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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목회자의 리더십

정성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3. 3. 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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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목회자의 리더십


                                                                                                        정 성 구


<들어가는 말>


 칼빈주의는 일반이 생각하는대로 특정한 교리체계 예컨대 예정론이라든지 5대교리 같은 핵심교리이기 전에 하나의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전포괄적 사상체계이며 성경적 사상체계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성경적 세계관(Biblical World View)이자 성경적 삶의 세계(Life-System)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칼빈주의와 목회자의 리더십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세계관을 갖고 있는데 그가 가진 세계관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의 삶의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듯이, 목회자도 그가 가진 세계관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목회의 방향도, 성경해석도, 설교의 내용도 달라지게 된다. 강한 리더십은 강한 확신과 확실한 세계관에 기초한다. 이 소론에서는 칼빈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몇 학자들의 의견을 살피면서 성경구절을 묵상함으로 실제로 목회자의 리더십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 칼빈주의에 대한 발상의 전환


 칼빈주의란 처음부터 좋은 말은 아니다. 이 말은 17세기 로마 카톨릭이 제수잇을 동원해서 이른바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을 일으키면서 불란서 남부지역과 헝가리 개혁교회 성도들에게 엄청난 박해를 가할 때 개혁교회 성도들에게 욕설로서 쓰던 말이다. 즉 이교도 또는 칼빈도당, 배신자 등의 뜻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개혁교회 성도들은 칼빈이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고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주장하는 것을 칼빈주의로 그대로 사용했고 학명으로 굳어졌다.


 한국교회의 경우 모든 사람은 칼빈주의라는 말을 쓸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예정론 또는 칼빈주의 5대교리이다. 물론 예정론이나 칼빈주의 5대교리는 칼빈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인 것은 틀림 없으나 그 자체를 칼빈주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한 한국교회에서는 칼빈주의를 보수주의 또는 정통주의, 복음주의 개념과 동일시하는 분도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구분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칼빈주의는 보수주의로 볼 수 있지만 모든 보수주의가 칼빈주의는 아니며 칼빈주의는 복음주의이나, 복음주의가 칼빈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다.1


 우리는 칼빈주의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우선 칼빈주의라는 말의 용도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칼빈주의라는 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명사적(名詞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경우 칼빈주의는 신학의 한 분야로서 한정되고 만다. 또는 어떤 특정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칼빈주의를 명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칼빈주의는 아주 옹졸하고 폐쇄적인 교리 쯤으로 알고 평가해 버린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도리어 형용사적(形容詞的)으로 쓰여지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어떤 개념이나 사상을 어떤 입장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 예컨대 신학(神學)이라고 할 때 그것을 인본주의적 안목에서도 볼 수 있고, 유물사관의 입장에서도 연구할 수 있다. 이렇게 두고 보면 신학이라고 해서 모두 다 옳은 것이 아니다. 결국 무엇을 기초로 한 신학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칼빈주의적 신학이라고 할 때 신학의 목적과 방법과 내용은 철저히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인정하고 그의 말씀인 성경은 참되며, 모든 판단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신학이론을 전개해 간다는 것이다. 또 칼빈주의가 형용사적으로 이해될 때 칼빈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진다. 예컨대 칼빈주의적 문화, 칼빈주의적 정치, 칼빈주의적 경제, 칼빈주의적 사회, 칼빈주의적 교육, 칼빈주의적 예술, 칼빈주의적 세계관과 인생관 등 실로 우리 인간의 모든 사상과 삶의 영역에 칼빈주의는 형용사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인본주의적 또는 유물주의적인 입장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철학 등을 고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칼빈주의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세계관이다.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을 예찬하는 사상에서 나온 휴머니즘은 하나의 종교이며 세계관이다.2


2. 칼빈주의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


 칼빈주의 사상의 대가인 헨리 미터(H.H.Meeter)는 말하기를 칼빈주의는 “통일된 전 포괄적 사상체계”(A Unified All -Comprehansive System of Thought)라 했다.3 그의 말대로 “칼빈주의란 요한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적용한 이름이다. 그가 비록 이 체계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창작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 체제의 중요한 해설가이다”라고 했다. 또 19세기 칼빈주의 부흥을 일으킨 대 칼빈주의 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189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행한 스톤 강의에서 “칼빈주의 안에서 내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고 했다.4 그는 앞서 말한대로 칼빈주의를 삶의 체계(A Life-System)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중심의 사상체계는 하나님 중심의 삶의 체계를 낳는다고 했다. 이 땅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면전(Coram Deo)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는 것을 믿기 때문에 칼빈주의란 삶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주의 사상체계는 단순히 구원론적 의미만을 갖는 편협한 종교적 체계가 아니라, 종교적 또는 구원론적 영역 못지 않게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과학적 영역 등 삶의 모든 분야에 관련되어 있는 체계임을 의미한다.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하나님 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올드 프린스턴 신학교의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의 대가인 비 비 워필드(B.B.Warfield)도 칼빈주의에 대해서 가장 철저한 정의를 내리면서 역시 칼빈주의 사상이 하나님 사상임을 밝히 천명했다. 그의 입장을 보면 “칼빈주의자는 그의 모든 사고와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즉, 지적이며 도덕적이며 영적인 그의 삶의 전영역에 있어서, 또 그의 모든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관계를 통해서 자신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결심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자세로 자기 전생애를 살아가며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아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5


 또 프레스리(Masom W. Pressly)의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도 생각해볼 만하다. “감리교는 죄인의 구원에, 침례교는 중생의 신비에, 루터교는 이신득구(以信得救)에, 모라비안교는 그리스도의 상처에, 희랍정교는 성령님의 신비에,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보편성에 각각 치중함과 같이 칼빈주의자는 항상 하나님 사상(Thought of God)에 치중한다.” 고 했다.6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는 인간의 관심사나 인간 중심으로부터 사상체계를 출발하지 않는다. 예컨대 인간의 회개(Conversion), 칭의(Justification)는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칼빈주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으며, 그의 영광과 주권을 위해서 인간을 어떻게 붙드시며 섭리하시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바우마(Clarence Bouma) 같은 학자들도 칼빈주의를 하나님 사상이라고 했다. 하나님 중심이란 곧 성경적이라는 말과도 통하며, 성경은 곧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한다. 칼빈주의는 그 어떠한 사상체계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경적 요소(Biblical Element of Divine Revelation)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첫째 단어는 하나님이다.(The First Word in Calvinism is God) 그러므로 인생과 세계와 우주와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확신한다.7


3. 칼빈주의와 성경의 증명


 칼빈주의는 흔히 칼빈의 신학체계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은 성경적 사상체계라고 해야 한다. 즉 칼빈과 기타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적 세계관의 해설자에 불과하다.


① 하나님 중심 사상(롬11:36)


 앞서 칼빈주의 사상이 하나님 사상이란 뜻을 말했지만 로마서 11:36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설해 보고자 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성경구절은 칼빈주의의 요절이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 마지막 절까지는 이른바 사도 바울이 가르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기독교의 생활원리에 대한 말씀이다. 그런데 11장의 교리를 마감하는 송영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 가운데 기쁨과 확신에 넘치는 찬송이 터지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무엇이며 기독교 교리의 기본 바탕이 무엇인가를 천명하는 성경의 열쇠가 되는 메시지이다. 로마서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대게 로마서 1:17의 말씀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한 말씀을 로마서의 주제로 본다.


 물론 이것이 성경의 골격인 것이 사실이고 복음의 핵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속론(救贖論)은 어디에 기초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때 칼빈주의자는 로마서 11:36의 말씀을 제시한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는 근거는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도 하나님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만유와 만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속주이기 때문에 믿게 되며, 소망하며, 사랑하며, 전도하며,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의 뜻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자. 이 본문에서 <어디서 나와서(from), 어디로 말미암고(through), 어디로 돌아간다(unto)>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사상체계이며 골격(frame)이다. 결국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상체계가 있지만 몇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을 중심한 사상의 골격인가, 인간을 중심한 사상체계인가, 아니면 물질을 중심한 사상체계인가 하는 것 등이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로마서 11:36의 골격에서 이해한다면, 인본주의 곧 휴머니즘의 사상체계는 이럴 것이다. 즉 만물이 <인간에서 나와서 인간으로 말미암고 인간으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토록 인간에게 있으리라>와 같이 성경의 말씀을 완전히 변조하여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대입시킨 것이 바로 휴머니즘 곧 인본주의 사상이다.


 또 다른 예로서 유물주의자들은 로마서 11:36을 자기 나름대로 그 골격에 맞추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즉 <만물이 물질에서 나와서 물질로 말미암고 물질에게로 돌아감이다. 영광이 물질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해 버릴 것이다. 인본주의와 유물주의 사상은 결국 현대세계의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작용하여 불신앙적이고 배교적이며 무신론적 사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며 휴머니즘과 유물주의 사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 학문, 모든 분야를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경 본문의 내용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하나님의 사상이다. 이 사상이 바로 칼빈주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주의를 칼빈에게서나 카이퍼나 월필드에게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성경에서 칼빈주의를 배워야 할 것이다.8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이란 말을 할 때 벌써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의 위엄과 주권 앞에 엎디어 순종할 자세를 취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 때문에 찬양하며, 경배하며,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확신을 갖게 된다. 칼빈주의의 확신은 성경에서 가르친 확신이며, 그것은 곧 만유와 만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와 구속의 은총 때문에 감격한다.


 여기서 잠깐 로마서 11:36의 말씀을 보완해 준다고 볼 수 있는 시편 10:4의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했다. 이 시편 기자는 악인의 개념을 규정하면서 악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감찰치 아니하신다고 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즉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하나님의 면전(Coram Deo)에서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믿는 사람이란 말이다.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 하나님 사상이며,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고 할 때 우리의 구체적인 걸음걸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핵심적인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하나님 앞에서」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되며 바른 신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로마서 11:36의 말씀의 끝 부분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즉 “영광이 그에게 세세히 있으리로다 아멘” 하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바로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해하는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개념은 어떤 공로를 세우는 듯한 인상을 가진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전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인간 생활의 가장 보편적이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또 먹고 마시는 일 중에서도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 주권 인정 - 이원론의 극복(골2:10)


어떤 이들의 비평처럼 칼빈주의란 매우 편협하고 고집스럽고 독단적이며 속이 좁은 사람들의 입장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의 가슴은 밖으로 열려 있다. 그 이유는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며 땅 위에 어디든지 하나님의 주권(主權)이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칼빈주의는 신학 뿐 아니고 도덕적 영역, 진리, 과학, 예술, 사회, 문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을 갖고 있다는 영역주권(領域主權 : Souvereiniteit Van Eegen Kring)을 주장하게 된다. 카이퍼의 지적대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아니한 곳은 단 한 곳도 없기에 나는 세상에 대해서 무관하다고 변명할 수 없다. 이 세상은 일해야 할 장소이며 장복해야 할 장소이다. 칼빈주의자는 이 세상에 살고는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명을 갖고 있다.


 또한 칼빈주의의 특징 중의 하나는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너무나 좁게 생각해서 제한해 버릴 때가 많다. 우리는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지만 끝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은 어느 공동체(共同體)나 어느 지역에만 계시는 줄 알았다. 그는 니느웨도 다시스도 풍랑 중의 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가르쳐준다. 골로새서 2:10에는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지만, 그는 또한 우리의 가정의 머리이시며, 국가의 머리이시며 삶의 모든 공동체에도 머리가 되신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장소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시오,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진실한 성도라면 우리가 일하는 작업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그는 진정한 크리스찬일 것이다. 사실 많은 보수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 중에는 성수주일과 십일조의 부담금을 내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 전체(The totality of life)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시편 139:7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했다. 칼빈주의자는 바로 그것을 깨달았다. 어디서든지 불꽃같은 여호와의 눈길 앞에서 진실되이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찬송하는 구체적인 삶 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형편을 살펴보면 아직도 이원론적인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양사상 특히 한국사상에 뿌리 깊이 박힌 이원론적 사상은 심각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과 같은 탈종교, 종교다원주의적 세속주의 시대에 우리 교회가 뛰어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칼빈주의 철학자인 화란의 뎅그링크(J.D.Dengerink) 박사의 말과 같이 “오늘날 많은 복음적 프로테스탄트들이 그들이 가진 성경적 진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포괄적인 것과 생의 전체 분야에 관련을 맺는 성경적인 복음과 세계의 주와 구속주로서의 에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고 개탄했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사역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좋다는 말과 세상에서의 도피주의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③ 칼빈주의는 곧 성경주의이다(시119:105)


 성경은 칼빈주의의 정경이다. 성경이 있는 한 칼빈주의는 참되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는 전적으로 성경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사상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성경관이다. 칼빈주의는 물론 다른 말로는 성경주의라고 할 만하다. 사실상 모든 신학의 갈림점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래서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성경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신학과 신앙을 지키려고 할 때도 언제나 우리는 바른 성경관을 붙들어야 모든 것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칼빈 선생이 말한대로 참된 신앙은 성경이 가라는 곳가지 가고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중에서 기적적인 소리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기록된 말씀을 주신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이 기록된 말씀을 읽고 깨달음으로 기쁨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해서 신앙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게 하신 것이다. 결국 신앙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표준이고 꿈이나 경험이 표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것을 한마디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고 한 것이다. 카톨릭은 전승의 권위를 앞세우지만 칼빈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그보다 힘있게 강조하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된 전통, 아무리 명백한 경험이라도 성경의 권위 앞에는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또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교리는 교회가 존재하기도 전에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고 말씀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 먼저인 것을 말한 바 있다. 성경은 누가 성경으로 인정한다고 성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증적 계시(自證的 啓示)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성경 없이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성경 없이 바른 신앙에 이르려는 사람은 칼빈이 주장한대로 일종의 「광신에 사로잡힌 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성경에 대한 확실한 어떤 원칙과 교리를 붙드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가령, 시편 119편을 보면 79절에서 104절까지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105절에서 마지막절까지는 꿀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 어떻게 실현해 나가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즉, 전반부는 성도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고, 후반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의 책임과 소명(召命)을 강조한다. 즉, 전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환희와 구속(救贖)의 즐거움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즉 “주의 말씀을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어두운 길을 밝혀주며 우리를 인도한다. 칼빈주의자는 말씀을 갖고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4. 칼빈주의와 목회자의 리더십


 지금까지 칼빈주의 사상체계 곧 칼빈주의적 세계관이 무엇이며 성경의 뒷받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칼빈주의 사상이 목양의 현장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칼빈주의는 어느 교파, 어느 교단이 갖고 있는 사상이라기 보다 실은 모든 목회자들의 사상체계이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이다. 리더십은 목회자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목회의 비전과  목표를 성도들이 따라 오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기술이나 비전이나 통찰력 정도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이 갖고 있는 영적 권위와 세계관에 의존한다. 즉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하며,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목회자가 어떤 세계관에 대한 확신을 가지느냐의 여부가 리더십을 결정한다. 목회자의 영적권위는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이며 그의 말씀인 성경이다.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외칠 때 영적 리더십을 갖게 된다. 목회자가 인생과 우주와 세계에 대해서 어떤 사상체계를 갖는가에 달려 있다. 즉 목회자가 인본주의 세계관을 갖는다면 비록 천부적이고 생래적 리더십을 갖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낱 세속적 의미의 리더십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목회자가 앞서 말한대로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갖는다면 그 리더십의 권위는 엄청난 힘을 지닌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리더십의 권위는 자기 자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단순히 썩어질 장망성으로 보지 않고 선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삶 전체를 볼 줄 아는 세계관에서 목회자의 리더십은 탄력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바로 칼빈주의적 목회 특히 칼빈주의적 설교관을 갖게 됨으로 강단의 변화를 가져온다. 즉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설교할 때도 여전히 문제되는 것은 어떤 성경관, 어떤 신학,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즉 성경을 해석할 때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보는 목회자도 있고, 윤리적 입장에서 해석하는 분도 있고, 풍류적(allegorical)으로 해석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목회자는 성경의 해석과 설교에서도 구체화된다. 성경을 예증적 입장에서 설교하기 보다 구속사적 설교(Redemptiv

 Historical Preaching)를 함으로써 신구양약의 계시의 통일성과 하나님의 위대하고 웅장한 구속사역의 의미를 힘있게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방법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힘있게 증거하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구체적 삶의 표준이 됨을 힘차게 증거할 것이다. 칼빈주의가 단순히 신학의 한과목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이며, 목회자의 리더십의 원천이기도 하다.

 

 

<註>

1. cf. 필자의 졸저, 칼빈주의 思想大系(總神大, 1995) pp.31-43을 참고할 것

2. Gorden Spykman etc Society, State and Schools, a case for structual and         confessional pluralism by the Fellows of the Calvin center for Christian          Scholaship, Calvin College(Grand Rapids : Eerdmans, 1981) p.112

3. H.H.Meeter, The Basic Idea of Calvinism, revised by paul Marshall

  (Grand Rapids : Baker, 1990) p.27

4. A.Kuyper, Het Calvinisme, Zes Stone-Lezomgen(In October 1898 Princeton

  (N.J.) Gehouden, Amsterdam : Boekenhandel Hoveker and Wormses, 1890) p.3

  “… in het Calvinisme(Daarin) heeft mijn hart ruste gevonden"

5. B.B.Warfield, Calvin as a Theologian and Calvinism Today(Philadelphia :         Presbyterian Board, 1909) p.296

6. Mason W.Pressly, Calvinism and Science, Article in EV.Repertoire(1891) p.662

  Quated by H.H.Meeter Calvinism(1950) p.30

7. Clarence Bouma, "The Relevance of Calvinism for Today"

   A Symporium by Calvinistic Action Commitee, God-Centered Living or          Calvinism in Action(Grand Rapids : Baker, 1951) p.14

8. A.N.Martin, The Practical Implications of Calvinism, 전상보 역, 칼빈주의의

  실제적 뜻(한국로고스연구원, 1983)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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