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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종교 개혁 주일)

강문진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3. 15.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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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 본문 : 로마서 1 : 15~17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노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Q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종교개혁 신앙이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에 의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일어났다. 이 날에 마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성 교회정문에 걸어 놓았다. 물론 마틴루터가 그것을 걸어놓으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고 그저 사람들에게 면죄부 판매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일이 도화선이 되어서 결국에는 온 유럽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틴루터를 사용해서 위대한 종교개혁을 그 시대에 일으키신 것이다. 한 사제에 불과한 그를 사용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도록 섭리하셨다. 그 당시에 마틴루터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초라한 사제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마틴루터 개인의 힘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가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한 사제에 불과한 사람이 그 큰일을 개인의 힘으로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이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별히 사사기에 이스라엘백성들이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셔서 다시 새롭게 하는 부분들을 볼 수 있다. 새롭게 되었다가 세월이 흐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부패하여지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또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환란이나 징계를 통해서 그들을 회개케 만들고 다시 새롭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이해해야 될 것이다.

 

중세 천년의 세월동안에 로마카톨릭교회는 너무나 깊이 타락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루터를 통하여 교회를 개혁시킨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카톨릭교회가 가르쳤던 로마카톨릭신앙과 반대되는 종교개혁신앙인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로마카톨릭과 반대되는 개신교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당시에 로마카톨릭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구원을 추구했다. 또 무지와 미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한 신앙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인 것이고 개혁주의 신앙의 슬로건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신앙인 개혁주의 신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1) 개혁주의 신앙은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신앙인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기초이자 토대가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종교개혁과 관련된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특별히 이 말씀 중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붙잡는 그 사람이 바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에 토대가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자기의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견고하게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어리석게도 자기의를 단단히 붙잡았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한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아주 의로운 사람으로 내세웠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여기 바리새인을 보자. 그는 자신이 철저하게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반대로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한 때 자신을 대단히 의로운 자로 생각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사도 바울은 한 때 자신의 육체를 대단히 신뢰하였다. 그게 바로 자기의인 것이다. 그는 자기의를 의지하고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자기의가 깨어져야 한다.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생각이 없어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개혁주의 신앙이 생겨날 수 있게 되어진다.

 

18세기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한 번은 미국의 미들타운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한 농부가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설교를 통해서 그 농부는 자신의 의로움이 자기를 구원하여 주지 못한다는 중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의 경험을 들어보자.

 

“수천명의 사람들 앞에 선 그 젊고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청년은(조지휫필드) 용감하고 당찬 표정이었으며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신 것 같았다. 그의 설교는 내 마음을 엄숙하게 만들었고 나를 떨리는 두려움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권세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는 달콤한 엄숙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내 낡은 토대는 무너져 내렸고 나는 나의 의로움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얼마나 중대한 말인가!

 

자신을 타락한 죄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의로운 존재로 생각하는 낡은 토대는 반드시 무너져 내려야 한다. 여기서 낡은 토대란 자기의라는 고집스런 기초인 것이다. 이 기초가 무너져야 다른 기초인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그곳에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앙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자기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개혁주의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자기의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가? 여러분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의를 쌓아서 자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카톨릭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고 자기의를 다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만을 굳게 붙드는 개혁주의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한다.

 

2)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불건전한 신앙인 것이다.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여기서 억지로 푼다는 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고 개인의 체험이나 심리학적으로나 또는 정치학적, 세속적으로 푸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멸망의 지름길이다.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객관적으로 풀어야 된다.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리를 따른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으로 해석하고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 여러분들이 연구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은 전후문맥을 살피고, 그 책 전체를 살피면서 해석해야 그 해석이 올바른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한 구절을 독단적으로 떼어내어서 억지로 푼다든지, 아니면 성경을 성경을 가지고 풀지않고 여러 가지 다른 개인의 체험이나 다른 것을 가지고 풀면 거기서 비로소 이단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교단의 헌법에 보면 제일 먼저 신조가 나오고 있다. 신조의 서론에 해당되는 서언이라고 하는 부분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한 모교회의 교리적표준을 버리려함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도개요서(신앙고백서)와 성경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하는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중에 성경소요리문답은 더욱 우리교회 문답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

 

우리교단헌법 신조 앞부분에 바로 이런 내용이 있다. 여기 우리교단에서 인정하는 표준교리문서가 무엇인지 아주 잘 말해주고 있고 그것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인 것이다. 이 세 가지 표준교리문서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다고 우리교단의 헌법에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여서 그 의미들을 밝혀 놓은 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를 원한다면 이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배워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여러분들도 성경을 보는 눈이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신천지에 빠지는가? 한국교회가 신천지 때문에 많은 몸살을 앓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위험 속에 빠져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이 신천지 이단에 빠지는가 하는 것이다. 왜 신비주의나 신사도운동같은 그런 잘못된 신앙에 빠지는가? 왜 은사주의나 번영신학 같은 그런 것에 신자들이 빠지곤 하는가?

 

그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불건전한 잘못된 신앙에 현혹되어서 빠져 가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자.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것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카톨릭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아무렇게나 해석한다. 그래서 온갖 미신적인 것들이 그 교회에 가득한 것이다. 교황이 성경을 해석하기도 하고, 또 카톨릭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경아래 있다. 성경은 교회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성경자체가 해석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성경을 제 멋대로 해석하게 되면 카톨릭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교회에 온갖 미신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교단의 표준교리문서를 부지런히 배워야 되고 기독교강요같은 그런 책을 연구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여러분들에게 개혁주의 신앙이 견고하게 세워져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3) 개혁주의 신앙은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예배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과 수단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토마스 빈센트는 제 2계명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2계명에서 요구하는 예배는 예배의 방법에 중점을 두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과 수단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며 다른 어떤 방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 또 하나님께서 지정해 놓은 방법을 따라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중심의 예배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고 영으로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배방식은 반드시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육적인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제 2계명에서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라고 말하였다. 우상은 물질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예배하는 방식도 대단히 육신적인 것이다. 그 앞에 향을 피운다든지, 또 물체를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든지, 주문을 외운다든지, 또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그 우상 앞에 차려 놓는다든지, 또 그 앞에서 큰 절을 한다든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우상을 제사할 때는 육적으로 그와 같이 제사를 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상과는 달리 영적으로 존재하고 계시는 분이시기에 예배는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인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요소들을 가지고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오는 요소라고 하는 것은 말씀, 기도, 찬송, 헌금, 그리고 성찬등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같은 요소를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과 수단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의 예배를 하면 따분한 것으로 생각하고 뭔가 새로운 요소가 들어가야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이 아닌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따분하게 생각한다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도 기분이 좋으실꺼라 착각 하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죄 있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나 하나님은 순수하게 영으로 존재하고 계시는 죄가 전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과 죄가 없이 순수하게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절대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좋아하는 것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죄인은 죄를 짓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죄를 싫어하시고 혐오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한히 기뻐하시는 것을 죄인은 아주 따분하게 여긴다. 또 죄인이 아주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혐오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좋아하면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거나 또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버려야 된다.

 

시내산 밑에서 드려진 예배를 생각해 보자.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32:6)

 

시내산 밑에서 드린 예배라고 하는 것은 그 방식이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노는 그런 방식의 예배였다. 그들은 그 예배를 드리면서 대단히 흥분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놀았으니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또 기분도 아주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기분이 아주 좋으니 하나님도 대단히 좋아하실 것이라, 또 이 예배를 받을 것이라 그들은 생각하였을 것이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대노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으면 하나님께서도 좋아 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10)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를 좋아하시는가?

하나님중심의 예배, 또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과 수단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좋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드려지는 하나님 중심예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인본주의적인 예배, 하나님께서 규정하지 않은 그런 방식을 갖고 예배하는 것은 절대 받지 않으신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5)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를 다 받는 것이 아니다. 받지 않는 예배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

 

무지와 미신가운데 드려지는 예배, 또 인본주의적으로 드려지는 예배, 인간의 기호에 맞추어서 드려지는 예배, 인간중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받으신다.

 

요즘 보면 인본주의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강단에서 설교하는 분들이 그런 예배를 조장하는 것 같다. 청중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세상이야기를 많이 하고 또 웃기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중심 예배가 아니라 인간의 기호를 맞추려고 하는 인본주의적인 예배이다. 강단에 서 있는 사람들은 진지하고 엄숙하게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성경을 성경말씀 그대로 잘 풀어서 전해야 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청중들이 받든지 안받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수행해야 될 사람이 바로 강단에 서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청중들의 눈치나 보고 또 청중들이 어떤 것을 좋아할까 생각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잘 기획해서 그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요즘에는 많이 있는데 그 예배는 전적으로 인본주의적인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 그런 예배이다.

 

또 청중들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진지하게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받고 목사가 개인적인 말을 한다고 생각을 해서 자기하고 견해가 맞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그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서 주어지는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는다. 자기가 왕이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태도가 대단히 산만하고 집중을 하지 못한다. 또 예배를 재미없다고 말을 하는데 바로 그와 같은 청중들이 또한 인본주의예배를 조장하는 주최들인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이란 하나님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 존재방식에 맞아야 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되며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수단과 방법을 따라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가?

 

여러분은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면서 참여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사람중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중심인가? 우리는 항상 하나님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 신앙은 자기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기초이다. 자기의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닌 바리새인 신앙이다. 그것은 또한 카톨릭신앙이다. 그것은 또한 알미니안 신앙이다. 자기의를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자기의를 버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데 교회와서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서도 자기의를 버리지 못한 것은 아직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 다른말로 하면 중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닌 다른 불건전한 신앙이다. 자기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인 것이다.

 

둘째로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경을 개인의 체험이나 세상적인 그 어떤 것들로 해석하면 반드시 거기서 불건전한 신앙이 나오게 되어 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에 너무나 주관적이다. 거기에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없고, 그 해석에 따라서 정확하게 적용하는 것도 없이 그저 아무런 해석도 없이 성경을 읽고서 곧바로 적용을 해버리는 대단히 주관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불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이 따르는 중대한 원리인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개혁주의 신앙은 사람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중심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 자체가 벌써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예배가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우상숭배이다. 예배는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데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과 수단을 따라서 드려야 된다. 개혁주의 신앙은 인본주의적이 아니라 신본주의적으로 즉,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것이다.

 

종교개혁 제 496주년을 맞이하였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들이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잘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로마카톨릭신앙,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신앙, 아니면 알미니안신앙, 또 그런 불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피를 흘리며 우리들에게 전해준 그 고귀한 그 개혁주의 신앙을 잘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들도 고난과 희생을 각오하면서 이 귀한 신앙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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