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자기 부정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빌 2:20-21)
‘자기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는 모순의 말입니다.
이기적인 목사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것입니다. 위대하신 목자께서 복음을 전파하고 자기 양을 치라고 사람을 부르실 때 그분은 자기부정을 거듭거듭 하라는 요청을 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직무는 놀라운 위엄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종이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이라고 신실하게 선포하고 있다면 천상의 권위가 그의 음성을 수종들 것입니다. 심판 날에 오히려 소돔이 하나님 나라 사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자들보다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막 6:11).
인간의 영혼 문제와 그들의 영원한 관심사에 전 생애를 드리도록 부름을 받은 그들은 고귀한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제왕의 복장을 입히고 홀을 손에 들려 목사들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임명을 받은 목사들은 사람들의 발을 씻을 대야를 들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여야만 합니다. 바울은 목회의 참 정신을 보여 주기 위하여 디모데를 천거하였습니다. ‘그는 나와 더불어 복음 안에서 섬겼노라.’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복음의 역사(役事)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의 자세를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참 목회에서 자기 부정은 소명에 합당한 태도와 더불어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동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의 목회를 관찰한 바 그 만은 예외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관찰이 여전히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무나도 많은 목사들이 양들의 유익보다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목회자들에게서 가장 추한 흠입니다.
그것은 교묘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설교와 교육의 놀라운 대중적인 은사를 지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탁월한 설교가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잃어버린 자들을 매료시킵니다. 한 사람의 인기가 상승함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이처럼 경이로운 은사가 보잘것없는 소수의 회중들에게 ‘낭비되고 있음’을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의 목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독자적인 기관이 그의 목회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설립됩니다. 양들은 이분이 박차를 가하여 전진하게 될 프로젝트를 후원하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양들이 이 목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헌금을 내야 합니까? 오히려 그가 이 장엄한 섬김의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명은 오히려 양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목회’란 ‘식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이 자기를 과시하게 되면 그에게 무슨 선이 있습니까? 만일 그가 자기가 종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는 데 도취되어 종으로서 자신의 위대한 경력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그는 그 말의 의미를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에서 종들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종의 직분을 고상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교회들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식탁 옆에서 수종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확실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바 여러 은사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만 오직 봉사 곧 섬김만은 몸 되신 그리스도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소명을 영예의 자리로 생각하기 시작 하였습니다(마 20:20-29). 그 야심은 사도직을 명성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로 포착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쌀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동안 디모데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그분의 소중한 양들의 행복입니다. 디모데는 여러분의 상태를 자연스럽게 돌보게 될까요? 모든 피조물들의 섬김을 받으시기에 넉넉히 합당하신 우리의 영광의 예수님께서는 신분과 평판을 움켜쥐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고 본장의 초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빌 2:7). 그분께서는 자기 자신을 절망적인 곤궁에 처한 자기 백성과 동등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섬기러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분의 것’이란 그분이 위하여 피 흘리신 양들의 최대의 행복입니다.
우리 선한 목자께서는 하급 목자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지대한 관심은 양들의 행복입니다. 도둑은 양 무리에게서 양털이나 고기 같은 것을 취하려고 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 양 무리에게 도움이 되는 모든 조치들을 취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위대하신 목자를 본받아 디모데는 성도들에 관한 일을 ‘자연스럽게 돌보았습니다.’ 하나의 반사 작용으로 그는 그들의 번영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바울은 우리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사용하셨던 것과 동일한 동사 ‘돌본다’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디모데는 그들의 영적 상태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그들의 상태를 자기 자신의 일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교회는 오늘날 이와 같은 목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 밑에서 교회는 자라게 됩니다.
목회로 부름을 받은 소명에 대하여 한 사람이 취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훈계하였습니다(벧전 5:1-3).
목사나 장로들은 오만과 횡포를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로마 교황의 자세는 마음속의 교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랫사람을 오만방자하게 대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이 세상이나 인간의 기관에서 권위의 자리를 수종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목사나 장로들에게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자장께서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5-27).
그리스도와 베드로는 가상적인 가능성이나 고대 시대의 이상한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을 주장하는 것은 현대 목회자들에게서 수치스러운 현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한참 성숙하는 과정에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들의 고압적이고 전제적인 자세로 인하여 심각하게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권위를 거스르는 반역이 널리 자행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께서 감독자로 세우신 자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행 20:28).
무질서 상태가 지교회의 많은 사람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질서와 그분이 위임한 장로와 집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마땅히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질서 상태에 의해 많은 상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제 정치에 의해서도 많은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양 무리의 행복에 절대로 필요한 진리와 의의 문제에 대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때 목사들은 부도덕과 이단에 반대하기 위하여 어떻게 주장해야 하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목사들이 외치는 예언적인 음성은 우레와 같아야 하며 그들의 발은 견고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들이 그렇게 근본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혹하고 권위적인 입장이 목사가 취해야 할 특징적인 면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들이 복종해야 할 성경적인 명령과 더불어 목사의 의견과 결정에 무저항으로 일관할 것을 회중에게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의에 대한 열심은 목회자들이 지니고 있는바 비대해진 자부심과 뒤섞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회자들의 모범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속적인 책략에 억지로 따라갑니다. 의견의 상정과 의문의 제기는 철저하게 무시당합니다. 목회자들이 양 무리의 복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들은 위험할 정도로 로마의 독재에 가까운 견해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목회자들이 마땅히 버려야 할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를 내포하게 됩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본문 강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말하게 되면 어떤 목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칭찬마저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의 보살핌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강단에 서 있는 사람에게 헌신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더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의 목회 아래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숙고함으로써 성숙에 도달하게 되며 베뢰아의 정신을 본받게 됩니다(행 17:11). 그러나 어떤 목사들은 양떼의 성숙 과정을 견디지 못합니다. 때때로 부모들이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자녀들이 독립적으로 성장할 때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그와 같은 자랑의 말을 합니다. 잘난체하는 자존심이 부풀어 오른 나머지 과장된 이미지가 너무 과도하여 그들을 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권위를 휘두르려는 목회자들에게서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인도하는 지도자 가운데 자아가 비대하여진 자들은 예의와 절제의 합당한 경계를 넘어 그리스도인의 개인 사업에까지 쓸데없는 간섭을 합니다. 때로는 상담과 심방에 의하여 목사들은 그들이 상관하지 않아야 할 문제에도 지시와 충고를 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두터운 체하고 참견을 좋아하는 사람 아래서 양떼는 속박을 당합니다. 생활의 모든 양상은 현미경 검사 아래 놓이고 열심이 지나친 목사의 강요를 당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모든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 목사에게 달려가야만 합니다. 어떤 양은 이러한 목사들에게서부터 도망하고 나서 안도의 숨을 쉽니다.
다른 양들은 목회자가 아닌 몸을 이루고 있는 각 개인의 어설픈 특성을 본받기도 합니다. 서투른 습관과 성향은 그가 실제로 될 수 없었던 것보다 교회 내에서 쓸모가 덜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인격에서 죄스러운 변명들은 회중들의 골칫거리입니다. 온유한 책망과 인내심에 가득 찬 간절한 부탁이 그리스도의 양떼들의 흠을 없애지 못하는 데 좌절을 느끼는 어떤 목회자들은 그 오점을 두들겨 패 주려고 교회의 훈계라는 막대기를 손에 잡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례적이며 대중적인 범죄에 대하여 사용하라고 하셨던 교회의 훈계가 이 점에 있어서 남용됩니다. 여기에는 성화로의 진보가 일시에 이뤄져야만 한다는 안하무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가운데 자라가는 성장도의 도표를 멋대로 그려도 좋다는 소명을 받는 목회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요구할 자리가 아닙니다. 양들은 채찍질을 당할 수도 없고 목회적인 바람에 일치하도록 내몰릴 수도 없습니다.
양 무리를 주장하는 자세는 교회의 싸움과 분열을 야기 시켰습니다. 목회자들의 권위를 휘두르는 정신은, 강한 정신과 독립적인 판단력을 소유한 성숙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회중을 인도할 미래의 지도자로서의 가장 위대한 잠재력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독재적인 방법들은 보다 열등한 사람들의 참된 성장을 가로막음으로써 그들을 비겁하고 의존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 방법 또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주장하는’데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합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자기 잇속만 차리게 합니다.
양떼들에 대한 목회자들의 태도는 섬김에서 인내와 온유함이 탁월하여야만 합니다. 그들의 행보는 마땅히 모범적이어야만 합니다. 목회자들은 겸손한 마음과 친절함에서 본보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마땅히 다른 장로들이 지닌 의견과 지도력에 대한 존경을 나타냄으로써 보여줄 수 있습니다. 목사는 다른 직원들에게 어떻게 복종하는지 그 방법을 그의 양 무리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는 빗발치는 다른 의견을 견디기 위하여 지나치게 자기의견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덜 중요한 문제의 논쟁에서 질 줄도 알아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열변을 토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말과 함께 길도 제시해야 합니다. 그들의 전생에는 사상을 전달하는 숙련된 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모든 주제에 대한 토의를 독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음은 수치스러운 사실입니다. 논쟁에서도 상대방을 납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의 천박한 말의 힘으로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만일 모든 목사들이 교회 내에서 자기들의 혀를 자제하였다면 얼마나 놀라운 본보기가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조차 훈계할 수 없는 성경 본문을 다룬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목회를 악평으로 몰아가는 이러한 모든 남용과 더불어 자기부정은 목사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자질입니다. 과시나 주장하는 자세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입을 놀리지 않아야 함을 깨닫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들에게 대하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하며 사회에서 버림을 받은 자들과 어린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사심이 없는 자세가 그의 태도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모쪼록 하나님께서 자기 목회자들의 태도에 이처럼 탁월한 자질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목회에서 자기부정은 물질의 소유라는 영역에서 항상 요구됩니다.
소수의 목회자들이 부유하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놀라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상은 때로 현실을 간과하는 수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한 종류의 노동만 선호하여 소명을 택합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측면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가를 따져보지도 않습니다. 택한 일을 시작한 다음 그들은 한 평생 재정적인 제약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여러분은 대가를 셈하여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하여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목회자들의 말을 엿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들의 수련회에서 흔히 있는 두 가지 저주스러운 것은 경박한 정신과 봉급을 의논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부동산과 재정적인 안정에 열중할 때 그것은 이중으로 혐오스럽습니다. 목회자는 부에 대하여 희생정신을 소유해야 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목회와 관련하여 재정에 관한 제반사를 언급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의 관심사를 말로 표현하는 것을 성경은 주저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돈을 사랑치 않아야’ 합니다.(딤전 3:3). 양 무리를 감독하는 자들은 더러운 이윤을 얻기 위한 동기에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벧전 5:2).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고전 9:14) 현대적인 풍요와 사치의 꿈을 버려야만 합니다.
바울은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행 20:33) 다시 그는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 말하였습니다(고후 12:14). 가난한 자에게 주고 모든 사람을 섬긴 다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눅 9:58). 여러분은 이 자기부정의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시절에 경제적으로 고도의 희생을 하면서도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교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참 신자의 적은 양 무리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주의 교계(敎界 :circle)는 꼭 웅켜잡으려는 목회자들에게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 주님은 분노하셔서 자기 종들에게 돈을 바라는 정신이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 1:10).
존 번연은 「천로 역정」에서 천성으로 가는 길에서 기독도를 유혹하는 은광(銀鑛)에 탐욕스러운 설교자를 지혜롭게 배치하였습니다. 데마(Demas)야말로 이 세상을 끔찍이 사랑하였던 자입니다. “만일 그 목사가 바이올린을 켤 수 있다면 사람들이 지상의 부귀에 맞추어 춤 추지 않겠습니까?”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할지라도’ (눅 10:7) 영적인 것을 사람에게 심는 목회자는 마땅히 육신의 것을 거두어야 하되(고전 9:11),
육신의 것은 자기부정과 더불어 목회자의 마음속5에 자리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바라는 것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어야만 합니다(벧전 5:4).
이 참된 상급은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그분의 손으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봉급과 은행 구좌가 일시적이 아니라 항상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아마도 그때가 바로 설교자로서의 지위를 그만두어야 할 때일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칠년을 봉사하였고 그의 가슴 속의 사랑은 그 보상을 받기 위하여 ‘며칠처럼’ 기다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을 위한 사랑도 이와 같이 목회자의 생각을 사로잡아야만 합니다.
주님의 목장을 관리하는 목회자가 부릴 수 있는 실제적인 도구는 자기부정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부정보다 그리스도를 더 닮게할 수 있는 은혜는 없습니다. 그분의 집에서 수종드는 종에게 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의복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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