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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주의와 성령 (서문강 목사)

서문강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9. 1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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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와 성령 (서문강 목사)


 

서 론

 

작금 흔히 '성령'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진영은 오순절과 또는 은사주의 더 나아가 신흥 신비주의 계통이라는 의식이 보편화 되어 있는 추세이다. 아니 그런 계통에 속한 이들은 생각하기를, '우리야 말로 성령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는 묘한 자부심을 표출하기 십상이다. 반면에 소위 개혁주의 계통에서는 성령에 관하여 드물게 말하거나, 아니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상례라는 의식이 그에 못지않게 퍼져 있다. 아니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는 사람들 중에는, 진정한 개혁주의자가 되려면 성령에 대하여는 교리적인 틀 안에서 '립 서비스'하는 정도여야 한다는 인상을 풍기는 자들도 있어 보인다. 그런 일이 '성령의 역사를 전유한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이들로 하여금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을 얕보게 하는데 일조하기도 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그런 영적인 환경을 정면으로 대응하며 물어야 한다. '진정 개혁주의는 성령에 대하여 할 말이 적은 편인가? 참된 개혁주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는 무관하고 거리가 먼 것인가? 진정한 개혁주의의 본질과 성령의 역사 사이에 불가분해적인 관계가 없는 것인가? 성령의 역사의 본질에 대한 개혁주의의 이해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하여 정당하고 논리적인 답변을 하지 못하면, 개혁주의를 비웃고 있는 오순절파나 그와 맥을 같이 하는 은사주의나 신비주의의 비소를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진리 가운데서 온당한 근거를 가지고 그 질문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하면 당당하게 개혁주의가 견지하는 성령론을 확신있게 제시하여 영적 혼란에 처한 수많은 성도들의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이 제한된 지면으로 이 문제에 대한 서론적인 개관 정도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은, 우리의 관점과 시각의 방향과 진로에 대한 열린 눈을 가지게 하는 데 일조하기를 원한다.


 

본 론

 

1. 성령론에 대한 접근방식의 문제

(1)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는 진영에서의 접근방식

 

성령론을 다룰 때에 가장 흔한 실수는 성령님 자체의 역사로 바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오순절파나 은사주의, 또는 신비주의가 바로 그러한 방식의 접근방식을 보인다. 그들이 외치는 메시지는 대번에 '성령의 역사 체험'을 제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그리고 그들의 그 '성령 체험 간증'은 듣는 이들의 영적 호기심과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그 간증을 듣는 이들은 자기들에게도 그 '그런 체험의 특권'이 주어지기를 갈망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간증을 하는 이들에게 그 '성령 체럼'을 할 수 있는 경로를 배우려는 간절한 열심을 보이게 된다.

 

그런 이들이 주도하는 집회에 가면 매번 '성령의 은사 체험을 간증하면서 그에 대한 시연'이 반드시 곁들여진다. 그래서 거기 참석한 이들은 그 '성령의 은사 체험'을 먼저 하고 자기들 앞에서 그 은사를 과시하는 이들을 '선생'으로 모시고 그 은사를 '배우려고까지 한다.' 아니 은사주의자들은 대번에 다른 이들도 자기들 같이 이러한 은사를 받아 체험하여 보라고 권장하면서 그 경로를 알려주게 된다. 자, 우리는 그런 일들이 어디 한쪽 은밀한 데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교단이나 교파에 관계없이 크게 성행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수천 명의 현직 목회자들이 그런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와 은사 체험을 하려 한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성령 체험'으로 직접 나아가는 접근 방식은 반드시 그런 식의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만일 계속 그런 식의 접근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그런 일은 더욱 더 가중 될 것이다. 또 거기에 깊이 심취한 이들에게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당신들이 아직 맛보지 못하여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받은 자 밖에 모른다는 것이 진리이다'라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무어라하여도 이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종들이라고 자부한다.

(2) 삼위일체론적 접근

 

그러면 그런 식의 접근방식이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 어떤 식의 접근방식이 옳은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성경이 보여주는 균형이 잡힌 삼위일체론에 있다.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삼위일체 진리 체계를 두 국면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본질적 삼위일체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다. 하나님의 본체론적 존재의 방식에서 삼위의 관계 있게할 때에 '본체론적인 삼위일체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이 세상과 관련된 하나님의 활동의 국면에서 말할 때에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다.

 

하나님 자신의 '내재적', 혹은 '본질적' 삼위일체론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에 치중하여 각 위격을 아는 지식에 접근한다. 삼위가 그 신적 본체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며(이 점에서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다), 각 위께서 신적 권위와 영광과 능력과 그 모든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동등되시다.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의 요지는 무엇인가? 각 위격이 피조세계와 관련된 활동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목적(뜻)은 하나이시면서 아울러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심에 있어서는 삼위적 구분과 경륜적 질서를 가지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경룬적 삼위일체론이다.

 

성경에 계시된 대로 보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행사에 있어서 그 경륜적 구조와 질서가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한아님ㄴ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성삼위의 본질적 일치와 사역적 구분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성경에서 삼위가 동시적으로 언급되거나, 또 그 삼위의 활동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그 질서는 분명하게 보인다. 곧 삼위가 동시적으로 언급되는 경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와 질서가 보인다는 말이다. 그 순서와 질서를 철저하게 견지하셨던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또는 성령님에 대해서 함께 말씀하실 때에 세 위격들 사이에 본질적 동등 되심을 드러내시면서(요 5:17-18; 14:7-10; 마 28:16-20), 아울러 그 질서와 순서를 명백하게 하셨다(요 5:19-37; 6:37-40). 또는 예수님 당신 자신과 성령님,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 점을 분명하게 하셨다(요 16:7-15).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속의 대업을 말씀하실 때에 항상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성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으로 말씀하신다(요 4:34).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성령님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 경륜적 질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요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3-15).

 

그러니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서는 이 두 방면을 함께 숙고해야 한다. 성경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삼위일체론을 하나만 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면 큰 문제가 발생하고 오류에 빠지게 된다. 만일 본체론적 삼위일체론만 고집하고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을 버리면, 반드시 삼신론 사고에 빠지게 되어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반면에 본체론적 삼위론을 배격하고 경륜적 삼위론을 고집하게 되면, 삼위 간에 등급을 매기는 인간적인 차등논리가 고개를 쳐들게 된다. 곧 성부는 1등 신, 성자는 2등 신, 성령께서는 3등 신으로 치부되기 쉽다는 것이다. 성경의 진술을 표면적으로 얼른 접근하게 되면 그런 식의 두 큰 오류에 빠지게 된다. 교회사적으로 그런 오류에 빠진 경우들이 허다하였다.

(3) 오순절파와 은사주의, 신비주의의 접근 방식

 

그들에게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강조는 성령의 역사, 특히 '성령의 은사 체험'에 주어진다. 그래서 그들의 강조에 의하면 진정한 영성은 '성령의 은사 체험' 여부에 달려 있는 듯 한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에서는 은사를 강조하고,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이는 아직도 '성령 은사 세계'에 들어가지도 않은 자로 치부된다. 그리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바로 '방언 은사 체험'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나아간다.

 

물론 이들이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반드시 띠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과 직접 교통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착각이 그들을 흥분하게 하고, 늘 '성령을 주관적으로 느끼려는' 강한 충동을 가지게 된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자기들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모종의 정서적인 파장을 '성령의 지시, 또는 나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들이 항상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자기들의 정당성을 성경에 기록된 바, 초대교회의 여러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특이한 현상이나 은사에서 찾는다. 그리고 지금도 초대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그 현상이 자기들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고 자부한다. 교회가 진정한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들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이라도 할 양으로 자기들이 구사하는 여러 은사와 자기들의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 말한다.

 

자, 이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인가?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이들의 접근방식은 삼위일체론적인 경륜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성령의 체험 자체를 추구한다. 그리고 성령을 증거한다. 곧 이들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질서를 전혀 개의치 않고 나아간다. 그러니 성령의 체험 자체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들의 메시지에는 성경이 항상 집중하여 말하는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실행,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그 완성에 대한 것이 중심에 있지 않다. 도리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여러 은사나 역사에 대한 것이 반드시 등장하고 그것에 대한 부연 설명이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개혁주의를 한다는 이들은 '그러면 그러한 메시지에 무엇이 잘못이 있는가? 라고 물을 것이다. 선뜻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대목이다. 그러나 당황하지 말고 성경을 더 깊이 보되, 특히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과 중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메시지의 중심과 성령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2.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가 성취하신 구속의 은혜였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고 기이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한 첫 번째 설교의 내용(행 2:14-36)을 보라. 처음에는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나타난 기이한 여러 현상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요엘 선지자로 하신 약속의 성취를 말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이루신 구속의 대업'이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으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도다"(36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이었나? 그의 모든 서신들 전체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 이루신 구속의 역사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2에서 그 점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을 양 극명하게 천명하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또 그 앞의 1장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또 그 앞의 1장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사람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3). 사도 요한의 서신들을 보라. 그러면 그 메시지의 중심이 바로 베드로나 바울 사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일 1:1-2).

3. 사도들의 성령관

그러면 사도들은 성령에 관해서는 가볍게 말하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와 따로 성령에 대해서 강조하였는가? 전혀 아니다. 그들의 메시지에 성령께 대한 언급이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나 은사나 성령의 체험 자체를 중심에다 놓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항상 메시지의 핵심은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오셔서 우리를 위해 구속의 대업을 이루신 하나님 아들 우리 주 예수와 그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완전하게 세우려는 일념이었다(골 1:28-29).

 

그러면 사도들이 성령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였는가?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은 메시지를 증거하면서 자기들의 지혜와 자기들의 수사력과 자기들의 설득력과 웅변을 의지하지 않고 항상 성령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라고 말한다. 골로새서 1장에서 사도는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8-29).

 

사도가 지금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지 '성령님의 은사나 체험' 자체를 전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에 오직 성령의 역사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증거(전파)하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유효하게) 믿게 하여 주시는(거듭나게 하심으로) 이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항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행 17:22-31). 그런 일을 할 때에 사도들은 항상 자기들 속에서 역사하시어 그 일을 하게 하시고, 듣는 자들을 불러 믿게 하여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철저하게 의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가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고전 12:3)는 진리를 철저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였다(엡 5:18-20).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녀들은 보혜사 성령의 내주하시는 은혜 안에 있으니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이 사도들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인 입장에서 믿음을 견지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물론 그들 사도들을 본질적으로 가르치신 이는 예수님이셨고(갈 1:10-12), 그 가르침 안에서 계속 거하도록 하시고 배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영적 자원들을 제공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효를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적용하시기 위한 놀라운 역사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삼위의 경륜적인 질서와 조화와 영광을 보게 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우리에 대한 그 뜻이 성취되게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시오, 그 성취하신 공효를 성부와 성자와 일치하게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엡 1:3-14).

 

그러니 우리는 우리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경륜적으로 성부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정하시고 자녀로 받기로 예정하신 아버지시오, 성자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우리 주님이시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전 과정을 주관하시고 끝까지 견지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우리의 보혜사이시다. 우리는 성부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광의 소망을 향하여 우리의 순례길을 간다.

 

영적 부흥의 핵심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고조된다. 그런 일 속에 아버지와 아들과 일치하시게 일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다.

4. 성령의 은사의 자리

성령의 은사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다는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은혜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방편과 통로와 조건과 연관된 것이다.

 

물론 이 성령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니 그의 역사가 아름답다. 그러나 질서를 따라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활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대로 하면, 성령의 여러 나누어 주시는 은사는 교회의 직임과 사역과 관련되어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이와 같이 은사와 관련하여서도 경륜적인 삼위일체 진리가 보인다. 오늘날 이 점에서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는 사역과 관련된 것이다. 곧 사역자가 되는 사람은 그 사역에 필요한 성령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위한 성령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 교회의 직임자는 그 직음을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은사들을 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열거된 은사들은 초대교회에서 필요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이었다. 그것이 현대교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 때와 지금은 하나님의 경륜의 진행 속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아직 기록된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시의 종결판, 곧 성경이 있다. 그러니 그 때의 은사와 지금의 은사가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의 논리에 비추어 억지이다. "사랑은 언제 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고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8-11). 현대라도 복음의 미개척지인 선교지에서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여러 이적적인 은사들이 재현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보고가 있다. 그러나 어디서나 현대에도 그러한 은사들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구하라고 외치는 것은 넌센스다. 은사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보와 선교와 교회의 참된 부흥과 성숙을 위해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속에서 주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어떤 드물게 나타나는 성령의 특이한 나타남의 현상을 가지고 교의화 시키고 보편화시키는 것은 금물이다. 내가 방언을 하니 너도 받으라고 종용하고 그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표라'고 하는 것은 유치한 발상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확실한 증거는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다. 그것을 믿게 하시는 이가 성령님이시다(롬 5:6-8).

5. 성령과 교회사

(1) 성령과 성경

 

우리가 잘 아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전체 역사 과정을 성령께서 주장하시었다. 성경이 기록하게 하신 이도 성령이시다(벧후 1:20-21; 딤후 3:14-17). 성경이 이루어지도록 주장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 그리스도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하게 하신 이도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의 공생에 전체의 행사 속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의 모든 과정을 성령께서 주도하셨고, 오순절 강림이후 성령께서 사도들을 주장하시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증거한 것을 기록하게 하신 이도 성령이셨다. 그러니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며, 성령의 호흡과 음성이다.

(2) 계시의 완결판인 성경으로 계속 가르치시는 성령

 

교회사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함께 진행되어 왔다. 물론 하나님과 그 복음의 영광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와 인본주의적인 박해와 핍박의 도전이 교회사 속에 진하게 칠해져 있다. 그래서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마귀의 집단으로 넘어간 것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사 속에서 성령의 계속 일하심은 그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여 5:17) 하신 말씀이 성령께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성령께서 교회사 속에서 일하심의 가장 중요한 요점에는 아들을 통해서 뜻을 성취하시는 아버지의 말슴이요, 성령님 당신 자신의 음성이요, 호흡인 성경을 가지고 일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연약과 허물로 인하여 교회는 벌써 없어진지 오래였을 것이고, 성경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은 항상 그대로 유효하다.'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3) 성령과 개혁주의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의 입장에서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제 길을 벗어나려 배회하고 방황하던 그리스도의 교회를 제자리로 돌이키는 성령님의 역사였다. 그 교회가 있어야 할 제 자리란 무엇을 가리켜 말함인가? 성경이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믿음과 실천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니 개혁주의 정통적인 역사는 성령님의 역사의 결과다. 지금도 개혁주의는 성령의 붙들어 주심으로 견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사의 개혁주의 노선에 있는 고전들을 읽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성경의 권위에로의 회귀가 개혁주의의 근본이라면, 그 개혁주의자들의 책들은 사람의 철학의 소치가 아니라 그들의 눈을 열어 성경을 가르치시고 듣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셨던 성령님의 역사의 영광스런 열매였다. 그래서 개혁주의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나온 교리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자는 그래서 성경의 권위 아래, 성령을 의지하여, 성경적인 고전들을 섭취하고 현실의 영적 환경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성경에 약속된 성삼위의 영광의 은혜와 그 약속과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고서 말이다. 성경 말씀과 기도와 바른 교회생활과 개인의 경건생활이 그 줄기에 연하여 붙여 있다.


 

결 론

 

개혁주의자는 성령님의 역사를 어느 누구보다 바르게 의지한다. 성령님과 그 나타남과 그 현상들을 따로 떼어 말하거나 강조하는 이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그들은 사도들이 한 적이 없는 일을 가지고 사도들이 했다 뒤집어씌우는 자들이다.

우리는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적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해야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하심의 조화와 영광을 늘 견지해야 한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현대의 '성부' 없이 '성자' 께로 곧바로 가서 거기서만 머물러 있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성령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에 대한 인식이 없음을 알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을 강조하면서 영적 부흥의 계절이 오기를 그렇게 갈망한 것이다.

 

칼빈이나 모든 개혁주의자들이 다 그러하였다. 물론 개혁주의자들마다 성령의 역사의 세부적인 어떤 국면에 있어서 의견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의 광대함과 영화로움을 인간의 지각으로 모두 총체적으로 조화있게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운 우리 사람의 용량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겸비함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실수를 하나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로 보아야 하는 이들이 다른 진영에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지식과 우리의 실제의 실천 사이에는 아직도 크게 벌어져 있는 틈이 있어 흉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성삼위께서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아멘.


 

- 진리의 깃발 100호, 서문강 목사, '개혁주의와 성령' p.52-68.

 

출처 : (안산) 회복의 교회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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