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숭의교회 사경회 (영적분별력 3) 이은철목사

이은철목사(정읍)

by 김경호 진실 2012. 11. 20. 09:06

본문

 분별력을 높이는 일

(엡 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두 번에 걸쳐 영적 분별력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영적 분별력을 높이는 일에 대하여 상고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견고하고 든든히 세워질 때 우리는 믿음의 시련과 시험과 고난을 흔들리지 않고 선한싸움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점과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야한다고 하면서 자라기 위하여 13절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럴때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고 한 것입니다.
먼저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신분과 지위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청년과 어른으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린아이도 있고 청년도 있으며 어른들도 있습니다.

(요일 2:12)“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 구절은 사도 요한이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안에 담겨 있는 일련의 권면과 요청들 가운데 삽입된 내용입니다. 사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데서 필수 요소인 형제 사랑에 대한 계명을 지켜야 된다고 말한 앞의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또 다른 강하고 자극적인 권면의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15-16말씀인데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와 같은 내용의 권면입니다. 이 연속적인 권면을 중단하고 12-14절에 걸쳐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에 관한 말씀을 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첫째로 성도들에게 안위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강하고 엄한 교리에 대해 설명해왔습니다. 계명을 지켜야만 하고 또한 형제를 사랑해야만 하는 등의 엄한 요청들을 했을 때, 혹시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스스로 낙심하여 너무 어렵고 높은 수준의 가르침에 의해 정죄당하고 또한 자신들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위로의 말을 준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히브리서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 6:9)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10)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왜 이러한 말을 했습니까?
(히 6: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런 것이 성도를 섬기는 마음입니다. 혹시 실족할까? 낙심할까? 바른 교리를 가르치면서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낙심하고 정죄하는 어린 심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도들을 격려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가르친 교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며 실제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킬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리이지 지킬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참된 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실제 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정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2:12)“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가정의 모습이며 교회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자녀들은 죄사함을 얻었고, 아비들은 하나님을 알고,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긴 사실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권면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면 그 외에 여러 교리에 대한 가르침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반복하여 증거한 것입니다.

(14)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성경에서 통상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는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런데 12-14절에는 그리스도인을 분류하면서 어린아이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만 죄사함 받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비들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들만 악한 자를 이겨야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자를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주어지는 단계와 상태들이기 때문에 모든 단계에 필요한 메시지이며 그 단계에서 더욱 강조해야 될 말씀들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제시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세에 깨어있으라 하시면서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충성되고 지혜로운 자가 누구뇨”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도 요한은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사도의 직분을 잘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무지한 교사나 목사는 어린이에게 단단한 양식을 주고, 어른에게 어린아이들을 먹일 양식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교사들은 나이와 믿음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사도 요한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은 아이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 악한 자를 이기는 청년들을 향해서만 할 수 있는 가르침이며 교훈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을 했는데 그것은 계명들을 지켜야 하며, 형제들을 사랑해야 하며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하는 권면의 말씀 뒤에 감추어진 기본적인 전제조건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 용서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확실하게 갖고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 가장 근본적인 전제조건은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를 찾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또한 용서받기를 소원하는 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용서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자가 아닙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통해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자신의 죄가 이미 사함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죄 사함은 어떻게 받습니까? 그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명백하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 안에 기독교교리에 관한 가장 근본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죄용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죄용서는 노력과 기도와 죄 용서를 비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들의 선한 삶이나 공로나 선한 행위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나의 죄가 용서받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죄사함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하시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만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는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 2:13)“....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이것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완료형입니다. 이미 악한 자를 이기는 삶을 살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악한 자를 이긴 승리감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죄와 사단의 지배아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를 믿는 순간 완전하게 해방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하다는 것을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단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고, 우리는 그 안에서 연합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도 사단은 미혹을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사담이 주님께 패배한 자이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승리한 군대의 소속된 용사들임을 알고 우리의 대적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죄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데, 다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주를 경외함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14절에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단을 이기는 공격 무기로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을 무장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삶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사도요한은 성도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지식을 바르게 알아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라고 증거 합니다.
13-14절에“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알았음이요”
요일 1:1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와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계시고 안고 일어서는 것, 자고 깨는 것,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 아시는 분이십니다ㅓ.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그의 영광에 들어가 아무 흠이 없이 그의 앞에 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신 선지자이시며 제사장과 왕이 되신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신은 사단 마귀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나고 귀한 축복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힘이 되고 능력이 되고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원동력이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는 말씀을 받아 모두 선생이 되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젖이나 먹는 자가 있다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 5: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세상에 있는 게으름뱅이들처럼 되었습니다. 자신들을 일깨우는 일이나 자기를 돌아보고 고쳐나가는 삶 곧 성장하는 일에 관하여 너무 게으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인 사도가 당시 히브리인들의 상태가 이렇기 때문에 더 높은 은혜의 말씀 곧 존귀와 영광의 하늘의 제사장에 관하여 멜기세덱으로 설명하려는 것에 대하여 주저했던 것입니다.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은 멜기세덱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알게 되고 그보다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편안함, 게으름, 교만함, 잘못된 지식으로 자만함등이 있습니다.
불의로 인하여 사랑이 식어가며, 위엣 것보다 땅에 것을 더 생각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보증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기만당할 때, 곧 속고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자기 일을 더 중시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믿음의 집을 견고히 지어야 하는데, 각기 자기 일에 더 빠른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가 책망한 것이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여기고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편히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큰 원인은 자기만족과 편안함과 게으름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스스로 섰는 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확신과 보증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속고 있거나 속이는 자는 우리를 부르신 이유와 목적에 관하여 냉담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일에만 바쁜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은 잘못된 교리와 사상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고전 15: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악한 동무라는 것은 잘못된 이론과 사상과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말합니다. 여기에 미혹되면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아서는 안됩니다. 속는 사람들은 게으름과 편안함으로 늘 그대로 타성에 젖어서 형식에 빠져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앞에 있는 부르심의 상급을 위하여 자기를 쳐 복종시키며 선한 싸움을 하며 달려가지를 않습니다.
오래된 성도들은 남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 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남을 가르치기는커녕 자신들이 다시금 처음부터 배워야할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단단한 식물을 소화하기는커녕 갓난 아기에게나 필요한 젖을 먹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들은 사람들 자신이 생명의 빛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남들에게 비추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자들이 다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구가 되지 않을 때 등불은 쓸데없는 것과 소금은 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형은 커다란 바다와 같은 호수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며 다른 하나는 사해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고기가 살지만 사해바다는 말 그래도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멀리 헐몬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을 받아 물고기를 양육하는 생수가 되고 그 물을 다시 요단강을 통해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해바다는 물을 받아 먹을 줄만 알았지 다시 돌려주지를 못하는 바다입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마땅한 데 그렇기 못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일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빛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도의 초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같은 유대교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실체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는데 히브리인들은 여전히 그림자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단한 식물을 먹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 5:1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4)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초보가 아니라 단단한 식물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각을 사용하여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분별하며 삶의 이유와 목적을 주님에게로 두어야 하고 우리 자신을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 자신이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성도로 성장되어야 하도록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엡 4:13 그리스도인은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울러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인지? 분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기는 하는데 믿지 않는것? 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이것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참된 믿음도 아니며 성장하지도 못함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 자체이며 생활자체이지 이론이나 사상이나 단순한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영생도 같은 뜻입니다. 영생은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에서 아는 것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사용한 분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독생자를 성령으로 잉태될 것이다”는 소식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고지를 받을 때에 마리아가 한 말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말처럼 “사내를 안다”는 것은“남자와 한 몸이 되어 동침을 해야만 아이를 낳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같은 단어로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하나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생과 교재와 동행하는 모든 것은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알지만 관계가 없는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이 이를 알면서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경우는 심각한 죄에 빠졌을 때든지 아예 무감각하여 육체를 위하여 살아갈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역사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와 말씀, 순종해야 하는 것은 일평생 우리 삶속에서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그는 베냐민지파 사람으로 왕이되기까지의 모습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자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자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아멜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데 활용을 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말렉 왕을 죽이지 않았고, 짐승 떼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겨 두었고 또한 자기 이름을 새긴 기념비까지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고 책망을 받았고,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 사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율법을 모르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삼상 20:24)“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25)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으나(26)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다윗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 “부정한가보다 정녕 부정한가보다”고 말한 것은 그가 율법에 대하여 잘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삶 이것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삶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열심이 있습니다.

(삼하 21:1)“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2)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기브온 백성은 여호수아 시대에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 여호수아를 속이고 평화의 언약을 맺은 족속입니다. 누구도 멸할 수 없음에도 사울이 이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이번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에게 말씀을 적용하지 못한 사례를 살펴 보겠습니다. 자기 죄로 인한 사례는 다윗입니다.
다윗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아의 일 외에는 일평생 정직하였다고 평가하신 사람입니다. 그 우리아의 일도 그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 살피고 적용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삼하 12:1)“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2)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3)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4)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그러자 다윗은
(삼하 12:5)“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6)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이 일 행한 자는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은 출22장에서 주신 율법을 근거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자기와는 무관하게 여겼는데 그것은 죄의 정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삼하 12:7)“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은 죄를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고 합리화시키고 감추는 일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감추기 위해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를 주어 자기 아내와 동침하기를 기다려 자기 자식이 아닌 것으로 속이고 감추려 했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군대장관에게 요압에게 명하여 전쟁터 최전방으로 몰아내어 죽게 하였고 그 죄에 대하여 자책하지 말라고 하면서 “전쟁터에서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는 것”이라고 감추고 속이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네가 그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욕에 사로잡혔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된 그리스도인이기에 죄를 사함을 받지만 죄의 대가를 징계와 고난을 통해서 치르게 되는데 그것은 아주 큰 고통이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사례는 아예 감각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은 믿음의 사람이지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으로, 연약함으로 인하여 실패 또한 경험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특히 이삭에게서 나타났었습니다. 이삭의 말년의 삶을 보면, 연약함과 부주의한 면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 에서가 아내를 얻는 일에 아버지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세심하게, 신중하게 처리하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까지 사환을 보내었던 일을 본을 받아야 했으나 이삭은 그 아들을 위해서는 그런 일을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실패한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 피할 것은 피하고, 옳은 일을 마땅히 행하도록 관심을 갖고 도와주고, 이끌어줘야 함에도, 에서가 헷 족속의 아내를 얻은 일에 근심은 하였어도 책망을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아들에게 상속하는 일에도 연약함과 신중하지 못함을 다시 드러내었습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의 태속에 자식들이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어린 자” 야곱이 약속의 자녀로 선택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상속권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돌려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장자의 명분은 에서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지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야곱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권은 그것을 이해하고 고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구하고 찾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멸시하는 자였고, 야곱은 그것을 간절히 원한 자였습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이제 변경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창 27:1-4)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은 147세에 죽었지만,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으로며 축복할 때에, 요셉은 오른손으로 큰아들 므낫세를 얹어주고 싶었는데 야곱은 나도 안다고 하면서 아우가 더 큰 자가 될 것이다 하면서 손을 바꾸어 잡으며 머리에 안수를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 분별력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삭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는 별미 때문이었습니다.

(창 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별미는 특별한 음식입니다. 이삭은 별미를 좋아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도 야곱이 아닌 별미를 제공해 주는 이삭에게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삭이 영적 분별력을 잃다보니, 그의 아내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을 속이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남편 이삭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께 간구 했다면 야곱이 피난 가는 일은, 집안이 산산조각 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남편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이삭의 감정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이삭을 속이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에서를 축복하려 했으나 아내와 아들 야곱에게 속아 야곱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려 하였으나 실패한 것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목적을 위하여 세속적인 수단 방법을 사용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과 같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모든 일에 거룩한 행실로써 행해야하는 것입니다. 육적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란 일은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미를 원했다는 것은 가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것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추구한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별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민 11:4)“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6)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음식을 마나로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 먹어야 하는 유일한 양식입니다. 이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에 대하여 맛이 없다고 하면서 장막에서 울면서 다른 음식인 별미로 고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 주셔서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별미인 메추라기를 먹었을지라도 이들의 영혼은 말라버렸다고 성경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시 106:13)“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14)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15)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저희의 요구는 별미인 고기입니다. 이것을 이들은 받았을지라도 이들의 영혼은 파리하게 말라버린 것입니다.
이 별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들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유익에 대하여 시편 19편과 시편119편에는 아주 세세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약 디모데후서에서는 이를 요약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케되는 삶의 행실과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충분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별미를 즐겨하다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과 계시를 망각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행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축복을 주려고 한 때가 그의 죽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175세에 별세했지만 그는 180세나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축복할 때의 나이는 137살 정도였습니다.
이후 43년을 더 살았으나 그의 행적은 성경에 죽는 날에 대하여만 기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일로 인해 이삭은 아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떨었습니다.

(창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삭은 크게 떨었다는 것은 속임을 당해 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로 인해 축복을 잘못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두려움이 크게 떨게 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미 축복받은 그 야곱이 정녕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축복하신 자녀이었음을 확증한 이삭의 유언이었습니다. 이 유언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히 11:20)“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과는 다르게 이삭의 야곱은 그의 일생이 꾀와 속임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죽을 때에 축복한 것은 영적 분별력이 분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임종 때의 나이는 147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보다 10년 더 많은 나이로서 그의 눈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축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를 가나안으로 기업을 나눠주시는 것을 알고 그 기업을 12지파로 나누실 때에 레위지파를 제외하고 12지파로 삼기 위하여 장자에게 두 몫을 주시는데 장자 르우벤은 아비 침상을 범한 죄로 장자권을 잃게 되고 그를 대신하여 요셉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아들의 반열로 높여주는 축복을 유언으로 하게 됩니다. 이때 애굽 총리이며 아들인 요셉은 자기의 큰아들 므낫세가 장자이기에 더 세워주기를 원하여 큰 아들을 야곱의 오른손 아래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왼손 아래 서게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눈으로 보지는 볼 수는 없었어도 그는 손을 바꾸어 축복을 하였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손을 옮겨 축복하기를 원하여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자 야곱은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계시”라고 하여 확정을 해줍니다.
이렇게 영적인 분별력이 유언할 때에 뚜렷하게 세워진 것은 야곱의 유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 48: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태어날 때 부터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일하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양육하시고, 돌보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실제 삶을 통하여 체험했기 때문에 이를 유언을 통해 후손들에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감각없이 살아간 예는 아주 많습니다. 그를 대표한다면 엘리 제사장입니다. 교만함도 아주 많이 기록되었는데 모세, 히스기야, 다윗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경계와 거울로 교훈하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며 실패와 실수와 경건치 못함과 무지와 교만함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 드러내는 곳이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의 믿음을 성경은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증거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히 11:20)“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22)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삭 야곱 요셉은 3대에 걸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들의 행적은 창세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믿음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뒤로 물러가지 않는 견고한 믿음에 대하여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에 대하여 증거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들의 믿음을 평가하신 것은 바로 임종 때입니다.
죽을때, 임종시 이들의 믿음이 어떠한가? 끝까지 믿음을 따라 인내하면서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지켰는가? 이를 보시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경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히 13:7)“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말씀을 증거하고, 인도하던 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하고 인도하던 이들은 우선 교회 목회자들이지만 가정에서는 어머니이며 아버지입니다. 곧 앞서 살아간 믿음의 선배들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마지막까지 지켜졌는가? 죽음의 자리에서 영광스럽게 하나님께서 나를 기르시고 인도하셨음을 자손들에게 담대하게 증거하며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는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이러한 말을 남기고 떠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하는 능력을 자들이 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을 성경을 통해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 주님께서는 나무는 열매로 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그 능력에 있다고 한 것처럼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그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기대합니다.
3일 동안 들은 말씀대로 세상 것에는 둔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늘의 것을 알고 분별하면서 그 분별이 지식과 함께 믿음의 삶을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는 숭의교회 성도들과 말씀들은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thevine21.hompee.com/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