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장 구속사 강해
자연계와 인간을 탐구하는 이성의 한계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장은 전도서의 서론(1절)에 이어 본론의 첫 번째 주제(1:2-2:26) 중 세속적 세계관에서 바라 본 삶의 의미 추구에 대한 탐구를 다루고 있다. 먼저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로부터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한 시도(2-11절)와 자기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한 시도(12-26절)를 다루고 있다.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가 지시하는 의미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전 1:1)는 전도서의 표제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잠 1:1)는 잠언의 표제 양식이 너무나 흡사해서 어쩌면 전도서와 잠언이 같은 사람의 작품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이다. 단지 잠언은 자신의 이름을 ‘솔로몬’으로 밝히고 있으며 전도서는 ‘전도자’(קהלת)라고 밝히고 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도서 구속사 서론 1항의 ‘전도서의 저자와 연대의 문제’를 참고하라).
이러한 전도서의 표제 양식은 잠언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표제 양식들(잠 1:6; 22:17; 24:23)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가 자신을 ‘지혜 있는 자’로 표시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여기에서 잠언집의 저자들이 표제어인 ‘솔로몬’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도서 저자 역시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특별히 솔로몬의 이름에 저자의 권위를 위임하고 있는 것은 솔로몬이 구속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독특함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편들은 다윗의 작품으로, 지혜서들은 솔로몬의 작품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의 고대 관습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른 것이다(왕상 4:32).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은 일상 언어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이해되는 용어들이다. 이것은 성경의 용어들이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첨예화된 용어가 아니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용어들은 아주 독특하면서도 고유하며 구체적이고 역사적 증거를 가지는 것으로 일반 문서들과는 아주 다른 예외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성경의 용어들은 어느 시대의 어떤 언어 방식으로 대역시킨다 할지라도 그 의미가 변하지 않으며 어색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성경의 언어들은 하늘의 비밀에 대한 내용이 용어들의 내용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언어들과 사용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제1 저작자이신 성령님의 영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의 용어들은 모든 시대를 거쳐 그 언어의 고유성과 그 방식의 독특성을 간과하고서는 그 계시를 주시는 자의 비밀스러움을 풀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독특성은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 그 진리를 확신시키는 고유한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전 1:1)는 표제에서 ‘전도자’가 의미하는 바 그 내용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오로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기록되어진 다른 성경들의 도움과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 열어질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전도자’를 미지의 인물로 남겨두고 의도적으로 그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저작자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고 있는 다른 성경들처럼 ‘전도서’ 역시 신적 계시의 전달을 위해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전도자’의 정체가 신비스럽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도자로 번역된 ‘קהלת’(코헬렡)이라는 단어 속에 담겨 있는 신비스러움조차 제대로 발견해 낼 수 없다는 점에서 전도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한다.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전 12:9-10)는 말씀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적 계시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전도서’임이 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동시에 성령님의 조명과 도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원칙은 전도서뿐 아니라 모든 성경에 대해서도 존중되어야 한다.
2. 자연계를 탐구하는 이성의 한계에 대한 논의
전도서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예언적 성격을 가진 선포로부터 시작된다. 이 선언적 내용은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3)라는 철학적 논제에 대한 해답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라는 것은 인간이 일상 생활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 즉 현재의 창조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지시한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한 개인의 인생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전도자는 이 세상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생 나아가 모든 인간사(人間史)에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전도자의 답변은 한마디로 ‘허무 중의 허무’라고 밝히고 있다. ‘허무’라는 말은 ‘입김’ 혹은 ‘증기’와 같은 말로 순간적으로 있다가 없어진다는 의미를 가지며 ‘본질이 없다’는 부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인간 세상에서 찾는다는 것은 결국 헛된 수고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전도자가 여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전도자는 철학적 탐구의 자세를 가지고 바라 본 세상에 대하여 4-11절까지 전개시키고 있다. 먼저 전도자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라고 인간사(人間史)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독특한 히브리의 직선적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인생이 살아가고 모든 우주가 존재하는 근원으로서 땅은 변함이 없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세대가 교체되고 순환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역사가 창조 이래로 어떤 방향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어떤 순환 주기를 가지고 지상의 현상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래 역사는 어떤 목표점을 향하여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먼저 전도자는 자연계의 현상들에 대한 관찰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연계의 현상들에게서 새로운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복적인 현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전도자는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 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 1:5-7)고 삼라만상의 흐름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태양은 모든 천체를 대표하는 구체적인 예로 등장한다.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가장 먼 영역에 있어서 때로는 신적 존재처럼 여겨지는 천채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자연적인 주기가 있어서 떠오르고 지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태양 역시 자연 법칙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증거이다.
바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에서 불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람이다. 바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포착하기 어려운 움직임의 존재이다.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바람의 움직임조차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가는 길이 있고 이것 역시 자연 법칙의 한계 아래 있다.
하염없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는 강물의 흐름도 다를 바 없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천체의 움직임과도 다르며 예측 불가능한 바람의 움직임과도 다르고 일정한 수로를 따라 지속적으로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로 인하여 바다가 차고 넘칠 것 같지만 물은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 끊임없이 다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 역시 자연 법칙 안에 속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계인 땅의 움직임은 일정한 주기와 자연 법칙이라는 한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초래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와 질서라는 틀 안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 자연계의 현상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국지적인 현상뿐 아니라 전 우주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도 마찬가지이다(8절).
언뜻 보기에는 우주의 광할함과 무한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는 무제한의 자유나 절대적 자유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래에도 마찬가지이다(9절). 혹시 누군가 새 것이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시야가 좁아서 그런 것뿐이다. 오래 전 세대에서도 이미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을 인간의 유한한 시각 때문에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10절).
그래서 전도자는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전 1:11)고 말한다. 이전 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라고 느낄 뿐이지 실상은 그 안에서 순환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지금 세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다음 세대에는 그 의미가 퇴색되고 상실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역사가 펼쳐지는 피조계에서 전도자가 찾을 수 있는 새로운 변화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계는 일정한 틀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와 역사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전도자는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전도자는 자연계의 한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삶이라면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는 것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말했던 것이다.
3. 인간을 탐구하는 이성의 한계에 대한 논의
전도자는 시야를 돌려 인간 존재를 대상으로 새로운 각도의 해답을 찾으려 한다. 해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계의 현상이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이제 전도자는 인간에게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이다. 먼저 전도자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철학적 탐구를 시도한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전 1:12)라는 말은 전도자가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가능성을 많이 가진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한 이는 역사적으로 다윗과 솔로몬뿐이다. 그 이후에는 유다의 왕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1절에서 밝힌 ‘다윗의 아들’과 연계시킬 때 전도자의 정체는 ‘솔로몬’으로 귀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전도서에 신비감을 불어넣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전도자가 최고의 권력자이며 모든 능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그가 내린 결론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특히 ‘이스라엘의 왕’은 세속적인 통치자와 그 성격이 다르다. 그는 언약 공동체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도 그의 탐구는 전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신할만한 독특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3-14)라고 토로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지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말씀에서 이미 확인된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성’을 가지고 만물을 통치하는 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피조계의 왕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처음 사람 아담의 왕적 통치 행위는 모든 피조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피조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며 아담이 수행한 주권적 통치 행위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의 최고 통치자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인간 이성의 한계로 말미암아 그 본질을 다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일조차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란 이성적으로 바라 본 이 세상의 왜곡된 본질로부터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그 어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힌다(15절).
전도자가 자신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출중한 지혜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피조계의 왕으로 지음 받은 인간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라는 점에서 전도자야말로 인류 가운데 최고의 통치자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전도자가 내린 그 이상의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16절).
이어 전도자는 최고의 지혜를 추구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지혜를 추구해 보지만 과연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지 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17절). 이것은 피조계의 최고 통치자로 세움 받은 인간의 왕이라고 하는 전도자 자신에게서조차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18절). 이성의 작용에 대한 불가능을 보았다는 것은 이성 역시 한계에 부딪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전도자가 고백하는 ‘허무’ 안에 담겨 있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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