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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4 (토마스 왓슨)

토마스 왓슨

by 김경호 진실 2012. 9. 10. 09:04

본문

제 4장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본문의 다음 부분을 살피자. 이 특권에 관계있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자는 이 특권에 몫이 없다. 그것은 자녀의 떡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속한다. 사랑이 신앙의 핵심이며 정신이므로, 나는 이 점을 좀 더 충분히 다루려 한다. 그리고 이것을 자세히 논의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다음의 다섯 가지 일을 살피자.

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본질
사랑은 영혼이 탁 트이는 것, 즉 성정이 불타오르는 것인데,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최고로 탁월한 선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숨 쉰다. 사랑과 영혼의 관계는 추와 시계의 관계와 같다. 사랑은 하늘로 날아가게 하는 날개와 같아서,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로 움직이게 한다. 바늘이 자석에 붙듯이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님께 매달린다.

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근거
사랑, 그것은 지식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으려면 그분 안에 있는 이 세 가지 일을 알아야 한다.
1) 충만하심 (골 1:19)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실 만큼 은혜가 충만하시고 우리에게 관을 씌우실 만큼 영광이 충만하시다. 그것은 충분할 뿐만 아니라 남아도는 충만함이다. 그분은 바닥과 제방이 없는 선의 바다이시다.
2)거저 베푸심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내적 경향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값없이 자비와 은혜를 내리신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갖고 오라고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단지 소원을 갖고 오라고 요구하신다.
3) 우리의 것이 됨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함이 우리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시 48:14) 여기에, 즉 하나님의 신성과 우리가 그분께 갖고 있는 이해관계에 사랑의 근거가 있다.

3. 사랑의 종류
이 점에 관하여 세 가지로 나누어 살피도록 하겠다.
1)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사랑
우리는 지극히 숭고하고 무한한 선이 되신 하나님을 자주 귀하게 여길 때, 마치 우리가 그분을 소유한 양 하나님을 지극히 존중하므로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해가 뜨면 별은 사라진다. 의의 태양이 충만한 광채로 비췰 때 모든 피조물은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진다.
2) 만족과 기쁨의 사랑
사람이 사랑하는 친구를 즐거워하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자기의 보화를 즐거워하듯 그분을 즐거워하며 자기의 중심을 믿듯 그분을 믿는다. 마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여 있으므로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며 족하겠나이다.”(요 14:8)
3) 호의적인 사랑-하나님의 대의명분을 소원하는 것
친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온전히 행복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남이 잘되기를 바랄 때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이익이 많아지길 바란다. 우리기 지지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며 그 힘의 지팡이인 그분의 복음이 아론의 지팡이처럼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4. 사랑의 속성
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총체적이어야 하며, 온 마음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옛 율법에서 대제사장은 과부나 창녀와 혼인해서는 안 되었다. 과부와 혼인하면 안 되는 것은 그가 그 여인의 첫사랑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었으며, 창녀와 혼인하면 안 되는 것은 그가 그 여인의 모든 사랑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온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호 10:2). 참된 어머니는 아이를 쪼개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 마음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마음의 방 하나만 제공하고 다른 방은 죄에게 내어 주는 집에 거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마땅히 완전한 사랑이어야 한다.
2)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한글 개역에는 ‘변함없이’로 되어 있음)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진실한 사랑, 이는 아주 순수한 꿀을 암시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순수하고 이기심이 없을 때 진실하다. 이는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는 친구지간의 사랑이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달콤한 포도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 맛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끄는 두 개의 자석이다. 알렉산더에게는 헤페스티온과 크라테루스 라는 두 친구가 있었다. 그는 둘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헤페스티온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알렉산더이기 때문이며, 크라테루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알렉산더 왕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알렉산더의 인격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은 그가 베푸는 것들을 사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곡식과 포도주를 주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하나님의 본질적 탁월함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 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참된 사랑은 돈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아이를 사랑하라는 조건으로 돈을 쥐어 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영혼은 상급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빛나는 아름다운 광채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3)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뜨거운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뜨거운 애정을 뜻한다. 성도는 거룩한 사랑에 불타는 스랍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차갑게 사랑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해는 최대한 뜨겁게 빛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매우 격력하고 뜨거운 로뎀나무 숯불(시 120:4)처럼 강렬하고 열렬해야 한다. 일시적인 사물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무덤덤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고전 7:30)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활활 타올라야 한다. 신부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앓아누워야 한다. (아 2:5)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원칙대로 벌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스 9:13),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충분치 못하다.
4)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이 사랑은 매우 활동적인 원소인 불과 같다. 이는 사랑의 수고(살전 1:3)라고 일컬어진다. 사랑은 게으른 덕목이 아니다. 그 머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연구하는 데, 그 발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리는 데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 5:14) 사랑의 흉내로는 충분치 못하다. 참된 사랑은 혀끝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라 손끝에서도 보인다. 이는 사랑의 수고이다. 에스겔 1:8에 언급되어 있는 생물은 날개가 있는데 이는 선한 그리스도인의 상징이다. 그는 믿음의 날개를 갖고서 날뿐만 아니라 날개 아래에 손이 있다. 그는 사랑으로 역사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쓰고 쓰임 받는다.
5) 사랑은 관대하다.
사랑은 베푸는 표시를 갖고 있다 (고전 13:3). 자선은 친절한 행위이다. 사랑은 부드러운 입뿐만 아니라 친절한 마음도 갖고 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붙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려 했다.(삼하 24:24) 사랑은 자비심뿐만 아니라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을 넓게 하는 사랑은 손을 오므리게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 지체에게도 관대하다. 그는 눈먼 자의 눈이 되고 절름발이의 발이 되어 준다. 가난한 자의 등과 배는 밭고랑이 되어 관대함의 황금 씨앗이 거기 뿌려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한편 손 마른 것이어서 선한 일에 도무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참으로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사랑은 미워하신다. 사랑은 새 포도주와 같아서 새어 나갈 것이다. 사랑은 선행으로 새어 나간다. 사도는 마게도냐인들의 존귀한일로 이 점을 말한다. 그들은 가난한 성도에게 베풀 때, 힘껏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했다. (고후 8:3) 사랑은 궁정에서 자란 것이어서 고귀하며 아낌없이 베푸는 덕목이다.
6)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독특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사랑을 하나님께 바친다. 하나님이 불의한 자에게 주지 않는 그런 사랑(선택하고 양자 삼으시는 사랑)을 자녀에게 주시는 것처럼, 덕스러운 마음은 다른 이가 공유할 수 없는 특별히 구별되는 사랑을 하나님께 드린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한 남편의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 사랑을 남편에게 준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아내 된 성도는 특별한 사랑을 그리스도께 드린다. 이 사랑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사랑이며, 경배와 결합된 사랑이다.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뿐만 아니라 영혼도 드린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아 4:12).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동산이다. 거기서 자라는 꽃은 거룩한 예배와 결부된 사랑이며, 이 꽃은 그리스도께서만 쓰실 것이다. 신부는 동산의 열쇠를 간직하여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거기 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7)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영원하다.
이는 신녀(神女, vestal virgin)가 로마에서 간직했던 불과 같다. 그것은 꺼지지 않는다. 참된 사랑은 끓어오르지 사르라들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위선 없이 진실하며, 배도 없이 항구적이다. 사랑은 몸의 맥박과 같아서 언제나 뛴다. 이것은 굳은 땅이 아니라 솟구치는 샘물이다. 불의한 자가 죄를 늘 사랑하여 수치나 병이나 지옥의 두려움이 그들로 죄를 포기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랑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어려움이나 반대도 사랑을 정복할 수 없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아 8:6). 무덤은 아무리 강한 자도 삼킨다. 그처럼 사랑은 아무리 강한 곤경도 삼킨다.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아 8:7). 쾌락의 달콤한 물도 핍박의 비통한 물도 꺼치지 못한다.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 (엡 3:17) 겨와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은 쉽게 날려 달아나지만 깊이 뿌리박은 나무는 폭풍우를 견딘다.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은 사람은 인내한다. 참된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고 결국 생명에 이른다.

5. 사랑의 정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 73:25)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 가운데 정수이시다. 그분은 더할 나위 없이 선하시다.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탁월함을 보고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탁월함에 감탄하는 영혼은 최고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베르나르두스가 말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의 최고 행복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애정 가운데 으뜸 대상이어야 한다. 피조물에게는 우리의 사랑의 우유를 먹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유지(乳脂)를 드려야 한다. 기름이 물에 떠 있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친족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경우처럼 말이다. 이삭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를 전적으로 사랑하고 애지중지했다. 하나님이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고 신앙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삭에게서 메시아가 나오실 것인데 이삭이 죽으면 세상은 어디서 중보자를 얻겠는가!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지극하여, 이삭의 피를 흘리려고 제사의 칼을 쥐려 한다. 우리의 복된 구주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할 것을 말씀하신다.(눅 14:26)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상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족이 우리를 방해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들을 지나치거나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신 33:9) 사랑의 몇몇 물방울이 우리의 친족과 인척에게 떨어지겠지만, 전체 강물은 그리스도께로 흘러야 한다. 가슴에 친족이 누울 수 있지만, 심장에는 그리스도가 누우셔야 한다.
우리는 재산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히 10:34)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잃더라도 즐거워했다. 만일 세상을 우리의 저울에 놓고 다른 편에 그리스도를 놓으면, 그리스도께서 가장 무거우셔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의 애정이라는 집에서 가장 귀한 방을 차지하시는가? 플루타르크가 로마에서 독재자가 생겼을 때, 다른 모든 권위는 잠시 정지 상태였다“고 말하듯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을 지배할 때 다른 모든 사랑은 정지되며 이 사랑에 비할 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적용.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매서운 질책
이는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수놓지 않는 자들을 매섭게 질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악한 자가 살아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간의 머리를 한 금수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당신은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가? 만일 계속 돈을 대고 용돈을 전담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야만인보다 못한 게 아닌가? 하나님이 그와 같은 친구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호흡을 주시며 생계 수단을 베푸시는데,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군주가 당신의 생명을 구원하면 그를 사랑할 것인데도,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그 어떤 자석이 복되신 하나님처럼 사랑을 강력하게 끌어당기겠는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 사람은 눈먼 사람이다. 사랑의 끈으로 끌려오지 않는 자는 구두쇠다. 몸이 차갑고 온기가 없는 것은 죽음의 표시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열기가 영혼에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하나님께 사랑을 보이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께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하는 악의와 원한의 독을 내뿜는 그런 독사를 품에 두시겠는가?
이 질책은 이 시대의 불신자에게 강하게 떨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너무도 멀어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밖에 나타내지 못한다.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다”(사 3:9). 교만하고 참람하게 “저희 입은 하늘을 대적하고” (시 73:9, 한글 개역에는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로 됨),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도전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들은 본성상 괴수이며 인간의 탈을 쓴 마귀이다. 그들에게 그 운명을 읽어 주라.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즉 그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임하실 때까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지어다. 사는 동안 저주의 후사가 되며 주의 두려운 날에 “저주 받을 자들아……떠나라”(마 25:41) 하고 마음을 찢는 선고를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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