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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 개혁교의학

전상범목사(안산)

by 김경호 진실 2012. 5. 2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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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 개혁교의학 - 1장. 교의학 용어와 개념

 

 

종교개혁은 성경에 있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 위에 있는 것 외에 어떤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모든 신학적 도그마들이 귀착되는 원리는 ‘하나님이 가라사대’이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없고, 스스로 계시하지 않았거나, 친히 자신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교의학과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는 몰락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하나님의 지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있으려면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행위로 뿐만 아니라 언어로 계시해야 한다. 이 계시 안에 하나님의 지식이 객관적 의미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처럼 똑같이 그것은 신학 특별히 교의학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그의 말씀 안에서 계시하셨던 그 지식의 자국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신학과 교의학은 주님의 뜻 때문에 존재한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2장. 신학전반에 있어서 교의학의 위치

 

 

신학적 진리는 그 자신의 힘 곧 계시로부터 이끌어질 때, 자신을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를 통하여 존립하고 그 확립을 위해서 철학적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변증학은 교의학을 선행할 수 없고 선행해서도 안 되며, 도그마에 속하여 해답을 얻고 이 도그마를 모든 논쟁으로부터 보존하고 옹호하는 영광스러운 과업을 받는다.

 

 

교의학은 인간을 위한, 인간과 관계해서 그리고 인간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묘사요, 윤리학은 새 사람이 하나님의 행위의 근거 위에서 그리고 그것에 힘입어 지금 행하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교의학에서는 인간이 수동적이고 받으며 믿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학에서는 그 스스로 행위를 계속한다.

 

 

교의학은 하나님이 무엇이고,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으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의 창조자로, 구주로, 성화시키는 자로 알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개시키고, 윤리학은 인간이 지금 무엇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며, 인간이 전적으로 오성과 의지와 힘을 다하여 감사와 사랑으로부터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교의학은 하나님 지식의 체계요, 윤리학은 하나님 섬김의 체계이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3장. 교의학의 방법

 

 

도그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었던 것이지, 철학을 통하여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믿음의 규범이다.

 

 

성경은 충만한 모든 신적 진리, 즉 만세 전에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고 세계의 창조와 보존이 그 안에 기초하고 있으며 죄에도 불구하고 타락 후 지금도 세계 안에서 자신의 내적인 신적 능력을 통하여 현실화되고 있는 진리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교의학의 의무는 첫째로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지식의 마지막 물음을 묻는 것이 합리적이고 필연적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둘째로 기독교 신앙의 마지막 물음에 관련하여 어떤 지식이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가를 가리키며, 셋째로 신앙의 명제들은 공인된 과학적 결과들과 모순되지 않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 계시 안에서, 그것을 자세히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교회 안에서, 성경 안에서, 기독교가 기초로 두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기독교 교의학은 자신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교의학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이외에 다른 것에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은 교회의 합의로서, 교회 공동체의 신앙의 표현으로서 권위를 갖지만, 그들의 고백을 믿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근거에 의해서만이다.

 

 

교의학은 종교적 영역에서 무엇이 진리로서 타당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로서 타당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 즉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신조학은 교회의 고백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신학의 유일한 원리로서 성경론만이 순수히 종교개혁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이다.

 

 

교의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학자들의 사고하는 의식을 통하여 수용되고 묘사된 성경에 대한 진리이다.

 

 

성경론이란 객관적인 계시가 주관적인 조명 안에서 완성된다. 개혁주의 성경론은 성령의 증거론과 아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외적 말씀은 우리 밖에 있지만, 신앙을 통하여 내적 말씀이 된다. 성경을 주신 성령이 역시 신자들의 마음에 성경에 대한 증거를 주신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4장. 교의학의 구분

 

 

 

계시 곧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열매요 행위이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성경으로부터와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신약만이 아니라, 역시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 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의학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지식이다.

 

 

교의학 안에서는 항상 신자 즉 그리스도인은 말씀 위에 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추상적·철학적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자연신학을 통하여 계시신학에 이르지 않는다.

 

 

교의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 대로 하나님의 지식의 체계이다.

 

 

교의학은 결코 무미건조한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정론이요, 하나님의 모든 덕과 완전성에 대한 찬양이며, 열납과 감사의 노래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이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5장. 교의학 역사와 문헌

 

 

 

교황의 무오성이 성경과 전통의 무오성을 따돌리고 있다. 경쟁은 전자가 후자를 점점 더 궁지에 몰거나 혹은 후자를 천천히 이름만 남기게 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교황이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역시 어떤 것이 계시의 내용임을 결정한다.

 

 

예수가 참되게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고 부활하여 승천하지 않았다면, 동시에 그 근원적 복음에 내포하지 않았다면, 어떤 교회도 그것을 신적인 진리로 선포하고 인간의 양심에게 추천할 만한 자격이나 권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성령)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것, 역시 그의 진리의 지혜의 충만한 것이 교회 안에 거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으신다.

 

 

기독교는 인간적인 탐구와 성찰의 열매가 아니었고, 계시의 열매였다. 그 때문에 처음에 신앙이 요구되었다. 사람들은 구두와 기록으로 주어진 사도들의 교훈들을 가능한 한 수용하고 묘사하고자 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어서 교회를 통하여 거절되었지만, 변증가들은 그것들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정되었다. 전자(영지주의자들)는 다양한 철학들을 기독교에서도 받아들이는 어떤 종교적인 과정으로 생각하였고, 후자(변증가들)는 그것들을 인식하고 수용하였던 그리스도적인 종교가 옛부터 내려온 모든 진리들의 요소들을 자체 안에서 합병한 최고의 진리요 철학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옛부터 로고스(말씀)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고 이방인에게도 진리의 지식을 전하였으나, 그러나 특별히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셨다. 그 안에서 모든 옛 진리가 확증되었고 완성되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신성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되셨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였으나 성부와 성자를 동일시하였으며, 역시 성부고난주의에 이르렀다. … (이 견해와 주장은)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 디오니시우스, 유세비우스 등에 의해서 강하게 논박되었다.

 

 

313년 관용칙령(고대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이 교회에 평화와 안식을 선물하자, 곧 바로 신망과 명예가 뒤따랐다. … 그러나 외부로부터 오는 대적들이 극복되었을 때, 안으로부터 대적자들이 발생하였다. … 4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기간은 거의 전부 기독론적인 싸움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완전한 진리요 존재와 선과 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만이 인간과 그의 사유와 의지에 대한 안식이 있다. … 하나님은 영혼들의 태양이시다. 우리는 그의 빛 안에서와 그 빛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진리도 볼 수 없고 인지할 수 없다.

 

 

교의들이 단순하고 명제적인 형식으로 제시되는 실증신학과는 구별되게 스콜라 신학은 교의적인 자료가 어떤 과학적이고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따라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 스콜라 신학은 그것의 원리로서의 이 교의들로부터 출발하고, 그로부터 출발하여 추론을 통하여 교의들의 연합을 찾고자 하며, 더 깊이 계시된 진리에로 파고 들어가 모든 반론으로부터 그것들을 변호하고 있어서 매우 부진한 상태에 있었다. … 믿음이 스콜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사람들은 교의적 자료를 성경과 전통에서 찾았고,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였다. 그것에 있어서 종종 많은 것이 정당하게 성경으로부터 기원하지 않았다.

 

 

칸트가 순수이성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통하여 교의학의 합리적 기초를 전적으로 깎아내린 첫 사람이었다. … 순수이성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것을 실천이성을 통하여 회복하려고 하였다. 무조건적 명령, 도덕적 의식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 자유, 불멸성을 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주었다. 교의학은 도덕에 기초하게 되었고, 종교는 덕을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비상수단이 되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서 종교는 감정이다. … 하나님은 그에게 세계의 통일성이지, 사고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고는 항상 모순대당(矛盾對當, 한쪽이 참이면 다른 쪽은 반드시 거짓이고, 한쪽이 거짓일 때 다른 쪽은 반드시 참인 관계) 속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만 감정 안에서 향유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향유하는 것이 종교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은 신론적으로 생각하고, 반면 루터주의 그리스도인은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는 역사 안에 서서 머물지 아니하고 이념 즉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까지 끌어 올라간다는 것이요, 루터주의자는 그 입장들을 구원사의 중심에서 취하고 더 깊이 하나님의 성정에까지 꿰뚫고 들어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의 경우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고, 루터주의자들의 경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이고 항상 출발하는 조항이다. 전자의 경우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에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후자의 경우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에 있다.

 

 

개혁주의자는 그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物)의 원인을 추적하여 앞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반면에, 루터주의자는 현상에 만족하고 그가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는 자들이다.

 

 

개혁주의 교의학의 역사는 루터주의 교의학 역사보다 묘사하기가 아주 어렵다. 개혁주의 교회는 어느 한 지역 한 민족에 제한되지 않고, 다양한 땅에서 다양한 민족들 아래 퍼져왔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형(形)은 하나의 신앙고백 안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신앙고백들에서 표현되었다.

 

 

칼빈은 모든 철학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이념들을 청산하고 가능한 한 엄밀하게 성경과 결합시켰다. 무엇보다도 그가 기꺼이 주장한 것은 그리스도적인 종교의 객관성,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경, 교회와 성례에 관한 객관성을 주장하였고, 따라서 강하게 재세례파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 그의 사상에 통일성과 체계를 이룩하였는데, 루터나 쯔빙글 리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칼빈과 불링거의 신학 사이에는 단 하나도 사실적인 차이는 없고, 다만 형식적이고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차이요, 엄밀한 신학적 출발과 언약론적인 출발 사이의 차이이다.

 

 

미국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진지한 위기에 들어선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과 무능력, 제한된 구속, 선택과 유기,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의들은 은밀히 부정되거나 역시 공공연히 거절되고 있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6장. 근본원리의 의미

 

 

트뢸치가 종교철학을 교의학의 기초로 두려고 했을 때, 이것은 그럴 것 같다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결코 기독교 교의학을 제시 못하는 것이다. 처음 교의학의 기초를 놓아야 하고 그것의 권리를 옹호해야 하는 철학적 원리론을 위한 자리가 참으로 없다. …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르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의 계시로부터 우리에게 이르고, 우리가 우리 편에서 신실하고 어린애와 같은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이 계시의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가리키고 있다. 다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왕국을 본다.

 

 

계시가 하나님의 지식의 유일한 샘이고 영적 인간은 다만 영적인 것들을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다는 교리는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도그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하나님의 지식도 가능하지 않다(마 11:2; 고전 2:10 이하).

 

 

우리가 유일한 의미에서 배워 알 수 있도록 그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현현과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주셔야 한다.

 

 

그는 절대적 의미에서 본질적인 원리요, 우리의 신지식의 근원적 요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자의식적이고 참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자의식 없이는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없다. 범신론은 신학의 죽음이다. … 우리의 신지식의 본질적인 원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계시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의 지식은 오직 그의 계시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내린다. … 계시는 다만 그의 나타남이요, 말씀이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인식 원리는 그의 피조물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거나 자기 전달이다.

 

 

신학의 목적은 이성적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잠 16:4; 롬 11:36; 고전 8:6; 골 3:17)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목적은 그의 지식을 인간 밖에서 영광과 영예를 돌리는 것이다. … 그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 밖에서, 인간 앞에서, 인간과 더불어 종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이다.

 

 

내적인 말씀이 원리적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식을 인간 안에 가져오기 때문이요, 그것이 모든 신학의 목적이며, 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 원리를 알도록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신학의 본질 원리로서 하나님이, 그 다음이 그것이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이상 기구적이고 시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곧 외적 인식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내적인 인식 원리인 하나님의 영을 통한 사람의 조명이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7장. 학문 안에서의 근본원리

 

 

어떤 시대든 서로 정반대에 있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는 두 경향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그리스 철학(그리스 철학은 일반적으로 같은 것은 같은 것을 통하여서만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에서 일어났었다.

 

 

과학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고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 과학은 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물(物)의 본질에 관한 지식이다.

 

 

우리는 본성으로부터 실재주의자들이고, 관념론자 자신들도 실천에 있어서는 실재주의자들이다. 사실 관념론은 삶과 경험과 직접 충돌하고 있는 탁상학문의 사실이요 견해이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우리 손으로 준비하지만, 그 재료는 우리 밖의 자연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는 지성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자료를 받는다.

 

 

합리주의는 객관적인 세계를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따르도록 할지라도, 경험주의는 의식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우리 밖의 세계에 종속시키고 있다.

 

 

사물의 원인과 목적, 근원과 결정은 우리 밖에서 얻게 된다. 사물들의 상호관계, 연속과 유사의 매우 귀중한 관계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다.

 

 

과학의 목적은 사람들이 세계 해명을 준다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그것에 따라 우리의 생을 구축할 수 있고 거기에서 실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현실성에 대한 많은 지식을 향하여 스스로 연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의 원인과 본질, 그들의 목적과 종국을 통찰할 때, 우리가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왜를 알고 사물의 원인들을 분별할 때, 비로소 과학이 존재한다.

 

 

인간은 오성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고자 하고 느끼는 존재들이다. 그는 결코 사고 기계가 아니라, 그의 머리에 역시 마음, 지각들과 감정들의 세계들을 갖는다.

 

 

인식론의 출발점은 습관적이고 일상적 경험, 곧 그의 지식의 객관성과 진리와 관련하여 인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확실성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지력과 지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금 해명하고자 노력한다.

 

 

터툴리안이 바르게 말한 대로 철학자나 시인보다 인간이 선행한다. 첫째는 사는 것이고, 그 다음이 철학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확실성이 과학의 절대 필요한 기초이다.

 

 

지식 능력에 대한 이론의 차이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차이는 다음 두 가지 안에 있다. 첫째로 고유한 지성에 대한 독특한 견해에 있고, 둘째로 이런 지성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하면서도 지각된 것으로부터 논리적인 것 즉 본성으로부터 물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추론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행하지 않는다. 합리주의는 스스로 지향하는 것이 참된 것으로 사물들을 강요하고,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형식들 속에서 그들을 압박하거나 거기에 적응을 압박하며, 세계를 몇 가지 개념들에 따라 구성하고 있다. 경험주의는 스스로 지각적 세계를 향하도록 영혼을 강요하고, 상상적인 비상(飛翔)에는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그 자신을 소여로부터 설명한다.

 

 

인간에 있어서 모든 지식의 출발점은 감각적인 지각이다. 이성은 지각을 통하지 않고 외부적인 존재를 알지 못한다. 모든 지성적인 인식은 지각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지성은 표상들 없이는 아무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직관은 모든 엄밀한 과학의 원천이다.

 

 

과학적 지식은 지각 기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영혼들의 태양이라는 이런 그림을 전용하였다. … 태양이 그 빛을 분산하지 않으면 우리가 육체적 눈을 가지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지식의 태양인 하나님의 빛 밖에서 결코 진리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그로부터,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비추고 그 앞에 만물을 이해할 수 있게 조명하는 이해의 빛이시다.

 

 

그의 신적 의식으로부터 진리의 지식을 피조물들을 통하여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8장. 종교에서의 근본원리

 

 

종교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길 것을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고 명백히 하였던 방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우선에 있는 것이 그의 율법의 첫째 돌판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유지하시는 의무다.

 

 

주관적 종교(섬김, 경배 / 성령으로부터 부어진 덕)는 무엇보다도 객관적 종교(하나님의 계시)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행동으로 옮겨진 인간 안에 있는 확실한 소양(素養)이다. 그러한 소양은 모든 인간 안에 있다. 종교의 씨가 모든 이들 안에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소양은 타락한 인간 안에 부패되고 참되지 않고 불확실한 객관적 종교로 말미암아 수태되어 역시 우상숭배인 하나의 예식을 낳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일 뿐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피조물이다. … 인간이 하나님과의 서 있는 완전한 의존성은 자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믿음 안에는 다음 두 가지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다. 즉,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해서 전적으로 수용적이고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것, 둘째로 그가 바로 이런 의존의 인식을 통하여 은총으로부터 용서와 양자됨과 축복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 있는 이런 주관적 종교의 유사성이 다른 종교 안에도 확실히 존재하지만, 인간과 하나님의 주관적 관계는 다만 기독교 안에서만 완전히 정상적이다.

 

 

죄를 통하여 부패된 주관적 종교, 종교의 소양으로부터 중생은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몇 가지 계명들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따라 완전하게 살도록 진실된 기쁨을 받는데 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양식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공로로부터 돌이켜 다시 그의 본질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의 뜻이나 객관적인 종교가 그 안에 기록된 율법과 일치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를 중생시킨다.

 

 

참된 종교는 한편으로 창조주로서 구주로서 성결케 하는 분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그 절대적 의존성의 깊은 의미에서 뿌리를 박고 있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모든 규정에 따라 정직함 가운데 행하며 나아가는 그런 인간의 성향 안에 존재한다.

 

 

계시 없는 종교는 없다. 성경도 역시 주관적 종교를 계시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다(히 1:1).

 

 

인간은 그가 알지 못하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만 무관심하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무관심할 것이 없다.

 

 

과학을 통하여 그는 그의 종교적인 욕구를 결코 만족시키지 못한다. 과학이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어떻다는 것에 불과하다. 오직 종교를 통하여 그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고, 그의 성부라는 사실을 안다. 과학은 그에게 죄란 것이 있고, 은총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를 통해서만 그는 용서의 축복과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과학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주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에 불과하며, 구원의 유업에 대한 인격적인 참여를 주는 것이 아니다. 구원적 축복은 지식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과 결합되어 있다. … 참으로 과학은 하나님이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심리적인 방법이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지 않고, 외부로부터 자연의 확실한 결합을 통하여 자연의 영향 하에 종교를 발생케 하는 인간의 요소들로부터 종교가 설명된다는 것이다. … 심리학적인 방법은 사실 하나님의 존재 없이 종교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 종교의 본질과 근원은 역사적 방법과 심리적 방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 거기에서는 그것의 정당성과 가치가 주장될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종교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종교는 그 본질과 근원에 있어서 계시의 산물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한다. … 계시는 종교의 외적 인식원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합리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 섬겨지기를 원하실 때 종교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과 행위 속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있다. 그것이 외적인 인식원리이다. 그리고,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그에게 주관적으로 자격을 갖추게 한 것이 바로 내적 인식원리이다.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것 밖에서 종교는 없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9장. 계시의 본질과 개념

 

 

종교 속에서 인간은 항상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 종교에서 가장 큰 물음은 항상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이다. 인간은 종교 속에서 어떤 관능이나 쾌락, 어떤 과학이나 예술, 어떤 인간이나 천사, 전세계라도 그에게 선물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고 있다.

 

교의학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종교적 표상들은 세 가지 중심점을 중심으로 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에 관한 교리, 그리고 두 가지 의미에서 즉 그 관계가 사실적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존재해야 한다는 것, 경험적 의미와 관념적 의미에서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과 보존을 위한 수단들에 대한 교리를 포함한다. 따라서 신학은 인간론과 구원론을 총괄하고 있다.

 

계시에 대한 이신론의 위험은 … 첫째로 계시로서 행사하였던 어떤 것이 권리와 진리에 따라 이것을 행하였는지를 조사하고 결성할 수 있는 권리를 계시 밖에 독립적인 자리를 얻었던 이성에게 부여하였다. 둘째로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점점 더 이성이 얻었다. 왜냐하면 계시는 이성과 충동할 수 없고 이성 안에 원리적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있고, 따라서 역시 이성을 통하여 판단될 수 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 셋째로 계시는, 현실적으로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한, 곧 바로 어떤 것으로 즉 더 많은 권위를 가지고 그리고 넓은 영역에서 이성이 스스로에게 맡겨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더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수단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그와 같은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신론과 현대 유신론은 똑같이 어떤 일반적인 계시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진지함을 보이나, 그것은 그의 입지를 유지할 수 없고 전진하거나 후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격적이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분은 결코 의식 없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항상 생각하여 행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때 계시는 결코 무의식적인 감화력이나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부지불식간의 하나님의 반투영이 아니라, 항상 자유롭고 도덕적이며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양한 태도들에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시는 방식들과 형식들도 다양할 수 있다.

 

계시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 개념이다. 과학은 계시가 무엇이고 그것에 어떤 사실이 대응하고 있는지를 미리 말할 수 없다. 그때 그것은 월권을 행사할 것이고, 종교에 대항하여 가장 큰 편파성에 책임이 있게 된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10장. 일반계시

 

 

종교개혁자들은 자연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가정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의 총명에 있어서 그렇게 부패되어 역시 이런 계시를 정당하게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가지는 필연적이다. 즉, 하나님께서 본래적으로 자연으로부터 인식할 수 있는 진리들을 다시 역시 특별 계시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필연적이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자연 속에서 관찰하기 위해서 처음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조명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모든 계시는 근원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것이다. …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사역은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창조가 하나님의 첫 계시오, 모든 충만한 계시의 시작이요 기초이다. 계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창조의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 자연 속에도 없고, 은혜 속에도 없다. 하나님은 항상 피조물로부터 취하여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수단을 사용하신다. 표적과 싱징들을 통하여 주께서 그의 덕들을 선포한다. 말과 언어를 통하여 주께서 그들에게 그의 뜻과 사상을 알리신다. 주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의식 속에 계시하실 때조차도, 항상 이 계시는 유기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간접적인 수단에 따라 일어난다. … 모든 계시는 신인동형주의요, 하나님의 어떤 방식의 인간화이다.

 

주는 민족들과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주님은 역시 각 사람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일반계시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에게 불충분하다. … 일반계시가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은 미미하고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계속 오류로 혼합되었고 단연 대부분 인간이 도달할 수 없다. … 자연 계시의 불완전성이 어떤 단 하나의 민족도 소위 자연종교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명백히 나타났다.

 

기독교는 참된 종교이고, 그 때문에 역시 가장 높고 순수한 종교이며, 그것이 모든 종교들의 진리이다.

 

아무도 일반계시의 힘을 피할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이 본질에 속해 있다. … 일반 계시는 특별 계시가 그 위에 올려지는 기초이다. … 일반 계시의 풍부한 의미는 그것이 자연과 은혜, 창조와 재창조, 현실성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서로 깨뜨릴 수 없는 결합을 유지시킨다는 것에 나타나고 있다. 일반 계시 없이는 특별 계시는 전우주적인 존재와 생명과의 결합을 잃는다. 그 때 자연의 왕국과 하늘의 왕국은 서로 결합하는 고리를 상실한다.

 

일반 계시가 자연과 은혜, 세상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 창조와 재창조, 물질세계와 윤리, 덕과 행복, 성화와 축복의 통일성,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보존한다. 일반 계시에서 어떤 이에게도 빈틈없이 행하시고, 특별 계시에서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인식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요, 같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서로 함께 역사한다. … 자연이 은혜에 선행하고, 은혜가 자연을 완성한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 11장. 특별계시

 

 

성경은 특별 계시의 책이다.

 

“계시”는 어떤 것이 감추어지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고, “현현”은 사실 자체가 계시되게 하는 것이다. “현현”은 항상 객관적인 계시에 대하여, “계시”는 객관적인 계시와 주관적인 계시 모두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말씀들을 통하여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들을 통하여 계시하신다. 말씀과 행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행위요(시 33:9), 그의 행위가 말씀이다(시 19:2; 29:3; 사 28:26).

 

표적이나 이적은 그 자체로서 어떤 예언의 징표를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적들을 행하는 분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뿐이다. … 역사 안에 나타난 이적들은 무신론자들에게 진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과 치유를 행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의 말씀의 진리와 역시 그들의 증거에 대한 신앙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그(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성취,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적 행위이다. … 이런 구원의 사실들은 어떤 것을 계시하기 위한 수단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이다. …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하나님의 중심적 계시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도록 하는 계시는 … 역사적이고 유기적인 전체요, 하나님의 증거들과 행위들의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를 새롭게 하는 체계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영화롭게 하여야 하는 것이 항상 계시의 목적이다. … 계시의 목적은 인간을 가르치고 그의 오성을 조명할 뿐만 아니라(합리주의), 그에게 덕들을 실천하도록 하고(도덕주의), 그 안에서 종교적 감정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특별 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그의 타락한 피조물에 얼마나 깊이 비하(卑下)하실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특별 계시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의 찾으심이요, 인간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그 모든 영역에 빛을 비추는 특별 계시의 중심적인 사실이다. 이미 창조 시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실 때 친히 인간으로 자신을 닮게 하셨다. 그러나, 재창조 시 그 분은 인간이 되셨고, 전적으로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상태로 들어오셨다.

 

죄가 모든 것을 즉 오성과 의지, 윤리적, 물질적인 세계를 부패시켰고 황폐케 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게 중요한 것은 전인류와 전우주의 구원과 회복인 것이다.

 

특별 계시의 새로운 구성적인 요소들이 지금은 더 이상 첨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계시고, 그의 사역은 성취되었으며,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계시는 말씀과 행위를 포함할지라도, 성령의 활동은 인간의 의식과 존재에로 향하도록 해야 하고, 따라서 동시에 오성의 조명과 마음의 새롭게 함에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계시는 전인의 재창조에 목적을 두고, 따라서 전인간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전유(全癒, 온전히 낫다)되어야 한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의 수단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특별히 전능과 지혜, 진노와 선에 대한 그의 은택들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알리게 하시는 것인데,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의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되, 그렇지 않고 그것이 없어도 죄 없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식되고 자유로운 행위이시다. … 특별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어 있는 특별한 수단들(신현, 예언과 이적)의 전체 역사의 길에서 특별히 의와 은혜의 그의 은택들 안에서, 율법과 복음의 선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이런 특별 계시의 빛 아래 사는, 이 같은 인간에게 알리게 하시는 것인데,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함이되, 회심하지 않을 경우에 무거운 심판을 받는 하나님의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일반 계시를 통하여 계속 모든 인간들에게 알리시는 것처럼, 역시 성경을 통하여 매일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계시하시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객관적이고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다. 그의 재림에서 인류의 역사에 그 영향은 끝마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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