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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11 (호라티우스 보나르)

호라티우스 보나르

by 김경호 진실 2012. 7. 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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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친 진리를 주의하십시오

한층 더 위험하고 공공연한 오류에 빠지게 하기 쉬운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컨대 성경이 말하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나 육과 영에 대하여 오해함으로써, 당신의 언행에 대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날마다 우리의 전 인격이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필요성과 사는 동안 항상 우리의 전 존재가 필요로 하는 성령님의 능력에 대한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우리 주님과 사도들은 거듭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유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이 변화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개인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라."(골 1:27),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갈 2:20), "믿음으로 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 등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안에 거하시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또는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게 만들거나, 그 피와 성령님에 대한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거하시며, 당신의 모든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므로, 무엇을 하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한편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5:17; 고전 1:30).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마치 물이 그릇에 담기듯이 우리 곧 우리의 전 인격인 몸과 혼과 영이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놓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본래의 뜻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를 죄가 없다고 하거나 그리스도를 우리 죄의 근원이요 모든 행동의 실행자로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아주 놀라운 밀접성과 살아 있는 연결성이 있어서, 우리가 그분의 능력과 충만함을 받는 것을 뜻할 뿐, 우리와 그리스도가 더 이상 두 인격이 아닌 한 인격이라거나 더 이상 두 몸이 아닌 한 몸이라거나 더 이상 두 혼이 아닌 한 혼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마음을 또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며, 너희 육신에서 돌로 된 마음을 제거하고 살로 된 마음을 주리라." 하십니다(겔 36:36. 아래의 설명을 이해하도록 원문이 인용한 킹제임스성경을 직역함).
이것은 화강암이나 대리석 같은 실제 "돌"을 우리에게서 꺼내고 하늘에서 창조된 실제 살점을 대신 집어넣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옛 본성 "전체"가 일시에 우리에게서 제거되어 조금도 남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본성으로 대치됨으로써, 우리 안에 이제는 완전하고 신적인 것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면, 모든 회심은 즉각적인 완전함에 이르게 하여, 옛 본성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으며, 새로운 본성은 불완전하거나 미숙한 것이 전혀 없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갈등과 어려움과 퇴보와 "타락의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비유되는 그 변화가 매우 큰 것임은 확실할지라도,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거나 사람을 천사로 변형시키는 변화일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그분의 말씀을 문자대로 받아들여 이 신적인 상징이 의미하는 전체적인 뜻을 왜곡하였습니다.
오늘날, 회심할 때에 실제 문자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우리 속에 떨어지며 이것이 새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니고데모가
"두 번째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고 말한바와 똑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새 "인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회심하면 니고데모가 더 이상 니고데모가 아니라거나 베드로가 더 이상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그들을 여전히 본래의 고유한 개성이나 인간성을 그대로 간직한 니고데모나 베드로로 남겨둔 채, 영적인 활동이 일어나 그들의 영적인 본성과 성격을 전체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한 부분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변화는 처음에는 완전하지 않을 수 있으나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한 부분은 거듭나고 다른 부분은 거듭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직 "나는 거듭났다."고 말하여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은 마치 새 포도주를 옛 그릇에 담듯이 새로운 피조물을 사람 속에 집어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인격이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가 거듭 난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비유는 변화가 "처음부터" 완전하게 완성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으며, 그 변화가 언젠가는 이렇게 상징되는 모든 것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합니다.
육과 영이나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나 바울을 예로 들면 육도 그 사람으로 그의 이전 자아가 남아 있으며, 영도 같은 사람 곧 베드로나 바울로서 그 사람 속에서 스스로 새 생명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비유는 두 사람 곧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말씀을 육신적이거나 극단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 2:19, 20).
사도는 여기에서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나 자신이 죽었다"고 말하며, "나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지 않고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같은 인격(곧 나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는 "나의 한 부분이 죽었고 다른 부분은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고,
"나 자신이 죽었고, 나 자신이 살아 있으니, 같은 인격인 내가 죽어 있기도 하고 살아 있기도 한 사람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두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의 두 부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사도가 로마서 제 7 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더니 --나는 죽었도다. ---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도다. --- 내가 행하는 그것을 내가 인정치 아니하고 -- 내가 원하는 그것을 내가 행하지 아니함이라. --- 내가 미워하는 그것을 행하면 -- 내 속에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느니라. --- 원함은 내게 있으나 어떻게 행할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 ---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 이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또 하나의 법을 보는도다. ---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와 같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상한 일들을 말하는 사람은 바울 자신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불완전한 부분을 대항하여 바울의 완전한 부분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을 대항하여 바울 자신이 싸우는 것입니다.
한 사람 바울, 하나의 인격이 자신 안에 서로 승리하기 위하여 싸우는 두 개의 갈등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고후 4:16).
이와 같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과정이 자신 속에서 계속됩니다.
빛과 어두움이 서로 싸우지만 빛이 정복하여 더욱더 밝게 비추어 완전해지는 날에 이릅니다.
 
특히 그리스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있어서 이와 같은 치우침을 주의하십시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인격의 모든 부분 및 모든 양상과 연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 곧 요람부터 왕좌까지, 베들레헴부터 하늘들의 하늘까지 연결합니다.
그분의 나심과 그분의 삶과 그분의 죽음과 그분의 장사와 그분의 부활과 그분의 승천과 영광을 연결합니다.
이 모든 것에서 생명과 힘을 이끌어 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 이것이 믿음의 유산입니다.
죽음 곧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못 박히신 그 십자가의 죽음에서부터 생명과 능력이 나와 우리에게 이릅니다.
또 약속된 그 성령의 소유자요 분배자이신 그분께서 지금 앉아 계신 그 왕좌로부터 이와 같은 복들이 내려옵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 영광의 왕좌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령님을 그 모든 선물들과 함께 받으신 것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자격으로 하신 것입니다(시 68:18; 엡 4:7-13).
우리가 복과 능력과 생명과 위로를 위하여 믿음으로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입니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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