우연히 불이 붙은 줄 알았을 것입니다. 위에서 불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주위에 화덕 같은 것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덤불이 타긴 타되 소멸되지도 않고 조금의 재도 생성되지 않는 것을 확인했을 때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라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여, 그것은 기이한 광경이긴 하지만 또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기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덤불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타오르는 덤불이 모든 시대가 끝날 때까지 교회와 각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귀한 교훈들을 전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모세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는 아마 제 말에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께 제일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덤불이 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시덤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 가시덤불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히말라야 삼목이나 어떤 크고 화려한 나무가 아니라 그 소소한 가시덤불을 선택하였을까요? 하나님의 교회는 흔히 가난하고 비천하고 그렇게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곤 했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영광을 다 가지고 있지만, 밖에서 보기엔 그저 초라한 무리들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를 향해 미소지었을 때, 교회는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밀턴은 역사를 유심히 살펴보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왕들이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화려한 예복을 입히고 명예를 누리게 하고, 많은 재화와 금으로 만든 강단을 제공하면 하늘에서는 '교회에 독이 스며들고 있다!'하는 음성이 들려온다."하고 말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면서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혹자가 실험적으로 모든 감리교도들, 그러니까 아직 감리교도로 확인되지 않은 수천 수백명의 성도들까지 포함한 감리교도들의 수중에 십만 파운드나 혹은 이십만 파운드 정도의 돈만 남겨둔다 할지라도, 감리교도가 되고 또 조상들에게 물려받는 얼마의 돈을 찬송책을 사는 데 투자하여 변화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라고 말씀하시기는 하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다 그런 건 또 아닙니다. 이중에는 부한 자도 가끔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께 더욱더 감사를 드리십시오. 몇 배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나지막하고 초라한 가시덤불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유명한 사역자가 한번이 이렇게 말했습니다.(제가 그의 설교를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한없이 풍성하지만 그분의 교회는 더없이 초라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혼돈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심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억만금을 지니고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지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원한 부를 상속받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의 교회란 그저 불에 타는 가시덤불이 불과합니다.

“가시덤불이 불로 타나...”
왜 불타겠습니까? 불타는 가시덤불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불같은 시험과 여러 가지 고통들로 가시덤불이 타는 듯한 고통을 받을 것이란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 가시덤불은 그 당시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앙 상태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쉴새없이 벽돌을 만들었고, 그리하여 벽돌 굽는 데 필요한 불길은 한 시도 끄질 줄 몰랐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가시덤불이 불에 타는 듯한 노예 생활을 통해 불같은 시련을 겪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혹자는 말할 것입니다. "아, 그러면 불타는 가시덤불은 바로에게 속박돼 있는 이스라엘에 한해서 주신 말씀이시군요."
그러나 여러분, 탄식이 섞인 부르짖음은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절규가 아니었습니까? 실로 그러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가시덤불이 불타는 듯한 시대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교회가 안식하는 시기가 없지 않았지만, 있었다 해도 그 시기는 너무도 짧기 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요한 시기를 누린 때도 자세히 살펴보면 폭풍 전야의 고요에 불과했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지진이 있던 날 아침, 날씨가 너무도 좋았었습니다. 그날 아침 일어난 사람 중에 해가 지기 전 대지가 진동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교회도 사위가 아주 고요할 때, 모든 것이 안전해 보일 때, 느닷없는 폭풍이 닥쳐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의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 개개인들도 이 법칙에 적용을 받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실 마음을 먹고 있는 형제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바뀌었어. 세상이 많이 변했거든."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Young) 박사님은 그런 이들을 두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신학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하길,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 왕과 정부 관리들 아래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 더 이상 박해 같은 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은 이후로 지금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시간을 무한히 지속시키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떠나서, 그러니까 독재적인 정권 아래 살고 있든 아니면 자유로운 정부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든 간에, 하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익히 들어본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또 들어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이 말씀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됩니다. 용광로는 아주 뜨거운 곳으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조리 불타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용광로에서 무엇으로 불태워지겠습니까? 예, 바로 고난과 박해입니다.

일전에 저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저에게 "저는 말이죠,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라티머(Latimer) 주교가 어느 집에 심방을 했는데, 그 집 주인이 주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 제 생애 동안 십자가의 거침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선한 주교는 대답하기를, "여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집이 분명하군요.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는 법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박해는 차치하고라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핍박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느 가족에게 이삭이 있으면, 단언켄데 그는 이스마엘에게 조롱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가족이나 형제, 자매, 혹은 하인들 중에도 우리의 죽음을 기다라며 저들이 빨리 사려져 버려야 내가 저 재산을 차지할 텐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조롱하기 마련입니다.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할 지라도,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들이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아 차릴만큼은 또렷한 모양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처지에 놓인 분이 있다면, 그들은 지금 불타는 가시덤불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일이 없을 지라도, 우리는 또 다른 것들에 기인한 환난을 겪곤 합니다. 가족이나 친한 벗과 사별하게 된다거나, 자녀들이 방탕한 길로 접어들어 때로 끔찍한 비행에 연루될 수도 있습니다. 이중에도 가시덤불처럼 불타고 있는 부모님들이 적지 않을 줄로 압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불타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고통을 주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이 어떤 상태인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은 혹시 마귀를 향해 달려가는 4륜 마차에 타고 있지는 않습니까? 경건한 분들은 이런 고백을 하곤 합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유산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분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어리석은 젊은이들의 조롱을 감내하며 꾸준히 기도하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혹시 내면의 유혹으로 불타는 듯한 환난을 겪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은 마귀의 불붙은 화살에 관하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재로 겪어보면 그 화살이 불로 타는 듯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마귀의 불붙은 화살들을 경험해 본 일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지 진지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전 마귀 때문에 곤란을 느낀 적은 없는데요."
정말 그러하다면, 그는 마귀에게 끊임없는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는 마귀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마귀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마귀를 부인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마귀의 자녀인 자가 어떻게 마귀의 불붙은 화살을 경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경험 못한 이유는 딱 하납니다. 그것은 그가 바로 마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그를 그 가증스러운 잠에 빠져들게 한 것입니다. 진짜 저주가 닥쳐오기 전, 주님께서 그의 잠을 깨워주시길! 마귀의 화살촉에는 독이 발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화살이 몸에 박히면, 마치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자리에는 마귀로부터 "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하는 말을 듣고 괴로워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헌신 기도를 하러 앞으로 나아오기를 주저하고, 또 기도하기도 두려워합니다. 이 집회 동안 마귀는 그런 이들을 집중 공략할 것입니다. 마귀는 집회에 참석하지 말고 고만 집에 가서 처박혀 있으라고 다그칩니다. 그런 이유로 계속해서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분들이 분명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 여러분, 저에겐 아직 이것 말고도 설교할 내용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쳐오는 외부로부터의 시험들과 그보다 더 혹독하다 할 수 있는 내부로부터의 시험들로 인하여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일일이 언급하고 난 뒤에 설교를 마친다면, 여러분은 아마 오늘 저녁 집에서 쫓겨날 겁니다.

혹자는 제 설교를 듣다가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참 이상한 말씀만 계속하시네요."라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낯설은 말씀만 계속 드리게 돼서.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분명 성경을 많이 읽지 않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잘 모르면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이들은 또, "당신은 하나님께서 무슨 폭군인 양 말씀하시는군요."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몸을 내어줄 뿐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를 담금질해서 하늘의 시민답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올라와 있는 상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불타는 가시덤불은 우리에게 너무도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자,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러면 특별히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시덤불이 불로 타나 가시덤불은 소멸되지 않더라.”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가시덤불이 불에 타고 있는 데도 어떻게 재로 화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지 보려 했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불은 여러분을 소멸시키는 불이 아니라 정화시키는 불입니다. 그 불이란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졌다.'하는 말로는 다 표현해내기 어려운 혹독한 고난입니다. 성경에서 가시덤불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겪고 압제를 당하여 내적인 시험으로 불에 휩싸여 있는 듯한 고통을 겪고, 또 때로는 내던져지기도 하지만, 참으로 감사하게도, 멸망당하지는 않습니다(고후 4:9).

"전 아무 일도 없고 또 아무렇지도 않은데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헛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도 바울보다 큰 자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아무 시험도 안 받고 살았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또 단정지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역자들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신들에게 들려줄 설교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심하게는 사역자들이 소풍 나온 듯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역자들도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 여러분은 사역자들도 그대들과 똑같은 시험을 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교제도 필요 없고 시험도 받지 않는 자라면, 우리 설교자들은 사람들은 몰아붙이기만 하는 껍데기뿐인 말쟁이가 될 것입니다. - 마음이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설교자가 가시덤불처럼 타든,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불 같은 시련을 겪든 간에, 아무튼, 위대하신 하나님, 영원한 언약의 천사께서는 가시덤불 한가운데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분은 덤불에서 좀 떨어져서 말씀하시거나, 일 야드 혹든 한 발짝 정도 물러선 곳에서 음성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가시덤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 백성들이 마지막 날들에 이 덤불처럼 탈 것이지만,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구해낼 것이니라. 그들이 불타면, 나도 함께 불탈 것이니라."라는 뜻을 전달하시려는 듯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실제로 그런 의미를 전달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 33:16)

그분은 덤불 안에 '거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셨습니다. 한 때 어떤 여인, 그러니까 14년 동안 흑암 가운데 있다가 여기 집회에서 구원을 받은 여인은, 구원받기 직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채의 집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하늘에 있고, 또 하나는 인간의 낮아진 마음입니다."
그분은 가시덤불 속에 거하셨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확신합니다, 마귀와 그 사악한 마음을 가진 졸개들은 덤불을 당장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을 것입니다. 불로 태워서 재가 되지 않을 것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습니까? 덤불이 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고 저는 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저려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들을 만나면 논쟁하기보다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저는 논쟁을 전담하는 마귀가 마귀들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교회로 논쟁의 물결을 끌고 들어옵니다. 흰 카라가 드리워진 근사한 가운을 입고 손에는 두터운 책을 들고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저는 그런 차림을 한 사람을 볼 때마다 혹시 마귀가 그 뒤에 서 있는 건 아닌가하고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늘 논쟁 벌이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신학 용어를 들이대며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악한 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가 다시는 땅을 뒤덮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던 것처럼, 화평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고 또 아무도 그분의 백성들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음성을 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논쟁을 즐기는 사악한 마음도 '현재의 일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가시덤불은 불에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덤불을 태우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속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행동을 개시하면, 주님께서는, 성령께서는 그것을 무마시킬만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성령께서는 늘 그런 식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단련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확정하신 가시덤불을 결코 재로 화하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을 붙들어주고 또 인도해 주시기 위하여 항상 그들 곁에 서 계시는 까닭에, 우리는 정복자들보다 더 안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어느 혼들을 맡으시면, 단 한 명이라도 잃어버리거나 놓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논쟁을 즐기는 사악한 마음은 모든 것을 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지난 삼십년 간 수천 수만 번 실의와 낙담에 잠겨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성도들이여, 어서 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는 아직 어린 양을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증거하시고 여러분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저도 사람입니다. 오늘 이 밤, 저는 여러분들을 세심히 살펴보았지만, 앞에 선 이 사람 자신도 불타는 가시덤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분이 한 분도 없는 듯하더군요. 저도 욕망으로 불타기도 하고, 또 부패와 타락의 언저리에서 온 몸이 불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만심으로 불타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 자만심이 요만큼도 없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Cambray 주교만큼 자만심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와츠-Watts 박사는 그 주교에게서 조금의 자만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마귀만큼이나 자만으로 가득 찬 존재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은 또 어떻습니까?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리는 욕망 말입니다. 증오는 어떠합니까? 그리고 질투도 있죠. 이들 또한 가시덤불을 삼키는 불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이 자신들에게 추악한 면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 으스대며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술취하지도 않고 살인자들을 꾸짖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 속에는 악의나 질투, 앙심, 그리고 자만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마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하시길…….

우리 자신도 가시덤불 속에서 머물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계실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사실입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웬만하면 같이 살기 어렵습니다. 피붙이들일지라도 한 지붕 아래서 별 탈 없이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혈과 육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곤 합니다. 웬만해선 다른 이들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수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고 진노하신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멸망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귀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난 결국 모든 걸 그만두게 될 거야."라고 말하게 만듭니다. "더 이상 교회 안 나갈 거야. 그냥 소파에 편안히 앉아서 쉬었으면 좋겠어." 오늘 이 밤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하나님!, 그들을 굽어살펴 주소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시덤불 속에 있을 때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적은 없습니다. 고난을 받는 그 시간이 영적으로는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인 것입니다.

저는 케닝턴 카먼(Kennington Commom)의 무어필즈(Moorfields)에서 썩은 계란과, 개와 고양이 따위를 집어던지는 사람들을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제 가운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아무리 털어도 더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 있을 때보다 더 평안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또 엑세터(Exeter)에서 설교를 했을 때는 돌에 맞아서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저에게 돌을 던진 젊은이는 돌을 던지자 마자 거의 동시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돌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의 설교에 실리는 영적인 힘이 몇 배가 배가되는 듯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면서 제 자신보다 저에게 돌을 던진 그 젊은이에게 신경이 더 갔습니다. 자꾸 측은하게 느껴지더군요. 이윽고 저는 그에게 다가섰고, 그러자 그도 저에게도 다가왔습니다. 제 이마에 피가 솟구치게 한 그 젊은이는 저에게 "선생님"이라고 하더군요. 그때의 상처는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뼈가 상하는 상처를 입었었습니다. 머리뼈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지금보다 더한 추위를 느끼게 된 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영적인 말씀으로 호소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혹은 침체기에 빠져서 기분이 엉망이 되거나, 너무도 나약해져서 힘을 북돋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일 지라도 상관 않겠습니다. 혹자는 어린애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설교해야 된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을 영 망쳐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겪고 있는 시험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 간에,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님, 가시덤불이 아무리 활활 불타오를지라도, 소멸되지는 않게 하여 주소서. 주여, 덤불이 타오를 때, 저로 하여금 낮게 깔려 타들어 가는 불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점점 더 높은 쪽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여 주소서. 주여, 이런 환난을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주여 이런 고통들을 허락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고 나면 다소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가장 큰 평안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었던 바로 그 곳에서 또다른 환난과 마주칠 것입니다.

그러면 또 기도하십시오. "사람들을 의지하던 손을 거두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실 줄 믿나이다. 주님은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니이다." 가시덤불은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낙원으로 대체되어 갑니다. 저 하늘에는 가시덤불을 태우는 불이 없습니다. 그저 불같은 사랑과 경이로움, 그리고 찬양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시험도 없습니다. 환난은 여기 이 땅이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여기 앉아 계시는 분 중에는 지금 속으로, "가시덤불이 아무리 활활 타오를 지라도 결코 소멸되지는 않으리라!"고 외치고 계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전 늘 그래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압니다. 아, 하나님, 여기 앉아 있는 이들이 모두 마음에 깊은 평안을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귀가 갑자기 시험을 할 때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소서.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한 줄 아십니까? 또 무슨 말을 할 것 같습니까? 제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을 늘어놓겠습니까? 여러분은 저에게 '불타는 가시덤불'에 무슨 또 다른 숨겨진 의미가 있나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렇죠? 왜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을 까요? 알려드리죠.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마귀로 불타고 있게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위선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눈의 정욕과 생의 자랑'으로 불타고 있단 말입니다.

롯이 자신의 사위들에게 한 충고를 귀담아 듣고 여러분은 어서 그런 상태를 벗어나십시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 타오르고 있으며, 고통만 줄 뿐 어느 것도 소멸시키지는 않습니다. 가시덤불 가운데서 말씀하신 그 천사가 선언하시길, 몇 백만이나 되는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이 땅에 내려와 완악한 자들에게 영원한 화형을 선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 저길 보십시오. 사색이 된 사람들! 제가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 줄 모르고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여, 이들을 혼이 다 빠질 정도로 놀라게 하여주소서! 여러분들이 지옥 이야길 듣고 깜짝 놀라서 나쁠 건 하나도 없습니다. 회심치 않은 자들이여, 부디 깜짝 놀라십시오, 경악하십시오! 가서 친구들에게 말하십시오. 어떤 미친 녀석이 말하길 회심치 않은 인간은 반드시 불타는 지옥으로 떨어질 거라고 외치더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은 불에 타고 있는 나뭇가지를 불구덩이에서 끌어내듯 그 완악함에서 구하여 주시길! 하나님을 송축하십시오. 그분은 언제나 은혜의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은 분명 “주께 받아들여 질 만한” 때 임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분명 "구원의 날"입니다. 보십시오, 영원한 언약의 천사가 여기에 내려와 계십니다. 영원히 송축 받으실 위로의 하나님이시여, 여기 회심치 않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마귀가 지핀 불로 타오르고 있는 가시덤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는 불타는 가시덤불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이 터져나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9-10)

여러분이 처하는 모든 어려움에 이 말씀이 적용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로를 여러분 모두에게 베풀어 주시길!
주님은 여러분이 죄에 빠져 잠들어 있다 하더라도 흔들어 깨우실 수 있으며,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이라 하더라도 탁 붙들어서 저 밑으로 곱드러지는 것들 막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 계신 분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http://thevine21.hompee.com/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