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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교회 사경회(영적 분별력 2) 이은철목사

이은철목사(정읍)

by 김경호 진실 2012. 11. 19. 09:23

본문

분별하는 삶

(마 16:1)“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어제는 영적 분별력이란 무엇인가? 하늘에 속한, 하나님에 관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했고, 이 능력은 오직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어야만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고 배워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선물입니다.
오늘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실제 우리 자신과 우리 시대와 우리 교회를 성경을 통하여 헤아리고 살피면서 주님 앞에 담대함과 견고함을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분문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시대를 분별하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시대를 분별하라고 하신 것은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여 깨어 의를 행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항상 표준이 진리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이웃 사랑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말을 등이요 빛이니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이며, 이로써 비진리의 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양육했던 것입니다.

(고후 10:12)“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13)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기로써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은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지식, 지혜, 사역 등을 자랑했는데 이들이 전한 복음은 다른 복음이었고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비교 판단 평가하며 자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들의 사역과 자기들의 지식과 자기들의 능력을 자랑하는 이들과 같은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교회는 신자가 얼마이고 교회는 몇 억을 들여지었고, 한주 헌금은 얼마이며 봉사와 구제와 선교하는 비용이 얼마이며 교회목사 장로가 얼마 등 이와같이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고 자랑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과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가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가지고 사역을 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분량으로 나눠주신 것의 한계를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에 이른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한계는 무엇입니까?
분량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mevtron(메트론)인데, 이것은 오늘날 미터라는 길이의 단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한계는 kanovno"o(카노노스) 라는 헬라어로 기본이 카논입니다. 카논 혹 캐논이라는 단어는 자를 뜻하는데 그 의미는 정경 곧 성경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의 표준은 성경이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성령의 역사를 따라 성경을 거울로 삼고 복음을 증거 했으며, 성경을 가지고 분별한 것입니다.
성경을 더해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됩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통하여도 증거했지만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말로 증거 했습니다.

(사 8:20)“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가장 바르게 분별하는 지식이 있어야 하며, 목회자의 설교는 오직 성경을 증거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시대에 강단을 높이 세운 것은 말씀만을 선포해야 하며, 말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높인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의 권위만 높아져 있고 선포되는 성경 말씀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 것”과 같아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강단에서는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도 교회 속에 들어온 비진리의 영을 이렇게 분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일 4: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우리의 자녀됨은 성령으로 말미암지만 모든 영을 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시험하라”고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 역사는 거짓 영들이 나타나 성도들의 영혼을 유린하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역사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진자운동과 같이 두 극단이 나타났습니다. 두 극단의 형태는 다른 영들의 역사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형태는 감성을 중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중시하는 형태입니다. 감성은 거의 신비주의로 흘러가고 이성은 지식만 가진 차거운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데 교회 역사 속에서 이성을 중시하여 2세기에는 몬타니즘 3세기에는 영지주의가 그리고 다시 감성을 따라 중세 수도원 운동이 있었고, 11-14세기에는 다시 이성을 중시하여 스콜라철학이 나타났고, 14-15세기 감성으로 신비주의가 16-17세기는 종교개혁 후에 이성을 따른 정통주의, 17-18세기는 다시 감성을 따른 경건주의가 19-20세기는 다시 이성을 따른 자유주의가 그리고 20-21세기는 오순절 운동의 은사주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극단은 바로 다른 영들에 의한 미혹입니다.
그 가운데 이들과 싸우면서 성경을 따라 바른 교훈을 지킨 무리들이 있는데 사도들과 교부들과 중세 어거스틴을 이어 종교개혁시대의 루터와 칼빈 그리고 청교도들 그리고 스펄전과 로이드존스같은 이들의 신앙으로 이어진 개혁신앙이 성경을 따르는 것이 성경의 증거를 따라 세워진 바른 교리입니다.
우리시대 오늘날에는 자유주의와 신비주의가 합쳐진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자들이 나타나 온통 성도들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프로그램과 문화활동, 음악, 제자 훈련, 열린 예배 같은 것들이 교회 속에 들어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증거한 삶을 통한 증거, 성령을 통하여 감화 감동하심으로 자신의 의지까지 복종하는 삶을 통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고, 형제를 사랑하는 열매들이 나타남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적인 부분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며 그 지식을 사랑으로 행하는 감성적인 것이 균형을 이루는 조화가 되지 않으면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들 다 믿지 말고 하나님께 속한 것인가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도 있고, 다른 예수도 있고 다른 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기 영혼이 유린당하고 노략질 당하는 것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잘 용납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수다한 사람들이 혼합한 지식과 혼잡된 복음으로 가르치는 것은 구약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경계하셨고 사도바울은 이를 뚜렷하게 보고 경계하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고후 2: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17)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그리스도인은 두 종류의 향기만이 풍겨지는 삶이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생명이든지 사망이든지 향기를 발해야 하는데, 혼합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사망도 생명도 아닌 애매한 냄새, 즉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하여 생명을 얻든지 사망을 얻든지 분명하게 증거해야 하는데 수다한 사람, 즉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잡케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누가 순전하게 증거하여 사망이나 생명의 향기 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만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할때에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혼잡하게 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세상 축복으로 더하여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려고 하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역사는 없어지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처럼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것 그대로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믿음에 대하여 내 믿음이라고 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바른 교제와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영들을 시험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일 4: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사도 요한은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의의 천사를 가장한 타락한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간계를 부립니다. 진짜인 듯이 거짓으로 속입니다. 이들이 양의 탈을 쓴 이리지만 교회에는 가만히 들어옵니다. 사람들 보기에 좋은 모습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징이자 분별법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영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하는 것이 세상에 속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4:4-5)“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수많은 이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다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탐에서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백성들이 다 옳게 여겼지만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한 영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쳤던 당시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한 영들의 조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다 멸망하였고 물에서 살아나 구원 얻은 자는 겨우 8명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세상은 악한 영의 말을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말씀 진리의 성경을 순전하게 증거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령이 우리 안에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우리는 이 시대와 교회를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진단하는데, 잘못된 것들을 일일이 찾아서 증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증거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이 세상 6,000년의 인류역사를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태양계와 지구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아담부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인류 역사는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첫 조상 아담부터 족보와 나아까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가 5장과11장에는 아담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까지 족보가 기록되었는데 연수가 정확하게 증가되어 아담이 죽는 나이930세부터 아브라함이 죽는 나이 175까지 계산하면 정확하게 2123년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까지 기록되었고,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약 6000년 전의 첫 사람이었는데 이후에 지금까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현재 우리의 삶을 살펴볼 수 있고 진단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헤아리고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시대 교회가 어떻습니까?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계하고 가르친대로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한 것 그대로 오늘날 교회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두 구절을 읽고 각종 예화, 사람의 교훈,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설교를 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증거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영혼이 거듭나게 하는 설교, 영혼이 살아나는 설교, 영혼이 잘되는 설교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거룩해야 하는가? 이를 증거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부부십계명, 자녀 십계명, 교사 십계명 등 물론 성경을 발췌해서 만들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바꾼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까지 권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말씀 중에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은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합니다. “공로 없이 호의를 베풂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호의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받기에 전적으로 무가치하고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받는 호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하나님 큰 구원의 일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사용한 단어를 보면 이렇습니다.

(엡 1: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2: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롬 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에 빠져 형벌과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칭찬을 듣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죄인을 위한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고 죄와 사단과 사망과 저주와 형벌에서 건져주신 말할 수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으로 곧 혈육간의 인정, 이성간의 애정, 친구의 우정 정도 여기는 교훈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기도, 교회, 하나님의 의"등 많은 것들이 오염되고 혼합되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한 것들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증거한 역사서와 선지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들이 계속 증거되고 있고, 신약의 서신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증거한 호세아서를 보겠습니다.

(호 7:8)“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9)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 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장자로서 이스라엘의 대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아비의 침상을 범하여 장자권은 열한번째 아들인 요셉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장자의 특권은 유산을 두 몫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반열로 올라가게 되었고 또한 요셉의 두 아들 중 장자가 므낫세였고 둘째가 에브라임이었지만 야곱은 유언을 하며 축복할 때에 손을 어긋나게 하여 에브라임을 장자로 축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을 대표로 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에브라임의 죄를 열방에 혼잡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혼잡은 뒤섞였다, 혼합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별되어야 하는데 구별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치 뒤집지 않은 빵 같아서 한쪽은 타고 한쪽은 제대로 익지 않은 것처럼 되었고, 백발이 얼룩얼룩한데도 알지를 못하는 자가된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힘, 이방인의 세력,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영향력을 끼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백성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 혼합되어진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이를 깨닫도록 호세아 선지자에게 실제 보여주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를 아내로 삼아 음란한 자식들을 낳고 그 이름을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축복이 저주로 바뀌었음과,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는 호세아의 아내에게 있다고 하시면서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여기시고 아내를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셨고 사랑하셨는데, 스스로“이제는 남편이 아니다”고 하신 것은 아내의 행음 곧 우상숭배 때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는 이유는 세상 것을 풍부하게 준다는 마음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들이 섬긴 우상은 크게 바알과 아세라인데 바알은 농사 잘 짓도록 해주는 신이며, 아세라는 자식 많이 낳게 해 주는 신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잘 살수록 더 많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도록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해 주셨지만 이것을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함과 공의가 들어있는 법을 버리며 살아가는 삶은 죄악으로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제사장들, 왕들, 선지자들 그리고 백성들까지 온통 죄악으로 가득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달궈진 화덕과 같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이방에 혼합되어 백발이 얼룩얼룩 하다.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다”고 하셨습니다.
지계표를 옮긴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표준을 끌어내려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표준도 낮추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의 표준까지도 사람보기에 좋은 대로 낮추는 것입니다. 곧 죄로 인해 망할 것임을 증거 했어도 괜찮다 평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에 하신 말씀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어다” 이 말씀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살전 4: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벧전 1: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6)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러한 모습을 띠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세상에 혼잡되었습니다. 세상의 방법과 이론과 사상이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 곧 성도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런데 교회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세상 풍조와 사상이 들어와 온갖 혼합주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속에는 그러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약속을 받은 사람들일지라도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미래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보함도 많이 들어야 안심이 되고, 재물도 어느 정도 있어야 살 것 같은 것입니다. 노후에 평안한 삶을 살고 싶어야 여 이렇게 하면 이자를 더 준다, 돈을 더 벌수 있다고 하면 귀가 솔깃하여 그러한 곳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앞에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본받고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24)“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요 13:16)“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자 보다 크지 못하니”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대접을 받으신 대로 우리도 같은 대접을 받는 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대접을 받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멸시와 조롱과 증오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분명히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 15: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20)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미움과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받는 곳입니다.
핍박을 면하려고 갈라디아 교회는 할례를 용납했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지 않으려고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은 삶을 취하고 있으며, 세상의 풍조와 사상에 미혹되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하는 것은 세상과 혼합된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사상인 인본주의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현대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현대 사람들의 정서에 맞추려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자꾸 변질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만이 교회를 지배하고 성도의 삶을 지배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주님의 진노와 심판 속에 처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고후 10:3)“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6)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시대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당시에 유대인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당 그리고 에세네파로 나누어져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철저하게 지키고 이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는 하늘로부터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은 소멸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살고 세상에서 율법을 따라 바르게 행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롯당은 일종의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무리를 가르치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와서 메시아라면 하늘로서 왔다고 하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기 즉 하늘을 보고 날씨를 미리 분별 할 줄은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 할 수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시고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고 저희를 떠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던 날로부터 지금은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시대는 시간의 기간을 말하고, 세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하늘로서 온 표적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하늘로서 온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하는 마음의 생각과 말입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자들처럼 자기 열심으로 살아가거나 혹은 사두개인처럼 죽으면 그만이다고 하며 오직 세상에서의 행복과 만족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지금도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나타낼 표적은 요나의 ㅍ적 외에는 없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마 12: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3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40)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요나의 표적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님께서 사흘을 땅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시켜 주시기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일이십니다.
그것이 하늘로서 온 최고의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 목적을 이루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십니다. 다른 증거와 다른 표적은 필요치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도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고전 1: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23)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사람의 말과 지혜 혹은 표적으로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고전 2: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전도 곧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고전 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것은 사람들이 표적으로도 믿지 아니하고, 사람의 지혜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십자가만으로 증거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하지를 않고, 사람의 말과 지혜 사람들이 이해하고 좋아하는 방법들을 동원하여 전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매력적이고 사람들에게 붙임성도 있고, 마음에 드는 설교, 기분 좋고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거짓 선지자들과 또한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아가는 욕심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말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겹고 싫다고 합니다. 이것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진리를 싫어하며, 그저 자기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 같은 말에 미혹되어 그런 허탄한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입니다. 그러한 것은 요구한 사람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신 것입니다.

(마 16: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고 그들은 천국에서 먼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사람들이 구하고 찾는 것들을 채워주려고 애쓰고 그러한 방법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본받아야 하는데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으로서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마 12: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로 가서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증거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온 성이 회개했습니다. 남방의 여왕도 소문을 듣고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솔로몬의 말과 지혜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해지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찬양을 돌린 사람들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임금 만왕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위대한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위대하고 큰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요나 선지자와 남방 여왕은 마지막 심판 때에 세상을 정죄하는 것처럼 오직 한 가지 순전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도 세상을 정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지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증거가 나타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야망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려했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참예하기를 원했고,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도 본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과 함께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이 곧 요나의 표적이 나타나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떠한 시대입니까? 예수님께서 증거 하신 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11: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17)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피리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쳐도 감각이 없고 회개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와 사망의 저주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각종 질병 속에 죽어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건만 그들은 믿지 않고 듣지 않으며 오히려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세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라, 구원받으라, 복음을 믿지 않으면 심판과 진노와 저주와 형벌과 지옥의 불 못”을 말하면 재수 없다고 하며 대적을 하고 미워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말씀으로 불살라지는 멸망이 있고 하늘과 땅은 떠나갈 것이다.“ 증거하면 농담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마치 당시에 ”예수님께 귀신들렸다“고 한 것처럼 동일한 취급을 당하는 세대가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그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눅 9:4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따로 세 제자 베드로 야곱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되셔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께 이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다시 산을 내려오셨을 때에 산 아래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느 귀신들인 아들을 고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지만 고치지 못함으로 예수님께 하소연 했을 때에 대답하신 말씀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만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살펴야합니다.
믿음은 물론 하나님께로 온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얻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받은 이후의 성도의 삶은 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통하여 하나님께 난 믿음은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오직 의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주님의 약속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것인데, 실제 우리 생활 속에서는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판단과 지식과 우리의 재물과 재능을 의지하고 더욱이 사람을 신뢰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믿음으로 살아가는가? 그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귀하여 여기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와 전도와 성도 섬기는 일을 주님을 섬기듯이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행하고 미워하시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이 없는 것은 헛된 믿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때에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그 능력은 부인하여”경건의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있는 이름뿐인 신자들로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세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는 조롱과 멸시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믿음이 없고, 삶은 패역하고 악하고 음란한 삶을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서는 아주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눅 16: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자기를 위해서는 아주 지혜롭습니다. 미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는 철저하게 준비를 합니다. 노후생활을 위해서,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 각종 부금 연금 적금 보험 등 아주 다양하게 빈틈없이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까 하는 준비는 외면하고 사랑가는 것이 이 세대 사람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눅 12: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들은 하나님은 안 계신 듯이 살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면서도 자기 자신과 이 세상과 육체에 대하여는 아주 철저하게 준비하고 여기에 마음을 다하여 노력하고 애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 같지만 빛의 아들들은 영원한 미래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게 보장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타날까? 무슨 상급을 받을까? 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자처하며 매일 매일의 삶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 빛들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갈 1: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대를 분별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타날까? 두려워하는 경외심으로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에서 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고난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을 닮아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가는 일에 진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한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롬 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과 사단은 우리를 유혹하여 믿음 없이 살아가게 하며,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멀리하게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세상 풍조를 따르게 하려고 갖가지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 속에서도 그러한 시도가 아주 심각하게 만연되어 있어 교회가 더욱 세속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거룩함과 순결함이 있습니다. 이를 더럽히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야하며 우리의 몸과 영과 혼이 주님 앞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정결하게 보전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세대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반대로 악한 세대는 하나님나라와는 관계가 없음을 역사로 보여주셨습니다.

(시 14:5)“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신 1:35)“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이 세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하나님 말씀을 따라 그리고 교회 역사를 따라 분별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나타나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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