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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십자가 5 (월터 챈트리)

월터 챈트리

by 김경호 진실 2013. 3. 1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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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자기 부정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 5:33)
 
결혼을 다루는 신약 성경의 주요한 구절들은 그 개념과 권위를 창세기 1~3장에 직접 호소합니다. 창조 기사로 되돌아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결혼에서도 ‘거주의 경계를 제한하셨음’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입니다(행 17:26).
사람의 인격을 조성하시고 혼인 제도를 제정하시므로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하여 얻는 만족과 행복을 발견하도록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 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범하는 피조물, 흙으로 지음을 받은 모든 자들은 부부간의 비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 결혼의 실패와 부서진 가정들이 세 가지 이유로 인하여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 가지 이유란 다음과 같은데, 실상 모두 창조 교리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 부부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설정하여 놓으신 분명한 경계선을 무시하게 될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지극히 높으신 그분을 거슬러서 주먹을 움켜쥐고 반항할 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셋째로, 부패한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거나 은혜 안에서 거의 진보가 없게 될 때 남편과 아내는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므로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어느 경우에서라도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사 45:9) 것이 뻔합니다.

인류 역사의 요람에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콧대를 엄청나게 꺾어 낮추시는 지존자의 실재와 대면하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소유하고 있던 최초의 우리 부모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이해하면서 살았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들은 만군의 주 여호와와 더불어 동산을 거닐 때 그들 자신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결혼으로 인하여 연합된 두 사람에게는 그들이 처한 바로 그 환경과 그들의 존재 구성 그 자체로 인하여 이기심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죄 없는 상태에서 겸손과 온유함이란 고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기심의 도전도 자기부정을 힘들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온전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삶은 순수한 기쁨이었습니다.
창조를 통하여 남자와 여자에게 여호와께서 의도하시는 사회질서를 공포하셨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존재하게 되기 전 한동안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우월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과 디모데전서 2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의도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여자에 대하여 남자의 선재(先在)함과 남자에게서부터 여자가 유래케 됨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을 명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사회적인 머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여자는 남자의 필요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남자]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여자는 이 세상으로 인도될 때 하나님의 목적을 통보받았습니다. 그것은 돕는 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것은 남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혼인에서 여자는 자기 이름을 남자에게서부터 받았습니다( 2:23). 결혼 생활에서도 여자는 남자의 요구를 따라 지원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보조하고 조력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1:9은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을 강조합니다.
현대 세계에서 이러한 역할의 의도적인 반전은 창조주에 대한 반항입니다.
신약 성경이 반복적으로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경외할 것을 요청할 때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타락한 여자들의 용기가 얼마나 쉽게 발휘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엡 5:22,24,33 ; 골3:18 ; 벧전 3:5). 그러나 성경의 여러 증언들은 명백하게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들이 남편이 이끄는 대로 따르고 남편의 최대의 관심사를 섬기기를 기대하십니다. 한때 하와는 자존심과 이기적인 야망에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영광과 남편의 선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자신의 창조주에게 최고의 충성을 하고 남자를 ‘돕는 자’로서 남편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법이 성경에 반복됨은 인간사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한동안 에덴동산에는 온전한 결혼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비극적인 타락이 가족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창 2:15-17).
남자는 창조주께서 동산에서 금하셨던 말씀을 여자에게 전하였습니다(창 3:2,3을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뱀이 여자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었을 때 하와는 아담에게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도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담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으며 남편과 의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바람들을 평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자기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는 그들의 삶에 치명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남편에게 의논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관계를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도에서부터 그리고 남편의 권위로부터 하와가 취한 이 치명적인 하극상의 결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는 남편을 [남편에 대한 복종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 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3:16).
이전에 이기심이 개재되지 않은 존재의 즐거움, 다시 말해서 아담의 머리됨에 대한 복종은 이제 저주의 요소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와 그녀의 머리는 이제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자기 이익만을 주장하는 것은 슬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계속하여 몸서리를 칩니다.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남편을 이끌어가려는 욕망이 일어납니다. 가족 가운데 지배적인 주도권을 쥐고 가족의 머리로서 행동하고 싶은 유혹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의 바람들을 알면서도 거기에 따르지 않는 순간순간들은 (이러한 바람들이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립되는 것이 아닐 경우)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뒤엎어버리고 이 땅 위에 불행을 계속 증가시키는 순간들이 됩니다.

서구 사회란 여자들의 자아를 채워주는 사회입니다. 뻔뻔스러울 만큼 솔직함으로 여인네들의 자아는 여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라고 부추깁니다. 교육제도, 잡지, 선전물은 여인네들로 하여금 자기주장의 알을 낳게 할 것입니다. 여자는 왜 독립적인 인생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가? 아내가 남편에게 하듯 남편이 여자들을 더 많이 돕는 자가 되면 안 되는가? 이에 대해 여자들의 자기 추구의 결과가 가정을 파괴에 이르게 한다는 심리학적인 포격이 현대여성들에게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해서 상대방을 이기심 없이 섬기라는 요청을 받는 유일한 배우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땅은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지 않았으며 창조주와 함께 나누는 사귐은 더럽혀지지 않았으나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의 결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은혜로우신 주님은 ‘사람[남자]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함’을 인정하였습니다(창 2:18). 어떤 의미에서 여자는 남자의 완성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결여된 것을 공급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심각하게 필요로 합니다.

전능자께서 최초의 신부를 아담에게 바래다 주었을 때 타락하지 않은 남자는 결혼의 진수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 선언에서 우리 조상은 자기 옆구리에서 취한 갈비뼈에서 하와의 문자적인 기원을 인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녀는 내 뼈 중의 뼈였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로구나’라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마치 이 점을 강조하려는 듯 그는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창 2:24).
이러한 관찰에서 최초의 신랑은 하나님께서 뜻 하신 바 남자와 더불어 함께하는 여자의 신분을 선언하였습니다.

결혼에 의하여 두 생명은 하나로 융합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연합의 현실성을 확정하셨습니다(마 19:6).
바울은 에베소서 5:28에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라는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위상을 인식하였습니다. 이 구절만 취하는 것으로는 애매합니다. 그것은 남자들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자기 아내도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혼인으로 말미암는 친밀한 연합의 경이로운 실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이와 같이 남편들은 자기들의 몸인 아내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다음 문장이 이와 같은 의도를 지지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실상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의 자신의 몸인 것입니다.

혼인으로 말미암는 친밀한 연합이 의미하는 것은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내를 데려다 주시는 순간 그의 의식은 변화되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의 아내에게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그녀는 영양을 공급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바로 자기 몸이었습니다. 하와는 시간, 일과 사고 등 모든 것에 대한 중심이 되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담의 훌륭한 한 부분으로서 모든 것을 공유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곧 자기 몸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입니다. 이후 그녀는 아담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진행하는 전통적인 결혼식을 선호합니다만 만일 그들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이한다는 서약은 바로 한 남자가 자신의 삶 전체를 그녀와 공유하겠다고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주어지는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들입니다(벧전 3:7). 그것은 남편에게 이기심이라고는 전혀 없이 아내만을 이해할 것을 요청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식적인 추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보아 왔습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머리는 못된 머리임이 분명합니다. 아내의 욕구가 복잡하다고 해서 자기 아내를 배려하지 못하는 남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경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상하게 배려를 베풀라고 남편들에게 거듭 촉구하고 있습니다(에베소서 5:25,29 ; 골로새서 3:19 ; 베드로전서 3:7). 일찍이 하와에게 주었던 아담의 헌신은 오늘날 비극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거룩하신 주님은 먼저 부부 모두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설명을 요구받았던 자는 가족의 머리였습니다. 타락한 남편으로서 아담이 가족에 대하여 최초로 발설한 말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결혼에 대한 그의 자세는 심각하게 발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죄를 탐색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비열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이와 같이 이기적인 말이 그날 밤 가정불화를 부채질하였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아담이 자기 죄에 대하여 자기방어를 한 것은 하와와 정신적인 이혼을 한 것입니다. 잔인하게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과 분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비난을 아내에게 전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는 아내를 욕보이고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되리라는 이 고상한 깨달음은 도대체 무엇이 되었습니까? 죄가 들어온 이 순간만큼은 하와가 아담의 몸이 아닙니까? 정말이지 그녀는 전과 아주 똑같이 그의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친밀한 연합으로부터 아내를 추방한 것은 야비하고 이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그의 창조자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타락한 남성 심리는 전적으로 아담의 자기중심적인 언사 속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류 역사를 통하여 남자들은 여자들을 보양하고 소중하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학대하여 왔습니다. 아내를 이기적으로 잔인하게 대하는 것은 여자들에게 자기 방어를 하도록 만들었고 그 대가로 육욕적인 반응을 하도록 몰아갔습니다. 최초의 남자가 아내와 정신적으로 이혼한 사건은 결혼의 비애의 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때때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면서 남편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세트 뒤로, 또는 일과가 끝난 다음 술집으로 후퇴합니다.
머리가 자기 몸(아내)과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내가 자신의 관심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아내의 자기방어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그는 시간을 내어서 아내와 의논도 하지 않고 자신의 깊은 관심사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아내가 당하는 고통이나 무관심의 신호에 자상한 마음을 베풀지도 않습니다. 남편의 이끌림에 따라 두 사람이 하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각난 현실가운데 서로가 이방인처럼 존재할 따름입니다.
수많은 부부들 가운데서 반복되고 있는 이 비극적인 양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한데서부터 시작합니다(엡 5:33). 그의 개인적인 자아는 너무나 많은 요청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의 친밀한 생활의 공동 상속자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습니다.

이기심이 가정보다 더 많은 피해를 끼치는 곳은 없습니다. 사회를 형성해 가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벽돌은 이제 자기주장으로 대체 되었습니다. 아내들은 자부심이 너무나도 강해서 그들의 남편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아내 자신의 이름과 생애가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남편을 돕고 ‘그를 위하여’ 살아가므로 그것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남편들은 자기 생각에만 도취된 나머지 삶의 모든 것을 아내들과 더불어 공유할 수 없고, 자기중심적인 나머지 자신의 배우자를 배려하며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문제의 중심으로 지혜롭게 돌아갑니다. ‘아내들이여, 복종하시오’, ‘남편들이여, 사랑하시오.’

순복하는 아내와 열정적인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가정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평화와 기쁨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결혼 생활의 성적 적응이라는 복합적인 문제에서조차도 성경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삶의 양상에서 문제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모든 난관에 대한 해답은 자기부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 7:4).
어떠한 생리학 교과서도 성적 부조화의 으뜸이 되는 문제-곧 이기심을 명쾌하게 다루지 못했습니다. 부부 싸움에서 닥치는 여러 난관은 자기부정으로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남편을 돕고 뒷받침 하기위하여 마땅히 자기를 부정하여야만 합니다. 남자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몸, 곧 자기 아내의 행복을 제일 먼저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목사가 가정불화 중인 남편과 아내를 상담할 때 경쟁하듯 자기 유익만 주장하는 말을 들을 때보다 더 실망스러운 적은 없습니다.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는 말을 듣거나 배우자에게 엄숙한 대가를 치러가면서까지 헌신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결혼생활에서 아주 공통적인 어려움들입니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배려가 가득 찬 자기부정을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면 결혼 상담은 얼마나 빨리 끝나게 될까요. 만일 아내는 가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기 머리에게 굴복하려고 조바심을 치고 남편은 자기 자신의 몸인 아내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주려는 야심에 차 있다면 다투고 싸울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아내들이여, 복종하시오’ 그리고 ‘남편들이여, 사랑하시오’라는 메시지를 귀를 통해 부부의 가슴에 도달할 때까지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현대인의 결혼에서 모든 실패와 슬픔에도 불구하고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결혼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만큼 결혼을 위하여 잘 갖춰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학교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삶을 배우는 가장 훌륭한 훈련장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자기부정은 마땅히 추구되어야 할 특징입니다.
자아를 이미 죽인 남자와 여자보다 결혼 생활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미 그들은 이기적인 욕구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그들은 엄숙한 서약을 했던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합당하다고 여기는 자기 유익마저 부인합니다. 그분을 위하여 그들은 날마다 십자가를 집니다. 그분의 학교에서 그들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빌 2:3). 그분을 섬김에서 그들은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는’ 것을 실행합니다(골 3:13). 그들에게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포함하여 성령의 열매가 열려 있습니다(갈 5:22,23).

십자가의 그늘 아래 사는 자들은 사랑스러운 가정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기부정의 은혜를 공급받게 됩니다. 만일 자기부정이 한 가족 가운데 실행되고 있다면 다음 세대의 자녀들은 무엇이 정말 사랑인가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자라날 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을 소유한 부모들이 계실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복음의 증거 가운데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회에서 결혼생활에서의 자기부정보다 더 고상한 소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시작부터 그렇게 해왔어야 합니다.
이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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