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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2장>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 능력의 한계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1.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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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2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 능력의 한계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의 특징과 2장의 탐구 논제

 

전도서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도 아니며 어떤 사건의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보고서도 아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종의 철학적 사색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는 일목요연하게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색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도서가 그 내용을 직설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간접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도서는 일종의 소설 형식을 빌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가능성들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거쳐 긍정과 부정의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도서는 독자들로 하여금 전도서의 논리적인 이론과 결론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매우 치밀하고 고도한 이성적인 동의를 구하고 있다. 때문에 전도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곳곳에 복선을 깔아두고 독자로 하여금 논리의 내면에 담겨 있는 의미를 추구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도서의 특성을 간과하게 되면 독자는 전도서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결과 전도서가 의도하는 논리적인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전도서를 대함에 있어 독자는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는 전도서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내용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도서의 저자가 구태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전도자라는 익명을 도입한 것에서도 이 사실이 확인된다. 물론 전도서의 흐름에 순응하며 진행하다보면 전도자의 정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간과할 때 독자들은 전도자의 정체를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전도서를 대함에 있어 문장을 문자의 나열된 형태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도서의 구조가 의외로 서론(1:1)과 본론(1:2-12:8) 그리고 결론(12:9-14)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단순성 때문에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를 더 세분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해 왔었다. 그 결과 전도서의 문맥이나 외형적인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도서의 단락들을 나누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된 단락에 근거하여 전도서를 임의대로 석의함으로써 본래 전도서가 의도했던 메시지를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너무도 단순하고 단조로운 2장의 구조 역시 그 특성을 무시하고 일반적으로 4개의 단락(1-11, 12-17, 18-23, 24-26)으로 구분 짓는다. 그러나 이러한 단락의 구분은 오히려 2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전도서의 주제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2장의 주제는 앞서 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논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1장과 연속성을 가진다. 1장에서는 자연계와 인간에 대한 이성적인 탐구를 그 주제로 하고 있으며 2장 역시 같은 철학적 논제를 가지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논의

 

1) 이성으로부터 경험으로

전도자가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 도입한 방법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통해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것이었다(1). 개역 성경의 모호한 번역은 마치 전도자가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구절은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이제 내가 너를 즐거움으로 시험하리니 무엇이 선한 것(good)인가를 찾으라”(필자 역)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살아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한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경험적인 삶으로부터 가치 있는 것을 찾음으로써 얻어지는 희락(mirth) 또는 유쾌함(gaiety)을 지시한다. 즉 전도자는 삶의 현장에서 악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통해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유쾌함을 찾음으로써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를 풀어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내가 너를 시험하리니라는 구절에서 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세심한 관찰을 요한다. 여기에서 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좁게는 전도자 자신이거나 인간나아가 인간의 삶이거나 인간의 이성과 같은 추상적 개념, 더 넓게는 이 세상혹은 역사등 인류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

이것은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2:3)라는 말속에서 라는 존재의 범위가 천하 인생에게까지 확장되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전도자는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경험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형태의 삶과 인생을 그 경험의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모든 피조계에서 최고의 위치에 서있는 전도자

이처럼 전도자는 자기 마음에 원하고 좋게 여기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옮겨 시험해 봄으로써 얻어진 결론에 대해 말하기를 허무라고 단정한다(1절하).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잠깐이건 영속적이건 또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것들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2:2)고 설명한다.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입김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어서 전도자는 자신이 누렸던 즐거움과 기쁨이 무엇이었기에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구의 성격을 3절에서 밝히고 있다.

전도자는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하여”(2:3)라고 말한다.

전도자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삶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 선천적 감성에 따라 이 일을 시도했다. 그는 먼저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자신의 육신을 즐겁게 하는 방법들을 찾았다. 동시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인생 안에서 쾌락을 찾는 방법들을 섭렵했다. 어리석음을 취한다는 것은 규범까지도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감정과 욕망에 따라 행했다는 것으로 이성에 제한 받지 않는 감정의 모든 가능성을 다 시험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도자가 맹목적으로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전도자는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4-8절에 기술해 놓았다. 전도자는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뜻대로 자기 뜻을 이루고 성취하고 실현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그 일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전도자는 먼저 사업을 크게 일으켰는데 자신을 위해 집을 지으며 포도원을 만들었다(4). 이것들은 인생이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들이다. 집은 생존을 위한 필수 공간이며 포도원은 생존을 위한 일터를 상징한다. 집과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마치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의 위치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전도자는 작은 의미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 다음에 전도자는 좀더 넓은 생존의 공간으로 동산을 만들고 그곳에 모든 종류의 과목을 심었다(5). 그리고 그것들이 보존되기 위해 샘을 만들었다(6). 이러한 묘사는 전도자가 마치 창세기 2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지 창조 기사를 모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도자는 자기가 마치 창조주인 것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위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도자가 만든 세계를 경영하기 위해 남종과 여종을 두고 소와 양 떼로 가득 채웠다(7). 이것은 마치 인간 창조와 각종 짐승 창조에 대한 창세기 기사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가득 채우기 위하여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2:8)고 말한다. 전도자는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후 기뻐하셨던 것처럼 전도자 역시 자신을 위한 모든 즐거움을 다 누렸던 것이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전도자는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2:9)고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전도자만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한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전도자는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규모와 냉정과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쾌락을 다 실험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3)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인식한 인간의 한계

그러나 전도자가 이룩한 그 모든 일을 돌이켜 보면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11).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출중한 왕이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시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결국 그가 이룩한 것을 돌이켜 보면 해 아래서 무익한 것에 불과하다는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전도자가 창조주와 같은 절대적인 위치에 서서 행했던 그 일들이 허무에 불과한 이유에 대해서는 12-23절에서 밝히고 있다.

먼저 전도자는 자기가 이룩한 이 일로 말미암아 자기 뒤에 오는 세대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12). 왜냐하면 지혜와 미련함의 가장 극단적인 지경까지 전도자가 직접 다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 뒤에 오는 사람은 그 이상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자신이 경험한 지혜와 미련함의 정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혜와 미련함은 인간의 행위와 일에 있어서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직접적인 원인인데 전도자가 그 양 극단의 한계까지 모두 도달함으로써 더 이상 해 아래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혜에 있어서나 미련함에 있어서나 그 한계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지혜는 분명히 미련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점이 있다. 마치 빛과 어둠의 차이와 같아서 그 끝이 어디인지조차 모를 정도이다(13). 지혜자는 그 마음에 마치 눈이 달린 것처럼 밝은 빛 아래에서 지혜롭게 행한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는 맹인과 같아서 흑암가운데서 어리석음을 행한다. 때문에 지혜자와 미련한 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비교 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혜자이든 미련한 자이든 결국에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14).

지혜자와 미련한 자의 차이가 그처럼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당하는 일이 같다는 것은 지혜자라고 해서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지혜를 더하려고 했던 그 모든 수고라는 것도 결국 허무에 불과한 것이다(15). 그 이유는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잊혀져 버리고 죽음으로 그 종말을 고하고 말기 때문이다(16). 비록 죽음이 지혜자에게나 미련한 자에게나 공평하게 찾아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혜롭게 산 사람이나 미련하게 산 사람이나 똑 같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가장 부당한 불공평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해 아래에서 행하는 그 모든 일이 바람을 잡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17).

전도자는 12절에 이어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2:18)고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것은 11절에서 전도자가 말한 허무에 대한 두 번째 이유로 자신이 이룩해 놓은 그 큰 일의 업적을 언젠가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미련한 사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19). 그가 지혜자라면 이미 전도자가 이루어 놓은 일을 잘 보존할 것이지만 그가 미련한 자라면 전도자가 이룩해 놓은 그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미련한 자일지 전도자가 결정할 수 없다. 때문에 전도자가 지혜로 애써 이룩해 놓은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자기가 큰 업적을 이루어 놓기 위해 창조주와 같이 온갖 재주를 동원해 수고한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인생 자체에 대하여 실망을 하게 되었다고 토로한다(20). 이것은 마치 전도자가 소우주처럼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마음의 즐거움에 따라 가득 채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알았지만 그 모든 일이 허무와 같기 때문에 인생 그 자체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자신이 이룩한 그 위대한 업적이라는 것조차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21). 전도자는 최고의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동원해 애써 업적을 이룩해 놓았지만 정작 자신이 그것으로부터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22). 때문에 한 평생동안 근심하고 수고하고 밤잠도 못 자면서 일한 그 모든 것이 허무일 뿐이다(23).

이러한 이유들을 통해 결국 전도자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2:24)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그 몫을 누리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24).

이 세상에서 전도자처럼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더함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전도자는 본능적으로 최상의 상태를 누렸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행한 수고의 결과도 자기 마음대로 누릴 수 없으며 먹고 즐기는 일조차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전도자와 같이 욕구 본능을 채울 수 없을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전도자가 도달한 결론 외의 다른 결론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자가 쌓아 놓은 것까지 빼앗아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사실을 떠나 무엇인가를 도모하려고 한다는 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26). 이로써 전도자는 처음에 자연계로부터 인간 자신에게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자신이 마치 창조주인 것처럼 온갖 일을 친히 체험했음에도 결국 그가 도달한 곳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인간의 한계를 다시 토로한다. 그리고 일의 한계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이것은 사실 전도자가 지금까지 전개시켜 왔던 논의에서 제외시켰던 새로운 요소이다. 전도자는 처음엔 자연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자 시도했지만 그 모든 것이 허무라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최고 위치에 서 있는 인간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그 안에서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경험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 역시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에 전도자는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결론은 없다. 결국 전도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전개된 논리의 전개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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