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전도서 서론> 전도서가 보여주는 ‘삶의 의미’에 대한 소고 / 송영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3. 1. 4. 08:57

본문

<전도서 서론>

전도서가 보여주는 삶의 의미에 대한 소고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시작하는 말

 

일반적으로 전도서는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열쇠를 찾는 인생의 의미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고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는 아무도 인생 안에서는 그 열쇠를 찾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계시 안에서만 그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인생 철학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에게서도 만족을 줄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이 논의에 대해서는 J. S. Wright, ‘전도서 해석’, 윤영탁 역편, 구약신학 논문집 제2<성광문화사, 1981>을 참고하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인생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은 자칫 현재의 삶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부작용을 유발시킬 수 있게 만든다. 때문에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생활처럼 보이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일상의 생활 속에서 누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맛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이런 의문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전도서의 주제가 인생의 허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마침내 일상을 포기하는 염세적인 신앙지상주의에 빠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이런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염려조차 할 필요가 없이 마음껏 인생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또는 그와 반대의 현상으로 인생을 냉소적으로 비관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이처럼 염세적 신앙지상주의가 만들어 놓은 쾌락주의나 허무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현상들은 일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전도서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쉽게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결론을 유발하거나 일상의 삶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도서가 말하는 삶의 의미를 제시하기까지 전도서는 인생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탐구하며 평가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지 않고서 쉽사리 인생의 의미를 단언한다는 것은 결코 전도서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과연 전도서가 이 땅에서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학계에서 가장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는 전도서의 저자와 연대 문제를 다루고, 전도서가 무엇을 근거로 정경 속에 포함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논의를 거친 후, 전도자가 정작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탐구 과정을 거쳐 전도서가 우리 시대의 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함께 점검함으로써 이 글의 결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1. 전도서의 저자와 연대 문제

 

히브리 성경에서 이 책의 제목은 םלשׁוריב ךלמ דוד־ןב תלהק ירבד(The Words of Qoheleth, the son of David, king of Jerusalem :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 코헬렛의 말씀들)으로 되어 있으며 간단히 תלהק(Qoheleth, 이하 코헬렛으로 표기함)이라고도 한다.

코헬렛이라는 단어는 전도서에 7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다른 히브리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어근 להק(카할)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단어가 동사의 능동형 분사인 여성 단수 칼형(Kal)일 가능성은 있지만 이 단어가 칼형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단어는 להק(assembling : 모이다, 회합하다) 동사의 동위명사로서 회중’(assembly :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특히 이 단어의 칼형 분사의 여성 어미가 일반적으로 그 직무를 가리킨다는 용례(2:55; 7:57תרתפ<서기관?> 또는 스 2:57תרכת<망꾼, 감시인>)에 따라 코헬렛은 회중을 모으는 자혹은 집회에서 연설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유추하게 된다. 여기에서 회집된 의식을 집행하는 자또는 연설할 목적으로 회중을 모으는 자라는 확장된 의미를 찾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LXX에서는 이 책의 제목을(εκκλησιαστης : 집회를 소집하는 자)로 제목을 붙였으며 ‘Ecclesiastes’라고 영어로 음역되었다. 제롬(Jerome)은 이 단어를 라틴어로 concionator(집회에서 연설하는 사람)로 번역했으며 이 책의 몇몇 영역본에서는 코헬렛을 집회에서 예상되는 기능과 연관시켜 번역하고 있다(NIV‘the Teather’, KJVNASB‘the Preacher’, 한글 개역은 전도자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런 번역이 원어의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전도서는 강설이나 교훈을 전달하기보다는 신학적인 내용을 탐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도서의 저자인 코헬렛은 자신을 다윗의 아들예루살렘의 왕’(1:1)으로 또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1:12)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자전적인 부분(1:12-2:26)에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그 누구보다 현명했으며(1:16) 거대한 공사를 이룩했고(2:4-6) 수많은 노예들과 비교할 수 없는 양과 소 떼(2:7), 큰 부와 많은 처첩들을 두었다(2:8)고 밝히고 있다.

자신에 대해 코헬렛은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קלח : 할당된 몫)이로다”(2:9-10)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코헬렛의 자전적 기사 때문에 랍비 및 기독교 주석가들은 이 책에 솔로몬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았다. 하지만 17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 시대와 더불어 문학적, 역사적 비평과 언어학적 분석이 사용되면서 E.W. 헹스텐버그, 후란즈 델리취, 에드워드 J. , H.C. 루폴드 등과 같은 저명한 보수주의 주석가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견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역시 이 책에 반영된 부정적인 사회적, 정치적 상황(4:1; 8:9압제’, 5:8부정’, 5;8-9; 9:16-20부패한 정부)과 이스라엘 황금기를 구사했다고 알려진 솔로몬 시대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인해 이 책의 저작 연대가 솔로몬 시대가 아닌 후 세대인 바벨론 포로기 이후(대략 BC 350), 혹은 후기 페르시아 시대(대략 BC 450-350) 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더불어 쿰란에서 발견된 주전 2세기 말기의 전도서 필사본과 본서가 외경의 집회서(Ecclesiasticus : 대략 BC 190)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으로 인해 이 책의 연대를 BC 250-200년 이후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아람어와 히브리어의 특징으로 설명되는 점들의 일부분이 솔로몬 이전 시대의 가나안 페니키나 문학’(Canaanite-Phoenician literature)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분야에서 글리슨 L. 아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도서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매우 독특한 것이며 바벨론 포로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히브리 문학 작품에서 사용된 것과도 다른 것이라고 논증했다. 그 결과 솔모몬의 저작성을 부정하는 언어학적 논증은 더 이상 확정적이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제기된 부정적인 시대적 상황 역시 솔로몬 통치 말기의 사회악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왕상 12:4, 9-11) 시대적 상황에 근거해 솔로몬의 저작성을 부정할 만한 논증도 펼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12, 16절의 자전적인 언급들과 솔로몬 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검증되지 못했다. 112절의 동사 ‘was’나는 ...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왕이 아니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나는 ...왕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왕이다라는 의미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1:16)에 대한 언급 역시 이방 통치자들을 지시할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 통치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정함에 있어 뚜렷한 내적인 모순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상의 논증 결과 솔로몬의 저작성을 부정할 만한 증거들이 결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미상의 작자와 솔로몬을 동일시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으며 이후부터 학자들과 주석들은 솔로몬(BC 990-931)이 저자였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잠언의 표제를 통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1)는 전도서의 표제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1:1)는 잠언의 표제 양식이 너무나 흡사해서 어쩌면 전도서와 잠언이 같은 사람의 작품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이다. 단지 잠언은 자신의 이름을 솔로몬으로 밝히고 있으며 전도서는 전도자’(תלהק)라고 밝히고 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12:9-10)는 전도자에 대한 최종적 선언 역시 이 책의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비교적 솔로몬의 생애 후반기인 BC 935년 경에 전도서가 기록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 전도서의 정경성과 통일성 문제

 

전도서는 구약의 여러 책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성격을 가진 책이다.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 학파 사이에서도 힐렐 학파가 득세하기까지 전도서의 정경성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이 전개되어 왔었다. 이후로도 전도서에 대한 해석사(解釋史)는 여전히 정경성에 대해 항상 깊은 의혹이 제기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김성수(합신)전도서가 담고 있는 느낌(mood)과 관점의 미묘하고 다양한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일관성이 없고 상호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많은 표현들에 당혹하기 마련이다. 랍비들 가운데서도 전도서의 말들은 서로 모순된다고 이의를 제기한 바 있었지만(B. Shab. 30b) 전도서의 복잡한 성격은 저자, 저작 연대, 이교 철학의 영향 문제 등과 더불어 갖가지 다양한 해석들을 낳게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J. S. Wright는 랍비 해석자들이 주로 세 가지 방법으로 이 난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소위 쾌락주의적(Epicurian)이라고 불리는 구절들을 읽을 때에 그 뒤에 물음표를 붙여서 읽는 방법을 취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가......?”(2:24)로 읽는다.

다른 이들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왕좌에서 쫓겨났다는 전설을 채택하여 전도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소원(疏遠)된 때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이들은 전 1:12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 다른 견해는 비정통적인 서술 방식인 탈굼(Targum)과 같이 의역함으로써 곤경을 면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해석자들은 흔히 알레고리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통해 상충되는 표현들을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성경의 표준적교훈에 맞추려고 하였다. 대부분의 보수주의 성향의 주석가들 역시 이러한 경향을 따라 알레고리(allegory) 해석 방법으로 성경의 교훈에 부합시키려는 시도를 해왔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모세오경에 적용되었던 문서설이 전도서 연구에도 영향을 미쳐 지그프리트(Siegfried)는 전도서를 9개의 기본문서(Q 1, 2, 3, 4, 5, R 1, 2, E 1, 2)로 나누었다. 또한 20세기 초에 와서 그 영향이 어느 정도 완화되기는 하였으나 비평학자들의 일반적 경향은 비정통적이며(heterodox) 회의적인 성격의 원문서(original)에 여러 사람의 설명과 해석이 첨가 또는 삽입되어 현재의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전도서가 잠언처럼 지혜로운 격언들을 엉성하게 조립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전도서의 처음 부분(1-6)에서만 연관성 있는 논증이 나타나며 둘째 부분(7-12)은 실질적인 다양한 훈계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20세기 초의 비평가들은 전도서가 서로 모순되는 세 사람(회의주의자, 지혜서 기자, 신실한 신자)의 견해를 조합한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더 이상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전도서의 구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들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 견해로 압축된다. 먼저 오랫동안 유행되었던 방법으로 224-26; 518-20; 815-17; 117-10절에 나타나는 쾌락에 관한 주제의 반복이 네 개의 주요 부분의 논증을 마무리짓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도서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112-69: 인간의 모든 수고의 한계성(인간의 수고는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610-116: 인간의 지혜의 한계성(인간은 알 수 없고 발견하지 못한다)으로 나눈다.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이 두 부분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인 13-11절은 12절에 나타난 인간 수고의 헛됨과 무익함의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117-1214절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삶을 즐길 것(11:7-12:7)과 전도서가 말하는 주제의 반복(12:8)에 이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것이라(12:13-14)는 결론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 경향은 전도서의 근본적 통일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특히 לבה לכה םילבה לבה”(하벨 하바림 하콜 하벨)이란 표현에 의해 수미쌍관법(inclusio)을 형성하는 12-128절의 통일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지 129절 이하의 결론부(epilogue)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첨가된 주석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면 고디스(R. Gordis)는 전도서의 회의주의적, 세속주의적 내용에 매료되면서도 정통적 교훈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어떤 편집자에 의해 이 부분이 첨가되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막연한 가능성에 근거한 가설에 의해 그것이 원본 문서를 가정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가정하는 전승사적 방법이든 간에 한 문학 작품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 하지 않다. 특히 성경의 경우 그러한 가설들이 확실한 내적 증거에 의해 증명되기 전에는 통일성이 반드시 고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권위 있는 정경으로 받아들인 구약은 그것이 최종 형태의 본문이라는 정경 비평’(Canonical Criticism)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전도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전통적인 견해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진다. 전도서를 서론(1:1), 본론(1:2-12:8), 결론(12:9-14)으로 보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본론에 해당하는 12-128절은 םילבה לבה’(하벨 하바림)이란 표현에 의해 수미쌍관법(inclusio)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본론 부분은 내용상 무신론적 세계관을 다루고 있는 12-226절과 유신론적 세계관을 다루고 있는 31-128절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로 둘러쌓인 본문이 전도서의 본론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도서는 서론(1:1)과 본론(1:2-12:8) 그리고 결론(12:9-14)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주제에 가장 적합한 구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도서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세분할 수 있다.

서론(1:1)

본론(1:2-12:8)

1) 세속적 세계관, 혹은 무신론적 세계관에서 바라 본 삶의 의미 추구(1:2-2:26)

2) 신앙적 세계관, 혹은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바라 본 삶의 의미 추구(3:1-12:8)

결론(12:9-14)

 

3. 계시로 주어진 전도서의 신적 권위

 

전도서가 신적 권위를 가진 계시 차원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코헬렛의 말씀이라”(1:1)고 선포함으로써 모든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일반적으로 선지서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전도서가 선지서들과 그 성격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선지서들의 서론과 비슷한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 선지서들에서 그와 같은 서론이 예언적 계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전도서 역시 같은 기능을 가질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선언은 동시에 전도서의 내용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지서들의 본질을 암시함에 있어 대개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전도서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코헬렛, 다윗의 아들(자손), 예루살렘 왕이라는 표현을 도입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다윗의 언약을 계승한다는 정통성을 주장하게 한다. 이것은 다윗의 자손이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고 하는 왕국 언약 계승자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 말은 신약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1:1; 9:27; 12:23; 15:22; 20:30, 31; 21:9, 15; 22:42; 10:10:47, 48; 12:35; 18:38, 39; 20:41).

다윗의 자손,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표현은 영원한 왕권을 이어받은 왕적 통치권을 계승한 메시아적 인물을 지시하고 있다. 전도서는 예루살렘의 왕을 가리켜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왕’(1:11)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말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 최고 통치권자의 직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강조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전도서는 단순한 현자의 말이기 이전에 교회를 다스리는 메시아적 인물이 다윗의 약속과 관련된 일, 곧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산업과 관련된 일을 그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선지자적 계시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통치자로 위임을 받았으며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모든 이스라엘 왕의 대표적 위치에 서 있는 메시아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전도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의 독특한 표현 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은 일상 언어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이해되는 용어들이다. 이것은 성경의 용어들이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첨예화된 특수한 용어가 아니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용어들은 아주 독특하면서도 고유하며 구체적이고 역사적 증거를 가지는 것으로 일반 문서들과는 아주 다른 예외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성경의 용어들은 어느 시대의 어떤 언어 방식으로 대역시킨다 할지라도 그 의미가 변하지 않으며 어색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성경의 언어들은 하늘의 비밀에 대한 내용이 용어들의 내용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언어들과 사용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제1 저작자이신 성령님의 영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의 용어들은 모든 시대를 거쳐 성경 언어의 고유성과 그 방식의 독특성을 간과하고서는 그 계시를 주시는 성령님의 비밀스러움을 풀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독특성은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 그 진리를 확신시키는 고유한 능력과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1)는 표제에서 코헬렛(전도자)’이 의미하는 바 그 내용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오로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기록되어진 다른 성경들의 도움과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 열어질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코헬렛를 미지의 인물로 남겨두고 의도적으로 그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저작자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고 있는 다른 성경들처럼 전도서역시 신적 계시의 전달을 위해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코헬렛의 정체가 신비스럽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도자로 번역된 תלהק’(코헬렛)이라는 단어 속에 담겨 있는 신비스러움조차 제대로 발견해 낼 수 없다는 점에서 전도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한다.

코헬렛이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코헬렛이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12:9-10)는 말씀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적 계시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전도서임이 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동시에 성령님의 조명과 도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4. 전도서의 메시지

 

전도서를 지배하는 주된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학자들은 허무주의, 쾌락주의, 세속주의 등 다양한 주장을 펴왔다. 사실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발견되며 미묘한 감정과 관점의 변화에 주의하지 않을 경우 전도서의 표현들은 그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전도서의 주제처럼 보이는 허무’(לבה)는 전도서의 처음(1:2)과 끝(12:8)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본문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허무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1:14; 2:11, 17, 26; 4:4, 16; 6:9), ‘...보다 뛰어남이 없는 것’(3:19; 5:11; 6:8) 그리고 모든 수고가 무익한 것’(2:11, 22; 3:9; 5:16; 6:11) 등으로도 묘사된다. 이 단어는 덧없는 것이나 일시적인 것이며(6:12),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과 평행을 이루며(3:19; 7:15; 9:9; 11:10), 수수께끼처럼 불가해 한 것(6:2; 8:10, 14)과 보이지 않고 희미한 것(11:8)으로도 묘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부정적 사상들이 전도서의 근본 사상이며 코헬렛이 의도하는 메시지인가 하는 질문에는 의문이 간다. 왜냐하면 여러 시편들을 비롯해 특히 욥기에서도 회의와 비탄과 절망이 표현되어 있지만 부정적인 것 그 자체로 끝나는 예를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이 허무주의 등과 같은 부정적인 사상을 가르치기 위해 이처럼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4:27)는 보도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주님은 모든 구약 성경을 가지고 메시아에 관한 일을 설명하셨다. 따라서 전도서 역시 메시아에 대한 일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전도서는 신약에 전혀 인용되어 있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서의 허무’(לבה)를 염두에 두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8:20)고 말하고 있다. 이 말속에서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들 역시 모든 피조물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코헬렛이 토로한 감정과 바울 사도 사이에는 모든 것이 허무에 속한다는 일치감을 서로 교감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 허무의 개념을 코헬렛로부터 이어 받았으며 그렇게 하시는 이의 목적이 따로 있다고 다음 절에서 밝히고 있다. 바울은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8:21)고 밝힘으로써 모든 허무에 굴복되어 있는 피조물들이 구속되는 영광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사상은 전도서의 결론을 통해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는 코헬렛의 최종 결론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9:17)는 말씀으로 코헬렛이 도달한 결론에 손을 들어 주셨다.

이 사실은 전도서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건설하기 위해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고 장차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는 다른 구약성경들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구약 계시가 여전히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삶의 목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도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5. 잘못된 세계관들에 대한 코헬렛의 평가

 

1) 무신론적(세속적) 세계관에서 찾는 삶의 의미’(1:2-2:26)에 대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1:2-3)라는 코헬렛의 목소리는 전도서의 근본 관심사를 밝히고 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코헬렛의 결론은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는 질문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코헬렛은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다.

코헬렛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세속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철학적 관점에서 해답을 추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1:3). 여기에서 코헬렛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인간의 수고, 즉 인생의 삶에 국한되어 있는 삶이 인간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묻고 있다. 이것은 코헬렛의 관심 대상이 초월 세계나 사후 세계가 아닌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삶에 대한 것이며,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 질문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코헬렛은 먼저 자기 바깥 세계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방법을 도입한다. , 바람, (이것들은 헬라 철학에서 이 세상을 이루는 기본 원소로 취급된다) 등의 운행을 관찰하면서 이것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코헬렛은 결론짓는다(1:8). 새로움이 없고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 틀의 한계가 자연 법칙이든 아니면 일종의 질서이든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1:9).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의 답변으로 코헬렛은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4)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코헬렛은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코헬렛은 이 세상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을 바꾸어 삶의 의미를 찾아보기 위한 방법을 도입한다. 먼저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인간의 이성에 비친 세계와 삶은 불가해하며(1:15), 삶의 원칙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마음의 고통만을 더할 뿐 해답을 찾지 못한다고 고백한다(1:18). 이로써 코헬렛은 이성의 한계에 부딪친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진보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 이성의 한계에 부딪친 결과 이번에는 이성적인 방법 대신 새로운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곧 인생의 삶 속에 뛰어들어 실제적인 삶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방법이다. 인간 이성 대신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코헬렛은 사업, 권력, 재물, 지성 등 최상의 것들을 누려봄으로써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추구했던 최상의 삶이 죽음으로 종말을 고한다는 일반적인 사실 앞에 멈추어 서고 만다(2:1-11).

결국 코헬렛은 자신의 경험적인 삶의 방법을 통해서도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2:11)는 코헬렛의 고백은 인생 역시 어떤 틀 안에 갇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그가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든 그 삶은 죽음과 함께 끝나버리며 죽음 저편으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심지어 지혜자라 할지라도 그가 이 세상에서 누렸던 삶의 의미마저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고 만다(2:12-16). 이러한 현실 앞에서 코헬렛은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2:17-21).

죽음이라고 하는 한계에 부딪쳐 삶의 의미를 상실한 코헬렛은 해 아래 사는 짧은 일생 동안 최선의 삶이란 결국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24). 하지만 그러한 낙을 누리는 것조차도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누릴 수 있는 선물임을 지적하고 있다(2:25-26).

이성과 죽음의 한계, 자신의 삶을 자기가 지배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 앞에서 인생은 자칫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곧 인생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라고 하는 존재 바깥에 있는 다른 존재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세상나 자신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겠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코헬렛은 이 세상의 질서와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백은 1-2장에서 보였던 자연계를 중심으로 삶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코헬렛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하는 한계를 하나님의 정하신 때,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 또는 계획과 연관시킴으로써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한계의 효력들을 넘어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게 만든다.

코헬렛은 인생을 움직이시는 초월자가 맹목적인 숙명이나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세상사에 초연하거나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역사와 인생에 개입하시고 만사를 다스리고 주관하시며 또한 만사를 아름답고 의미 있게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점에서 한 가닥의 소망을 찾고 있다(3:11).

코헬렛은 삶이 보여주고 있는 한계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함으로써 삶의 한계가 더 이상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것, 즉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오히려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세상나 자신밖의 존재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나아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세속인간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2) 유신론적(신앙적) 세계관에서 찾는 삶의 의미’(3:1-12:8)에 대해

이 세상과 자신의 이성 그리고 경험에 근거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코헬렛은 초월자이신 하나님께 눈을 돌림으로써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에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에 코헬렛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3:1-8).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사를 그 때에 따라 아름답게 행하신다”(3:11)고 말함으로써 만사에 때를 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만사를 행하신다는 것은 만사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들어 세계 밖의 존재이신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뜻한다. 이것은 신앙과 비신앙의 차이이다. 앞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본능에 대해 말하고 있는 112; 224절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전도서 1-2장이 무신론적 세계관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반면 3장 이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3장 이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이 전제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이 12-226절과 31-128절의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점이다. 전자의 경우 하나님 없는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지만 코헬렛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도 12-226절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오히려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삶은 여전히 불가해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3:10).

모든 것은 적당한 시기가 있다는 것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현명한 지혜자들조차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이성은 자신과 세상 안의 것만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으며 비록 이성에게 영원한 것, 즉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본능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일의 시종을 깨달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함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코헬렛이 제시하는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코헬렛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인생을 살도록 하셨고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주심으로써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 안에서 제 몫을 하도록 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은 그 때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인생은 모든 것을 그 원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배후에 있는 의미와 계획도 알지 못한 채 끌려 다니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3:14).

더 심각한 문제점은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하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며 불의와 부조리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문이 일어난다는 점이다(3:16). ‘공평과 의가 있어야 할 곳에 오히려 이 존재한다는 이 사실에 대해 코헬렛은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4:1)는 말로 시작하여 이 문제를 4-6장에서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코헬렛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3-14)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순경과 역경을 뒤섞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는 그 앞에서 속수무책임을 고백한다.

코헬렛은 만사에 정한 때가 있는 만큼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이 시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3:17), 실상 의인이 그 의로운 중에 망하고 악인이 오히려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할지라도 어느 한 쪽만을 택할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둥글게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7:15). 이것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생활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코헬렛은 세상에서 선만을 행하고 전혀 죄짓지 않는 의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냉소적인 반문을 던지고 있다(7:20). 무엇보다도 부조리 중의 부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관계없이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같은 종말을 맺는다는 점이다(9:1-3). 사람의 종말은, 그가 의인이든 악인이든, 짐승의 종말과 별다를 것 없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나며 그 의미도 소멸되고 만다. 그 이유는 비록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어 일단 죽고 나면 다시 이 세상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9:5-6). 따라서 유일한 삶의 현장인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9:4) 차라리 이 세상에서 근심을 잊고 삶을 즐기는 길만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9:11)는 고뇌처럼 들리는 코헬렛의 한탄은 결국 인생의 종말이 죽음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염세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에 코헬렛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까지도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코헬렛이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 그런데 이러한 염세주의적인 생각은 이 세상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더욱이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언젠가는 삶의 의미도 알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날이 올 것이지만(11:8) 인생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쾌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그래서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11:9)는 말처럼 죽음이 오기 전에, 종말이 오기 전에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헬렛은 쾌락주의를 전도서의 결론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도서의 본론(1:2-12:8)이 쾌락주의를 권고하는 말로 끝나지 않고 영육이 분리되어 육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죽음으로 끝나며, 전체 내용을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전도서는 쾌락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허무주의적인 고백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고백을 부조리한 삶 앞에 절망하여 부르짖는 허무주의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결론을 통해 어떤 긍정적인 것을 암시하려는 반의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128절은 단순히 허무를 절감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던 논리적인 필연성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기 때문이다.

 

3) 전도서의 탐구 논리 방식과 그 결론으로서 허무의 의미

전도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적인 탐구를 시도한 결과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전도서는 먼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에 대한 실험을 통해 입증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1:13),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1:16),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1:17) 등과 같은 구절들이 30여 회나 등장한다는 것은 코헬렛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나름대로 탐구하고 있는 실험적인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들은 확실하게 입증된 진리의 진술이 아니라 우선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본론(1:2-12:8)에서 코헬렛은 무신론적 시각에 기초한 첫 번째 탐구(1:2-2:26)와 반대로 유신론적 시각에 근거한 두 번째 탐구(3:1-12:8)의 결과 모두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결론은 먼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그 가설을 부정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긍정적인 해답을 추구하고 있다.

첫 번째 탐구에서 코헬렛은 무신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삶을 관찰하며 실험한 결과 삶이 무의미하다는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이 부정적인 결론은 결국 하나님이 없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라는 잘못된 전제의 필연적 귀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코헬렛은 해결의 실마리를 하나님에게 근거한 새로운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같은 방법으로 두 번째 탐구도 진행된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에서 출발한 코헬렛은 삶의 부조리 앞에서 허무주의적인 부정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잘못된 전제들이 있었다. 즉 먼저 하나님께서 만사에 부여하신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사람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서 꼭두각시 놀음을 한다는 전제와 삶의 부조리, 특히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같은 종말을 맞게 함으로써 의로운 자의 경건한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특히 죽음에 의해 이 세상의 삶과 사후의 삶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어서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의 의미는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어 버린다는 가설도 마찬가지이다. 사후 세계에서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은 이 세상만이 의미 있는 삶의 장이며 사후 세계는 그림자처럼 무의미한 세계라는 결론을 유발시키고 있다.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진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고, 삶의 부조리 앞에서 고통하며 그 고통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쾌락을 누리다가 죽음과 더불어 허무하게 삶을 끝내는 존재로 이해하게 만든 것들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전제들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욥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름대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지혜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로운 논란과 논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풀 수 없었던 한 가지 전제, 즉 왜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있었던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서 전개된 대화의 내용이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1:8)고 하신 말씀처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의 전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욥기에 등장하는 지혜자들, 심지어 욥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자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논증을 할지라도 그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부정되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친히 등장하기까지 그들은 새로운 논증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잘못된 전제들에 따른 가설들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적인 부정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코헬렛은 1213-14절에서 이 결론들을 부정함으로써 지금까지 진행된 논증에 대해 대반전을 시도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12:13-14)는 선언은 앞서 제시된 전제들에 대한 반론을 펼치기 취함이다.

 

6. 전도서가 주장하는 진정한 세계관(12:13-14)

 

코헬렛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혀 알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הרות(토라, 이때 토라는 구약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선지서들과 성문서들을 포함한 대표적 개념이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삶의 원칙을 제시하심으로써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또한 이 계시들이 계명의 형태로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기계적인 법칙에 따라 살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살도록 하신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꼭두각시로 취급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다.

나아가 이 세상이 아닌 그 날에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경건한 삶이 최종적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이 사후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의 의미는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보상은 마침내 내세에서 받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세에서의 삶이 그림자와 같이 무의미한 삶이 아니며 그 삶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를 갖는 삶이라고 코헬렛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도서의 관심이 여타의 종교들이 추종하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가치를 포기하고 내세의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내세주의에 대한 것은 아니다. 코헬렛은 처음부터 해 아래에서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코헬렛은 이 세상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삶의 중심을 이 세상이 아닌 내세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있다. 내세를 의식하는 내세 중심의 삶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누리는 현세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전도서는 말하고 있다.

전도서의 근본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이 세계나 자신밖으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생은 삶의 중심을 내세에 두어야 한다고 전도서는 가르친다. 이것은 참된 의미의 세속적 삶을 살기 위해 세속을 초월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주장처럼 들린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는 이 세상에서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세속주의를 극복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전도서는 구약적인 의미에서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닌’(already-and-not yet) 구약의 성도들에게, 즉 이미 하나님 백성이지만 그 완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마치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내세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사상과 일치한다(5:1-4)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이 헛됨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 후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도 문제를 일으키는 고난과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의 일상 생활에서 갖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확신에 대해 언급했던 것처럼(8:17-39) 전도서 역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삶 속에서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신자들은 마치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일상 생활 속에서조차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표방하는 이스라엘과 그 구성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존재 의미이며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도서는 이러한 일상적인 삶과 예배와 봉사 속에서도 성도들은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전도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며 그 안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모든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일관적인 사상이며 전도서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는 다른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확고한 정경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마치는 말

 

코헬렛은 전도서 12-128절에 걸쳐 철학적 논제를 통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였으며 그 결과 인간은 허무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러한 논리적인 추론이 단순한 철학적 과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시였음을 129-12절에 거쳐 논증하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개했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적 논제만으로는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계시로써 주어진 전도서의 가르침을 통해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인 승인을 전제로 마침내 코헬렛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핵심을 선포하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이 말씀이 신적 계시의 권위에 근거하여 코헬렛이 최후로 주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철학적 논제의 최종 결론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다는 것은 이것이 곧 결론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곧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코헬렛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야 할 이유를 명시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12:14)는 선언처럼 인생의 삶은 그것이 드러난 것이든 숨겨진 것이든 마침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심판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한다는 점에서 동시적이며 지향적이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말씀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관계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처음부터 코헬렛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아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의미의 근원이시다. 비록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대신 하나님은 계명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셨다. 때문에 인생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 사실은 최초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 아담을 거기 두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명령을 기계적으로 순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행동에 옮기는 자유를 주셨다. 이것은 그에 따른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꼭두각시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세상이 부조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부패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불공평한 것이 죽음이지만 그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에서 불공평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실 코헬렛이 바라본 죽음의 불공평성은 현세를 가리키는 해 아래라고 하는 제한된 시, 공간의 영역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코헬렛은 인간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 아래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의미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있는 해 아래의 삶을 넘어 존재하는 죽음 이후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해 아래에서의 삶은 허무로 종결되지만 그 너머에 있는 내세에서 발생할 일, 즉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 이후의 부활이야말로 해 아래에서의 삶을 의미 있게 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 33최후 심판의 제3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장차 심판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확신시키고자 하셨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멀리하게 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역경 가운데 있을 때 큰 위로를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벧후 3:11,14; 고후 5:10,11; 살후 1:5-7; 21:27,28; 8:23-25). 마찬가지로 그는 그날을 사람들에게 감추어 두어서 사람들이 육욕적인 안전감을 떨쳐 버리고 주께서 언제 오실지 그 시간을 알지 못함으로 항상 깨어 있도록 하셨고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하고 말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케 하셨다(24:36, 42-44; 13:35-37; 12:35, 36; 22:20).”

경건한 성도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소망은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두려움의 날이 되겠지만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 날을 통해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해 아래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모든 삶의 정황과 형태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전도서에서 코헬렛은 최종적으로 현세의 인생을 해 아래로부터 내세인 영생에게로 눈을 돌리게 유도하고 있다. 영생이 없다면 인간은 해 아래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종결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 즉 내세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그 안에서 인생이 누리는 영원한 삶을 통해 해 아래에서의 삶이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전도서는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코헬렛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신적인 지혜만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출처 : 교회와 성경
글쓴이 : 송영찬 원글보기
메모 :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