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 설립을 지향한 선교사들
1904년 2월 1일 장로교회의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는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 총무 아더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에 있어서 연합교회는 본질적인 문제이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장로 교인들은 하나의 교회 설립을 위해 모두 연합하여야한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였다.
1884년부터 1889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선교의 터전을 마련한 장로교의 4개의 선교회와 감리교의 2개의 선교회는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이하 ‘장감’) 앞으로 세워질 공식적인 한국교회 명칭을 공동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조직하고, 1904년 마침내 ‘대한예수교회’ 라는 이름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 이름에 덧붙혀 “장로회” “감리회”라는 이름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해 장감은 정기간행물을 통합 발행하기위해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05년 6월 26일 북 감리교 선교사 벙커의 집에서 서울 주재 장감선교사 대표자들이 모였을 때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남 장로교의 이율서(李栗瑞, W. D. Reynolds)선교사가 “대한예수교회”라 불릴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자 아비슨이 제청하고 거수로 표결한 결과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다.
한국개신교회 전체가 힘을 모아 연합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하자는 벡의 동의안은 만장일치의 통과를 보았다. 이때는 이미 서울과 평양에서 두 교단이 연합선교를 하고 있는 시점이었고, 1905년 9월에는 장로교 공의회가 선교 사업을 감리교 선교부와 합동 운영하자는 건의안을 제출하여 장감 연합공회의 조직안을 승인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속에서 1905년 9월 15일 장감 선교사 150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감 연합공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초대의장에 언더우드가 시기 겸 회계에 벙커가 임명되었다.
1905년에 조직된 장감연합공회가 지향하는 바는 장감 연합공회 정관 제2조에 잘 나타나있다. “장감 연합공회의 목적은 선교사역을 상호 협력하고, 궁극적으로 한국에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장감 연합공회 회의록 1905.7)
이와 같은 점들을 살펴 볼 때 한국장로교초기선교사들은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전수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직 선교를 위한 열망으로 감리교와의 일치운동에 전념한 것을 보게 된다. 돌트렉트 대회에서(1618~19) 정죄를 받은 아르미니안 신학을 좇는 감리교는 인본주의적 신학과 체험주의적 부흥을 지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선교사들은 아르미니안 주의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신학을 수용해서라도 단일교회 설립에 대한 목적을 이루려하였다.
2. 초교파적으로 교리 및 교회정치의 조화를 꾀한 신학이었다.
1907년 연합공회 의장 소안론 (스왈른)은 “한국에서 감리교 교리와 장로교 교리를 조화시키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며 장감이 공감할 수 있는 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매우 보수적인 북 장로교에 속한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소안른 선교사가 장감의 교파를 초월해 교리적인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엥겔선교사에게 장감연합공회 여러 교단들의 교회 정치상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여 이들 교단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계획안을 다음 총회에 준비해 줄 것을 제안했다. 감리교 교회정치를 수용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이러한 사고는 곽안련에 이르러서는 벨직 신조 제31조의 중요한 내용들을 무시하게 되었고 실제로 각 치리회간의 혹은 동역자간의 동등한 권능과 권위를 가지는 장로교의 정치 원리를 소홀히 취급해버렸다. 후에 언더우드가 게일과 함께 세대주의 매개체인 스코필드 관주성경 번역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교파를 초월한 이런 연합운동에 열성인 중추적인 인물은 언더우드였다. 그의 아내 릴리아스는 언더우드에 대해 “그는 결코 종파적이거나 계급적이거나 인종적인 편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가 모든 인종, 민족, 계급, 연령, 종파에 속한 사람들과 진정한 형제애를 나누는 모습을 누구보다 잘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의 존재의 모든 흐름은 연합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한다.(Lilias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그는 화란개혁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었기에 어느 정도 대륙의 개혁교회의 신학과 교리와 생활을 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지 교회에 대한 대륙의 개혁교회전통을 전수해 주지 못했다. 그는 초교파적인 연합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지 장로교의 교리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칼빈주의 개혁교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3. 복음주의적 입장에 선 교회론과 교회정치였다.
이율서(레이놀즈) 선교사는 노블선교사에게 장감 연합공회 회원 교단들의 교회론을 검토하여 이들 교단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연구하여 논문을 준비해 줄 것을 제안하여 통과를 보았다. 장감이 교파를 초월해 단일 교단을 설립하고자 하는 공의회의 목적을 실행시키기 위해서 언더우드의 요청에 따라 그의 집에서 장감연합실행위원회가 1906년 2월23일에 모였다. 공동의장은 언더우드와 노블선교사였고 이율서가 서기였다. 이윽고 서울과 평양의 남학교 협력, 평양의료사업의 협력, 한 세트의 주일학교 공과만을 가진다는 계획, 공동 찬송가 출판, 서울과 평양에 있는 중학교들을 하나로 통합 그리고 장감연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장감의 교리와 정치 형태의 일치를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어 운영되었다(장감연합공회 회의록 (1906).15) 이때 장감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교리적인 틀은 복음주의적 입장이었다.
박윤선 목사에 의하면 레이롤즈선교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였으나 교리의 근거인 성경구절을 성경신학적으로 깊이 해석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 점을 지적받고 있다.(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영음사, 1992. P.52)
이와 같은 사례들을 종합해 볼 때 이들 대부분은 칼빈주의 개혁주의자라기 보다는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신학을 좇으면서 복음주의적 신앙과 생활을 따르는 분들이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는 적지 않는 교회가 어떤 면에서는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지향하기보다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감독주의 또는 회중주의적 교회의 성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