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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가서 8장 - 2>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9. 17.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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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8장 - 2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가정은 에덴동산에서 처음 아담과 하와가 세운 그 가정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가정은 신성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 가정제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처음 제정하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이 가정을 해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점을 귀하게 여기시어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6)고 단언하셨다. 이 말씀은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의미도 포함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아무도 자신의 가정이나 타인의 가정을 해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다. 가정은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언제나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술람미 여인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8:6-7).

 

1. 지혜의 노래(8:8-9)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8:9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필자역)

여인들의 노래(합창)

우리에게 한 작은 누이가 있으니

그녀에게는 가슴이 없구나.

그녀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꼬.

그녀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녀가 성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이제 아가서는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팡파르를 준비하고 있다. 이 웅장한 팡파르의 감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합창단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8:8-9).

이 노래의 화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지금까지 등장한 예루살렘의 딸들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합창단의 노래들은 일종의 내러티브(narrative)와 같이 문맥의 흐름을 위한 해설이 필요하거나, 시간 혹은 장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기 위해, 때로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징조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거나 혹은 주인공의 말에 대한 동의를 표함으로써 독자들에게도 동의를 구하기 위한 문학적 기법으로 사용된다.

이 합창단의 노래가 앞서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8:6)고 한 술람미 여인의 노래에 대한 응답이라면 많은 주석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노래가 처녀 술람미 여인의 처녀성을 방어하기 위한 내용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성벽(המוח)과 성문(תלד)은 사랑의 정절을 단단하게 보호하는 능력을 상징한다고 하면서 성벽 위에 세운 은 망대와 성문을 장식한 백향목 판자들로 술람미 여인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더해지는 것으로 말한다. 이러한 판단 아래 이 노래가 술람미 여인의 정조를 지켜주기 위한 내용으로 화자 되고 있다.

심지어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를 직설적으로 받아들여 술람미 여인이 아직 어린 시절부터 장차 혼인에 이르기까지 그 오빠들이 나서서 술람미 여인의 처녀성과 순결을 보호해 주겠다는 내용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본문의 흐름과 상관없는 지나친 해석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은과 백향목 판자들은 방어적인 성채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방어를 위함이 목적이라면 청동이나 철 또는 단단한 목재가 필요할 것이다. 은과 백향목 판자들은 무언가를 호화롭게 장식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내용이 남편에 대한 정절을 수호하기 위한 의미나 혹은 어린 처녀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한 의미로 이해되기에는 미흡하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성벽과 성문이 방어의 도구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도 어색하다.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라는 이 합창단의 노래는 술람미 여인의 모습이 잘 꾸며진 성숙한 여성과는 달리 소박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성벽(המוח)과 성문(תלד)은 그 단단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 외에 특별히 장식이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방어를 위한 가장 단단한 시설물일 뿐이다.

여기에서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이라는 말은 누가 그녀에게 말을 거는 날에라고 직역되는데 이런 용례는 일반적으로 약혼한 여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관용구이다(삼상 25:39). 따라서 이 말은 그녀가 약혼한 날에를 의미하며 술람미 여인이 신부로서 아직 단장하지 않은 상태의 수수한 여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처럼 아직 완숙한 여인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장식이 없는 성벽처럼, 아무런 꾸밈이 없는 성문처럼 단조롭고 초라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때문에 합창단의 노래에서는 그 성벽 위에 은으로 ’(개역성경은 망대)을 지으며, 그 성문은 백향목으로 장식을 함으로써 화려하게 꾸며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때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도시는 술람미 여인을 상징한다. 사실 성벽 위에 은으로 만든 궁이라든지 백향목 판자로 치장을 한 성문과 같은 이야기들은 그곳이 호화로운 도성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삼하 7:2, 7; 22:14-15; 3:7).

특히 술람미 여인이 백향목 판자로 꾸며졌다는 것은 그 화려함보다는 그녀의 신분이 위엄 있고 영예롭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삼하 13:18 참고). 특히 여기에서 백향목 판자는 기이한 형상으로 아름답게 새겨진 값비싼 장식품으로 이것으로 술람미 여인을 두른다는 것은 그만큼 술람미 여인이 존귀한 위치에 있음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지금 이 합창단의 노래가 앞서 사랑의 숭고함을 노래하고 있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에 이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술람미 여인의 인품이 매우 고상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술람미 여인은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8:6)고 노래했는데 이에 대한 합창단의 응답으로 사랑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숭고한 자세에 대한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처음 아가서가 시작할 때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1:9-11)고 한 솔로몬의 노래를 돌아보게 한다.

이 노래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아름답게 보석으로 장식한 암말에 비유하면서 당시 왕실의 말들을 구슬 달린 목걸이와 귀걸이로 장식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킴으로써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그녀의 인격과 성품을 최상의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는데 본문의 합창단의 노래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과 헌신을 다짐하는 술람미 여인의 숭고한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음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 내용은 다음에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8:10-13)

 

8:10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8:12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8:13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필자역)

술람미 여인의 노래(독창)

나는 성벽이요 내 가슴은 탑들과 같으니

나는 그의 눈에 평화를 주는 여인이라오.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그가 그 포도원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

각 사람이 그 열매로 은 일천을 가져오게 하였다오.

나의 것인 내 포도원이 내 앞에 있도다.

, 솔로몬이여, 당신은 일천을 갖겠고

그 열매를 지키는 자들은 이백을 갖겠나이다.

 

솔로몬의 노래(독창)

그 동산에 앉은 여인아,

친구들이 네 소리를 경청하나니

나로 그것을 듣게 하려무나.

 

합창단의 노래를 이어받은 술람미 여인은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8:10)라고 아주 소박하게 응답하고 있다. 여기에는 일종의 언어유희가 등장하는데 앞서 합창단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장식함으로써 그녀의 고매한 인품을 노래하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자기 자신을 아주 단조롭게 표현함으로써 겸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언어유희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리켜 너의 목은 다윗의 망대와 같다’(4:4)고 칭송한바 이야기를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은 처음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가리켜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1:6)라고 한 말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 포도원의 모티프는 곧바로 이어지는 솔로몬의 포도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 노래에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아내로서 자신의 존재 의미에 가치를 유일하게 부여하고 있는 것은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처럼 그녀는 단지 솔로몬의 눈에 샬롬(םולשׁ), 즉 화평으로 보인다는 사실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 여인이 샬롬(םולשׁ)으로 보인다는 것은 동시에 술람미 여인 역시 솔로몬의 눈동자에 비취고 있는 샬롬(םולשׁ)을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확실히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있어서 샬롬 그 자체이며 동시에 솔로몬에게서 그 샬롬을 찾았다. 이 사실만으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그녀가 찾은 샬롬은 다름 아닌 솔로몬의 이름이기도 하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솔로몬, 즉 쉘로모(המלשׁ)를 찾음으로써 샬롬(םולשׁ)을 찾은 것이다. 또한 자신이 쉘로모(המלשׁ)에게 샬롬(םולשׁ)이 됨으로써 솔로몬 역시 샬롬(םולשׁ)을 찾은 것이다. 여기에서 샬롬, 즉 평강은 에덴동산이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에덴동산은 샬롬이라는 말 한마디로 대신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샬롬은 죄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술람미 여인은 혼인 안에서 솔로몬과 한 몸이 되어 그에게 샬롬이 되었고 그로부터 그 샬롬을 찾았다. 즉 그들은 서로에게 샬롬이었고 샬롬을 누리게 하였다. 이 샬롬은 에덴동산에서도 그랬듯이 지금 그들의 가정을 세워나가는 원동력이며 마침내 이 가정이 널리 확장되어 교회를 이루게 되며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표명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이 될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그 나라는 바로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22:1-2)는 말씀처럼 평강의 나라, 곧 샬롬의 나라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께서 창설하셨던 그 에덴동산처럼 장차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리는 새로운 에덴동산을 주실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요한계시록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22:14-15)고 선언하고 있다(ITEM 10 참고). 이 궁극적인 샬롬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가 곧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라고 하는 혼인 언약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8:5b)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가 의미하는 바와 잘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솔로몬의 눈에 샬롬이 되고 솔로몬의 눈에서 샬롬을 찾은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풍요로운 상태에 대해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8:11-12)라고 말하고 있다.

솔로몬의 포도원이 있었다는 바알 하몬’(ןוֹמ󰕗 ל󰘞󰔨󰔶)()의 주인혹은 재물들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표현대로 그 포도원은 상당히 기름진 곳이며 열매의 결실도 좋아서 포도원지기들은 솔로몬에게 은 일 천을 바치고 그 맡은 자들에게는 은 이 백이 돌아갔을 정도의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은 하나로 계산되었는데(7:23) 이 내용은 그 소출의 대가로 은 일천을 상납한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당시 숫양 한 마리가 은 2세겔이었음을 볼 때(5:15 참고) 이 포도원으로부터 많은 소득이 나온다는 것은 솔로몬의 풍요로움을 상징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바알 하몬이라는 말 자체가 이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제로 포도원이 있었다는 지명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알 하몬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설령 그 지명이 밝혀진다 할지라도 본문의 의미 전달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 하몬과 관련해 아가서에서 포도원이 재물과 소유뿐 아니라 여성의 성을 대변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솔로몬의 부와 수많은 처첩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색할 따름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본문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결코 드러내지 못한다.

오히려 문맥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술람미 여인이 왜 이 상황에서 자신을 가리켜 솔로몬의 존귀한 포도원 같은 존재라고 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게 속한 나의 포도원은 내 앞에 있도다는 문구는 앞서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가리켜 자신은 평범한 성벽의 망대에 불과하다(8:10)고 말한 내용과 연결짓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은 일 천을 받는 값비싼 포도원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술람미 여인이 이처럼 솔로몬에서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은 비록 자신은 평범한 성벽의 망대 같을지라도 서로에게서 샬롬(םולשׁ)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일종의 문학적 복선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1:6)라고 하면서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은 일천을 받을 정도의 포도원이 바로 자기의 포도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혼인 이전과 이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그때에 비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바알 하몬은 바로 술람미 여인 자신을 가리키는 상징적 언어이며 동시에 왜 솔로몬이 바알 하몬의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는 열쇠가 된다.

처음 술람미 여인이 아직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신이 포도원지기로 있는 포도원조차 제대로 가꾸지 못했던, 다시 말하면 아무런 이득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혼인을 통하여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은 일 천의 값어치가 있는 이익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은 전혀 생산성이 없었던 무익한 상태에서 은 일 천이나 되는 소산을 산출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미지의 변화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요즘같이 화폐단위가 큰 시절에는 은 일 천의 값어치에 대해 크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지만 당시 상황에서 은 일 천의 값어치는 최상의 가치를 상징하기 위한 숫자임에 분명하다(7:23을 참고하라). 이와 비슷한 가치의 내용을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낼 때 은 1천 세겔을 보낸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20:14). 여기에서 은 1천 세겔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보일 수 있는 최상의 호의와 예우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리라고 덧붙이고 있다. 솔로몬뿐 아니라 포도원지기에게도 은 이백이라는 소득, 10분의 2에 상당하는 소득이 주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이 표현이 술람미 여인의 처녀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던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처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아니라 풍성한 소출을 보장하는 포도원으로 비유되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과의 관계가 가져다주는 유익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 안에는 결코 그 어떤 화폐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샬롬이 함께 하고 있으며, 이 상태야말로 에덴동산의 샬롬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솔로몬은 기꺼이 이 놀라운 사랑의 부요함을 오랫동안 마음속의 노래로 간직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에 솔로몬은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8:13) 하고 술람미 여인에게 요청하고 있다.

지금까지 아가서는 남자의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여자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남녀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남녀가 서로를 향하여 갖는 사랑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나아가 그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권력과 사람의 가산을 다 털어서라도 얻을 수 없으며, 큰물과 홍수로도 그 사랑을 꺼지게 하거나 엄몰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궁극적으로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에게서 구현되는 샬롬의 상태를 노래했는데 이제 그 지혜로운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에서 너 동산에 거한 자야’(םינגב תבשׁויה)라는 호칭은 그동안 아가서가 줄곧 강조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3:6; 6:10; 8:5a)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합창단들이 답변을 해 왔는데 여기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솔로몬이 너 동산에 거한 자야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지금까지 아가서의 주인공인 술람미 여인에 대해 이야기한 그 모든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솔로몬은 그 주인공인 술람미 여인으로부터 지혜가 담긴 이야기가 흘러 나와 모든 청중들이 듣기를 원하고 있다. “나로 듣게 하라는 간청은 훨씬 더 솔로몬의 간절한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가 듣고자 하는 그 이야기가 바로 노래 중의 노래’(1:1)이다.

솔로몬은 바로 자신이 듣고자 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에덴동산에서와 같은 샬롬의 풍요로움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혼인을 통해 이루어진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가정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강화시킴으로써 온 세상에 세워질 가정으로 말미암아 온 땅에 샬롬의 나라가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3. 노래 중의 노래(8:14)

 

8:14 나의 사랑하는 이여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필자역)

술람미 여인의 노래(독창)

서두르소서, 나의 사랑하는 이여.

향기나는 산 위에 있는 노루나 어린 사슴처럼.

<5. 끝을 알리는 피날레>

 

샬롬의 나라가 구현될 것을 바라고 있는 솔로몬에게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8:14)는 술람미 여인의 응답은 솔로몬의 간절한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짐으로써 온 세상에 이 샬롬의 기쁜 메시지가 널리 퍼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아가서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마지막 메시지는 다시 잠언을 돌아보게 한다. 잠언에서 지혜(המכח)지혜로운 여인으로 의인화 한 것은 매우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다(1:20-33; 3:13-20; 4:5-9; 7:4; 8:1-36; 9:1-6). 이 여인과 상대적으로 등장하는 여성이 미련한 여인(9:13-18)이다.

지혜를 의인화하게 된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일치된 견해는 없다. 지혜의 의인화가 이방 여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지혜의 의인화를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의 여신들에 관한 신화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추측한다.

폰테인(C. Fontaine)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의 여신들을 참작하여 여호와 신앙에 맞는 지혜 여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족장들의 유일신 사상에 저촉함 없이 하나님의 여성 이미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심리적인 욕구를 만족 시켰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했다.

그러나 랑(B. Lang)은 이러한 견해를 반박한다. 그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에서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위격(位格)을 필요로 했는가에 대해선 밝혀진 바 없으며 오히려 이스라엘 신앙은 여호와에 대한 유일 신앙이 절대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랑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쉐키나(הנכשׁ)를 의인화하지 않는 것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지혜를 여성으로 묘사하게 된 것은 호크마(המכח)가 여성 명사이고 여성으로서의 의인화가 이스라엘의 취향에 맞았으며 지혜의 신적, 왕적 속성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지혜의 의인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기대할 수 없지만 지혜 여인에 관한 성서의 묘사는 그 자체로 새롭고 독특한 것이며 독립적이라는 점에서 깊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와 관련해 지혜를 하나님의 속성이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욥기(28:27)의 묘사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창조하셨으며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위에 지혜를 부어주셨고 선민 이스라엘에게 아낌없이 주셨다는 보도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지혜에 관하여 잠언에서는 욥기의 보도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잠언에 따르면 여호와로부터 지혜가 탄생했으며 창조 이전에 지혜가 존재했으며 지혜는 여호와의 창조 행위들을 목격하면서 모종의 역할을 했으며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며 뛰놀았으며 지혜가 인간들을 기뻐한다고 묘사한다(8:22-31).

그리고 나서 지혜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8:32)고 주장하며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8:35-36)고 선포한다.

이에 앞서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묘사되었다(3:19-20,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는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지혜는 자신을 신적 존재로 주장하고 있다). 비록 폰 라드(G. von Rad)가 지혜를 창조의 자기 계시라고 주장하였다 할지라도 이 말은 지혜가 자신을 가리켜 선포한 내용을 모두 함축하지 못한다.

오히려 지혜는 자신을 여호와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한다. ‘지혜는 피조물에 대한 여호와의 바라심이며 이 세상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임재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피조물과 이스라엘에게로의 의사소통이다. 동시에 지혜는 자신을 청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8:32-34)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한 양상(aspect)이 아닌 독립적 존재이다.

잠언 1-9장은 지혜라는 존재에 신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던 생사의 선택권을 택하라(30:15)고 하셨던 것처럼 이제 그 백성에게 생명을 선택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이것은 지혜가 하나님과 같은 권위자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지혜는 자신을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대변한다(8:35). 때문에 바우만(G. Baumann)지혜를 존중하는 유일한 길은 지혜의 길을 따르는 데 있다. 그 길은 넓은 의미에서 여호와 예배의 간접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고 강조한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고전 1:24)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5-17)고 말한다.

바울이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개념은 잠언에 등장하는 지혜가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개념(8:22-36)과 거의 동일하다. 이것은 지혜가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독특한 예표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지혜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바울 사도와 잠언의 지혜가 언급한 내용을 친히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잠언에서 나타나고 있는 지혜의 의인화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장 확고한 예표적인 계시로서 그 의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잠언에서는 청년에게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5:5-18)라고 말하면서 그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을 가리켜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戀慕)하라”(5:19)고 말하고 있다.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은 여인이 잠언에서는 지혜의 여인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노루와 사슴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잠언에서 등장하는 청년의 역할과 아가서에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의 역할이 서로 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노루와 사슴으로 부르고 있는 이 상황은 잠언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8:14)는 술람미 여인의 메시지는 지혜의 여인이 하는 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아가서의 흐름을 볼 때 이 두 사람의 짧은 노래 안에는 처음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들을 보고 심히 좋았더라”(1:31)고 하신 하나님의 노래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2:23)고 했던 아담의 노래가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세워진 혼인의 정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혼인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가정은 다름 아닌 샬롬의 동산이며 그것은 곧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이룩하고자 했던 바로 그 샬롬의 나라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아가서는 샬롬의 궁극적인 표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가서의 두 주인공의 이름은 모두 샬롬’(םולשׁ), 즉 평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 실질적으로 평강을 상징하는 솔로몬(המלשׁ : 쉘로모)과 술람미 여인(תימלושׁ : 슐람미트)으로 불려진다. 이처럼 두 주인공들의 이름이 상징하는바 두 주인공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혼인제도의 근본 개념과 정신이야말로 다름 아닌 샬롬’(םולשׁ)이라는 사실을 아가서는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서의 샬롬은 처음 에덴동산의 샬롬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류 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혼인제도 안에서 이 샬롬이 구현되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궁극적인 샬롬이 구현될 것이라는 놀라운 메시지를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제시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노래 중의 노래’(םירשׁה רשׁ)인 아가서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출처 : 교회와 성경
글쓴이 : 송영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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