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연합 신문>의 부탁으로써서 10월 14일자로 나온 1175호 7면에 실린 원본 글을 올립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종교 개혁과 우리를 생각하며 10월 20일(토요일)과 21일(주일) 오후 6시에 열릴 종교개혁 495주년 기념 언약교회 신앙 강좌에 참여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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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 이 질문은 해마다 10월의 마지막 날 우리들이 기념하는 종교 개혁 기념일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매우 크고 넓은 주장이다. 만일의 이 질문이 “어떻게 해서 종교 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당대의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와 사회와 그런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라면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라고 대답하면서 그 가까운 원인들을 다 찾아 대답해야 할 어렵고도 폭 넓은 질문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었다면 종교 개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그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했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c. 1330-84)처럼 정죄되거나 그의 글을 따르다가 1415년 7월 6일에 화형 당한 존 후스(John Huss, c. 1372-1415)나 1536년 10월 6일에 목이 비틀리고 화형당한 윌리엄 틴델(William Tyndale, c. 1494-1536)과 같이 정죄되고 화형 당해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종교 개혁적 주장을 하고서도 사형당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생경서 종교 개혁이 이루어 진 일은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물론 역사가들은 왜 다른 이들은 사형 당해 죽었는데 루터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는가를 탐구하는 인간적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우리의 질문은 종교 개혁에 성공했건, 아니면 후스와 같이 화형 당해 죽었건 당대에 종교 개혁적 주장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한정해 보려고 한다.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1) 외적인 이유: 당대 교회와 사회의 외적인 부패
흔히 종교 개혁 전야라고 불리던 중세 말기의 천주교회에는 여러 가지 도덕적 문제가 모든 사람들이 목도할 만하게 아주 분명히 나타났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 성적인 부패였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딤전 3:2, 12; 딛 1:6)에 반해서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를 고착화 시킨 당시 천주교회 내의 성적인 부패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이 실질적인 아내를 두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다른 직임과 함께 성직을 물려주는 (2) 세습의 문제가 당대의 외적인 부패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그것 배후에는 (3) 모든 문제와 관련해서 돈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물질 중심주의가 있었다. 당대에 문제가 되었던 면죄부를 파는 일도 결국은 누가 그 권한을 가지는가, 그리하여 누가 돈을 많아 벌 수 있느냐의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성직 매애 문제와 함께 당시의 모든 것이 돈을 버는 것과 관련 되어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예를 들어서, 당시 교황이던 레오 10세는 이미 2개의 주교직 가진 호헨졸레른의 알버트(Albert of Hohenzollern)에게 마인쯔(Mainz) 주교직을 제안하면서 교황은 1,200 두카트 요구했고, Albert는 700 두카트를 주장했으나 결국 1,000 두카트로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의 하나로 그의 영토내에서 8년 동안 면죄부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수익금의 절반은 Albert가 가지고 절반은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내도록 했다고 한다. 물론 면제부 판매인들은 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를 백성들에게 요청하여 실질적인 문제는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4) 명예와 힘을 휘두르는 것이 당시에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끔 한다. 그리고 (5) 일반 민중들은 성경적인 형태의 경건 보다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형태의 경건 생활의 형태를 유지하여 수 없이 많은 미신을 양산해 갔다. 십자가 자체에 의존하고 손으로 그은 성호가 자신들을 악마로부터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자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면서 점차 성자숭배에로 나아가는 등 온갖 미신이 난무하게 되었다. 당시 부활절 어간에만 일반 민중들에게 공개되었던 수 없이 많은 성물들에 대한 숭배는 이런 미신을 조장하는 데 중요한 기연이 되었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는 오늘 날 한국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와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비록 시대적 차이와 상황의 차이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다를 찌라도 성적인 문제, 세습 문제, 돈 문제, 명예와 힘의 문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비성경적인 종교적 행위를 하는 미신의 문제라는 본질은 뚜렷한 유사성을 나타내 보인다.)
어쩌면 이런 외적인 부패 때문에 종교 개혁적 주장이 널리 퍼져 나가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쉬웠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부패는 종교 개혁의 궁극적 원인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당대 교회의 이런 외적인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고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우신예찬>과 같은 풍자적인 글을 쓰기도 했던 에라스무스(Desderius Erasmus, 아마도 1469-1536) 같은 이는 결코 천주교회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았고, 1524년에 있었던 의지의 자유에 대한 루터와의 논쟁을 통해 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적인 사상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 사회와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종교 개혁의 근원적 원인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2) 근본적 이유: 당대 교회의 교리의 문제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근원적 이유는 무엇인가? 왜 자신들이 화형 당할 줄 알면서도 종교개혁의 선구자들과 개혁자들은 종교개혁적 주장을 했는가? 그것은 결국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가 너무나도 심각하게 벗어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도덕적인 타락과 문제들 정도가 아니라 당대의 교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종교개혁의 근본적 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의 가르침과 예배와 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점차 당대 교회를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정확한 이해를 가져 나간 루터는 후에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공격했지만, 나는 교리를 공격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독교 이해 자체를 공격한 것이다. 그는 “나는 기독교를 보존해야만 하는 사람들, 즉 주교들과 학자들 가운데에는 참된 기독교가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고 말할 뿐이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종교 개혁의 근본적 이유였다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당대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아니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제 2의 종교 개혁을 운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와 같이 이 세상에 교회라고 이름 하는 긴관과 공동체 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실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닌 상황에서만 언급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부패가 있고 잘못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고쳐 가고 갱신하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라는 말은 교회라고 이름 하는 것이 참 교회가 이난 상황에서라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중세 말기의 교회, 루터 자신이 그 안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수도사가 되고, 신부님이 되어 미사를 집례하고 하던 그 교회 공동체가인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교회가 아닌 공동체가 되어 버렸는가?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음이 왜곡되어 잘못된 복음이 선포되어 많은 백성들을 오도(誤導) 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성경이 말하는 복음 외에 다른 것이 선포되거나, 성경의 복음을 왜곡하는 소위 교회들은 모두 참된 교회가 아닌 것이 된다.
오늘날의 천주교회도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칼빈이 비판하였던 그 천주교적 교리인 (1) 성경과 전통을 다 강조하는 입장, (2) 은혜와 믿음으로만의 구원이 아닌 믿음에 더하여 은혜에 근거한 인간의 행위가 어느 정도 있어야 그것의 공로로 구원함을 얻는 다는 행위 구원론(공로 구원론), (3)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후에는 십자가의 속죄를 피 없는 형태로 다시 제시하는(represent) 피 없는 제사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천주교적 미사관, (4) 그 피 없는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司祭, priest)이 있다는 견해, (5) 사제의 축성 이후에 성찬의 요소들인 떡과 포도주의 본질(substance)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로 변한다는(transubstaintion) 화체설(化體說) 등을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일탈적 가르침들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만일에 루터와 칼빈이 오늘날의 천주교회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이런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서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명확히 이단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만일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데서는 성경적인 복음이 선포 되고 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1) 성경이 성문화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계시가 주어진다는 주장,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거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몰라도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 내포 되어 있다고 주장, (3)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 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함께 고려되어 칭의가 이루어지며 구원이 주어진다는 주장 등.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든지 바른 복음이 선포 되지 않는 공동체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고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한국 교회 중의 대부분은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진정한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겸손히 회개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을 회개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교회 공동체이다. 그 갱신의 힘과 능력을 성령님께서 공급해 주시기에 우리는 성령님에 의존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들의 문제를 찾아 가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인도하는 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1) 교회 세습 문제, (2) 목회자들의 재정적 투명성이 부족한 문제, (3)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성적인 타락 문제, (4) 우리 주변 사람들의 가난과 아픔과 동참하는 일에 게으른 문제, 그리고 (5)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효험만 있으면 어떤 형태의 종교적 행위도 다하는 문제 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적하는 우리들의 외적인 부패의 문제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들은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우선 드러나는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기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회개가 선행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만을 생각하는 것은 종교 개혁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된다. 종교 개혁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 가운데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틀린 것들,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들, 우리의 교회 제도 가운데서 성경에 비추어 틀린 것들을 고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종교 개혁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방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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