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근대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에 에베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가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s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景敎)1)라 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 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 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大秦 景敎 流行 中國碑)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장안사)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가 번창함을 알게 됨.
* 이런 여러 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 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 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년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 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1) 삼국인들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고관이 된 사람과 또는 유학생으로 오랫동안 당에서 생활했던 사람이 많았고 이드리 당조정이 보호하고 있는 경교를 믿었을 것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1956년 경주에서 신라시대의 석재십자가, 동제십자가, 마리아상등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경교가 신라시대에 전래되었다는 확실한 입증의 뒷바다침하는 재료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사학자인 김양선목사의 기증으로 술실대학교 시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2장. 근대 조선의 기독교전래
1. 시대적 상황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
(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 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 시위를 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은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 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 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 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 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었고 살아가던 도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 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 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 수 있다.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 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 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 (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fp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
(중국옷, 음식 잘 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나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
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 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 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중 하나가 한권을 가지 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 쳐 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계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이 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 는데(서양 무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 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3장. 한국 기독교의 발생과 집회
(1) 황해도 소래교회 - 최초의 한국교회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
한국 최초의 교회는 순전히 우리 조상들에 의해 세워진 자생토착교회인 황해도 장연군 대 구면 송천리의 소래교회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두해전인 1883년, 고향 의주에서 박해를 피해온 서상륜 상우(보통 경조로 통함) 형제가 교회 창설의 주역이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송천리의 명칭은 순토박이 말로 '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다 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들어간다.
기독교가 전래되던 당시 소래에는 약 70호가 살고 있었는데 소래교회는 서씨들이 모여사는 아랫마을과 광산 김씨들이 모여사는 구석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 두 가문은 모두 10 여년 전에 이주해온 일종의 피난민이었다. 즉 광산 김씨는 김마리아 가문으로 그의 고조부 때까지는 서울에서 판서 벼슬까지 한 명문이었으며 서씨는 평북 의주의 양반가문이었다.
만주에서 쪽복음서를 갖고 밀입국(1882년) 하려다 관헌에 적발되었던 서상륜은 고향에서의 전도도 위기를 느껴 결국 피신해 간 곳이 소래였다. 거기에는 그의 삼촌(또는 당숙)이 살고 있었다. 서울과 소래를 오가며 전도하던 그는 1883년 봄에, 그리고 의주에 살던 동생 경조는 다음해 봄쯤에 소래로 아주 이주 하였는데, 서상륜은 1883년 초가을부터 자기 친척과 몇몇 동네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상경한 형에게서 신약과 '덕혜입문'을 받아 소래로 돌아온 경조가 결단을 하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약전서를 수차 읽어보니 예수교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 그 교를 하면 피살하리 란 마음이 또 생겨 시중전이 일어나" 반년이나 갈등하다가 로마서를 보고는 "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 워하리오 … 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오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신을 받아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생사가 천주의 뜻대로 되리라" 결심하였던 것이다.
형제가 함께 나선 소래에서는 84년에 13명, 이듬해에 20명의 개종자가 생겼다. 그중 7명이 상경하여 언더우드에게 세례받기를 원했으나 서경조 최명오 2명만이 세례(85년)를 받게 되었으며 그해 9월에는 언더우드가 소래로 직접 찾아와 서경조의 석달된 아기 병호에게 역사 상 최초의 유아세례를 주었으며, 86년에는 아펜젤러가 같이와서 5인에게 세례를 주었다(서경조,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설립역사), 그러나 언더우드의 기록에 의하면 서상륜을 첫 대면한 것이 86년이고 그가 인솔해온 소래사람 4명 중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3인에게 세례를 준 것은 87년 1월이다. 또 87년 가을에야 소래에 직접 내려가 세례를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7년 말까지 소래에는 10여명의 교인이 생겨났다. 이듬해에는 서울에서 교회사상 최초의 사경회가 한 달 동안 열렸는데 소래교회에서도 10여명의 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소래교회는 새로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어학 및 한국풍습을 배우는 곳이 되기도 했다. 1889년에는 게일이 이듬해에는 마펫이 소래에 들렀고 그해 겨울 서울에서 열린 사경회에 서 경조를 비롯한 소래교인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서경조는 이 사경회에서 어학선생 문제로 애로를 겪고 있던 펜윅을 만나 그의 어학선생이 되기로 하고 이듬해 봄 펜윅이 소래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펜윅은 93년 원산으로 옮겨갔고 대신 매켄지가 소래에 왔다. 이 때부터 소래교회는 본격적인 발전을 하였다.
한복을 입고 한국말을 배우며 전도하던 중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매켄지는 서경조와 함께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군들을 감싸주고 피신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서경 조가 동학 접주를 직접 만나 학덕으로 그 기세를 꺾기도 하여 '송천에서 양인과 서경조를 보호하라'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또 교회당에 성 조지 십자기를 걸고 비기독교인 들까지 피난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깃발은 북쪽 지역에서 그 이후로도 교회당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동학과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교회는 더욱 부흥하였다. 전쟁으로 무법천지가 되고 민심이 흉흉할 때일수록 더욱 열심히 전도한 것이다. 한편 서울에서는 서상륜이 법무대신 서광범을 찾아가 기독교인의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20~30명이 서경조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두 난리를 피하여 극락세계' 가 된 송천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주일 80여명이 예배'하니 장소가 좁아 새 예배당을 건축해야 했다.
그리하여 '연보를 시작할 새 우리의 예배당은 조선에 처음이니 외국인의 재물은 들이지 아 니하기로 작정하고' 전 교인이 나서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곡식을 내고 어떤 사람은 부역을 했다. 김윤방, 윤오 형제는 자기 선산 나무를 베어 재목을 대었다. 마침내 1895년 기와집 8간짜리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매켄지 목사가 예배당 완공 무렵 열병에 걸려 신음하다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헌당식은 7월3일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이뤄졌다. 서경조는 초대장로, 김윤오 안제경은 집사가 되어 소래교회는 명실상부 당회를 가진 조직교회로 우뚝 섰다.
소래교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해서제일학교의 설립이다. 교회 건축이 끝날 무렵 매켄지 와 서경조는 교인자녀 7~8명을 모아 사랑방을 빌려 학교를 시작했다. 지리와 한글공부를 위 주로 성경도 가르쳤다. 매켄지 사후에는 그의 유산 3천냥과 교인들의 기부금으로 건물을 새 로 짓고 4년제 보통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여기서 세브란스 첫 졸업생 김필순과 그 형제, 경신 첫 졸업생 서병호, 세브란스 전 원장 김명선 등을 비롯, 김필례, 김마리아, 김함라 등 여성지도자들, 허성묵, 허응숙 등 민족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896년에는 또 교회가 비좁아 8간을 늘렸다. "이때 교인 수는 2백여명이라 칭찬 아니할 수 없는 일은 밤새도록 금식기도하는 일,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이 되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신 불신을 막론하고 구제해 주는 일, 근농으로 교회설립 3~4년만에 박토가 옥토된 일, 주색잡기 투전 미신 등이 없어진 일,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었다"
소래가 거점이 되어 인근 장연읍을 비롯, 송화 은율 풍천 문화 해주 옹진 등 일곱 지역에 수십개의 교회가 서게 되었다.
흔히들 한국의 천주교회는 자생교회이며 개신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식되었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소래교회가 보여주듯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산포에 근거를 둔다. '역간된 복음서들은 누구나 읽으면 곧 그 뜻을 알게 되기 때문에 개종자가 급증,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열심히 책을 얻어 읽고 있는 현상은 놀랄만한 일'이라 언더우드도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백성 들이 점점 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국인의 신앙열정을 대변하였던 것이다.
(2)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활동.
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
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
처음에는 4명이 잘 안받아 들였다.
왜냐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 성교 문답 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 그 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
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수세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해 줌.
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 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 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으로 위험을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 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목사가 쪽복음 6천부를 제물포 (인천)로 보냄
-최초의 밀수품이라 칭하기도...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있어 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 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나 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것)
참고 : 김재준 박사 아버지는유학 자였다. 성경을 분배하는 상인이 하루는 그 집 에 머물렀 는데 마땅히 줄 것은 없고 해서 성경을 한권 놓고 갔다. 김재준 박사가 중학교때 Y. M. C. A뒤에 승동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읽어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어 공부 한사람치고 킹제임스 버젼을 안읽으면 안된다고 해서 그 말에 집에 돌아가 그 책을 꺼내 읽고 훌륭한 목사님 됨.
저고리 성경 : 당시 저고리에 솜을 넣는데 아예 성경을 넣고 꼬매서 가져옴.
1884년 솔레 교회가 세워 졌는데 그 마을이 58호 밖에 안되었는데 서경조, 서경륜 형제가 열심히 전도해서 몇 달안에 50호가 교회에 나왔다. (서경조는 나중에 새문안 교회의 목사됨)
1년후에는(1885) 교인들이 자력으로 8칸짜리(8평) 교회 지음.
(3) 일본을 통한 전도
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
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 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 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돌아 오게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
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 되었다.(이수정판)
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 (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
참조 : 우리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 크다.
4장. 한국 개신교의 형성과 부흥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상주(常駐) 선교사로 파송된 것. 아펜젤러 목사는 부인의 건강 때문에 곧 돌아갔다. 하지만 독신인 언더우드 목사는 서울로 향했다. 마음속에는 이 복음의 불모지를 갈아 씨를 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기대가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서울로 들어선 언더우드 목사는 깜짝 놀랐다. 이미 한글로 번역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입국하기 전 우리말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한국인으로부터 전해 받아 놀라고 있던 터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전도가 시작되기 전 피선교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된 사례는 선교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언더우드가 입국 2년 뒤 첫 교회를 조직할 때도 그 구성원은 이미 서울에 있던 신앙공동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씨를 뿌려야 할 때 이미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1879년 만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성경번역자가 세례를 받은 데 이어 백홍준과 이응찬,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응찬의 친척이 거의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소속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백홍준은 도(道)를 배울 목적으로 스스로 로스목사를 찾아가 세례 전 3,4개월 동안이나 성경을 배웠다. 이응찬은 1876년부터 존 로스목사의 어학(語學)선생으로 활동하다 수세(受洗)를 결심했다.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미 1880년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1880년 보고서에 따르면 1879년 10월 이전에 8명 이상이 모이는 한국인 저녁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는 한국인이 주관했다.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이 집회의 방청인에 불과했다.
1882년에는 성경인쇄 실무를 맡았던 김청송과 상인으로 만주에 왔다가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서상륜이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때쯤 성경번역도 마무리됐다. 1879년 신약성서 로마서까지의 원고가 마련됐고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인쇄하기 이르렀다.
성경 인쇄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로스 목사는 첫 수세자들을 파송했다.1882년 김청송이 서간도지역에 파송된 데 이어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인 자격으로 서울지역에 파송됐다. 김청송은 중국 즙안(輯安)을 중심으로 활동해 수십명의 개종자를 얻었다.존 로스 목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1884년 말 수세자 1백명, 남자 세례 요청자들이 6백여명에 이르렀다. 즙안의 가정교회들은 1885년 중국인 지주에 의한 한인마을 해산 사건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의 압록강 인근 산간으로 돌아와 가정교회 형태의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김청송과는 달리 서상륜은 한반도의 중심 서울로 향했다.서상륜은 서울로 오면서 3개월 동안 의주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도했다. 1883년 초 서울에 도착한 서상륜은 서울 남대문 안쪽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해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서상륜은 중국의 로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서울에 와서 13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스 목사의 입국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다. 결국 이들은 1885년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83년 서울과 북부지방에서 전도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도 세례를 받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수정, 민비를 구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박영효의 수신사 일행에 포함돼 일본유학을 가게 된 인물이다. 그는 1883년 5월 도쿄에서 열린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 우리말로 기도하고 한문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1884년 한문성경에 토를 붙인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1885년 한글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했다.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4월 제물포항에 내릴 때 손에 들고 있던 성경이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이었다.그는 또 도쿄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조직했다. 미국 선교사 헨리 루미스의 1883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때 12명 이상의 개종자가 있었고, 주일학교도 시작됐다. 그러나 만주의 기독교인들과 달리 일본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지속되지 못한 듯하다.
한국 선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먼저 진행됐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시작됐다.
일부 교회사학자들은 1885년을 선교 시점(始點)으로 잡는데 이견을 갖고 있다. 이때가 첫 조직교회가 생긴 때도 아니고 서양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때도 아니기 때문이다.1832년 고대도에 `첫발을 디뎠던' 귀츨라프 목사나 1866년 평양 대동강변의 토마스 목사, 1884년에 들어온 `상주 의료선교사' 알렌 등이 모두 1885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1885년을 선교의 시작으로 보기 힘든 이유는 이때보다 연대적으로 앞선 `밖으로부터의 선교' 행적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안에서부터 받아들인 선교'의 자국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첫 세례자가 있던 때나 소래에서 첫 신앙공동체(교회)가 세워진 때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1)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의료와 교육 사업 (우리나라는 의료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하는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옛것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
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이 콜레라 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교육
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
우리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
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 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 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 뜀.
(2)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호레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 도착함. (그때는 당장 전도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베품. 1887년 9 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교회가 새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시작) - 1주년이 되는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 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 선교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 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 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 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 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전문 학교, 광성 중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 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 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년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사이에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 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3) 성서와 성례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수 있다.
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 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 다. 한 선교사 왈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란?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 하다고.
칼빈 :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 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
우리 나라는 말씀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성례전에 대한 의식은 약하였다. 오늘 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 교회에서의 말씀과 성례전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
4.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
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
장로교 - 북 장로교 감리교 - 북 감리교
남 장로교 남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이러한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됨.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장로교 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장로교.
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 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 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저들이 한국에 왔을 당시 한국은 - 샤머니즘 : 무지함에서 생김.
유교 : 형식주의, 허례허식
불교 : 미신적임.
- 위의 3가지의 사상에 어느 정도 젖어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 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
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
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
제도 마련.
3)Self-sup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5). 1907년대 부흥운동
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 사건)
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것도 없었다. 정치, 경 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 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 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재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 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 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 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 (후에 기독교 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 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 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 신앙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 무기력함과 무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함.
(6).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
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 창설
그리고 이 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 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서경조, 이기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
1907년 -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 교사를 파송한다. 그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 을 바꿈.
5장. 일제치하에서의 교회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 챈 일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 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 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기독교 정신 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 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 수는 타 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6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 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신사란?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신도란?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 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이 법에 대한 반응) -
1). 로마 카톨릭 : 1918년 까지도 '나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애국 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배를 허락함.
2).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 감리교 존속 가는케 함.
3). 장로교 :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 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
주기철, 이기선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 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 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 다.
2.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 차례 승리로 기세등등해짐.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와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 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3. 교회 분열의 징조
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 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
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 후 목사로 만들었다.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도교의 근 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회 조건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 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
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박형용은 이에게, 스스로 목사됨을 거절하는 것이라 함)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 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4.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 성이 쉽지 않았다.
그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 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 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 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 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 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가름, 피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가름 교리가 통리교로 이어짐.
7장. 한국 교회 재건과 분열
1. 해방과 교회 재건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은 기독교인들은 남다른 감격을 느꼈다. 후에 남, 북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함.
(교회 재건 운동)
1)장로교
교회 재건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평양 중심의 관서지방이다.
일제 탄압에 의해서 투옥된 교역자 중 50명이 순교함. 평양 감옥에서 20명이 출옥하고 그동안 지하에 숨어있던 자들이 나와 교회 재건에 힘쓴 곳도 평양이 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 표함. 1.)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 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후 사역에 임할 것.
2) 권징을 자책하고 2개월 간 휴직할 것 등등...
그후 11월 14일에 선천 월곡교회에서 평북 5개 노회의 교직자 연합수련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홍택기 목사 등 일제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 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 다. 교회안에 나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 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님의 출생ㅇ지이고 최상 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 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
2) 감리교
재건 감리교회
부흥 감리교회 - 둘로 나뉨.
감리교도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됨.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 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건 감리회와 부흥감리화가 나옴. 이 두파들은 서로가 자기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하고 서로 양보하지 못함.
합동안이 나옴 -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와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재건 측은 문제를 제기 또다시 갈라짐. 이때 평신도들이 양 파의 합력을 원하여 노력한 결과 분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감리교의 기틀을 마련함. 그 후로 평신도의 발언권이 높아짐.
3) 성결교
해방전 성결교는 약 5만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 교리중 4중 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2. 북한에서의 교회의 참화
해방되던 해 11월 16일 , 북한의 많은 뜻있는 기독교도들이 보다 더 좋은나라 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 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 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 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 산 국가를 위해서 주의를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 들을 선거에 동원시킴. 여기에 반기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1) 주일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
2) 기독교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3) 교회당은 예배 외의 어떠한 것에도 사용을 불허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구금된다. 마침내 50년 6.25사변 이 일어날 때 북한은 남침 준비를 끝내고 기독교인들을 먼저 검거해 투옥시켰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 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 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고려파가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당시 국회의원22명의 명의로 비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 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 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그 후 합동에서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출처: http://cafe.daum.net/christarwm/8yJz/164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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