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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4장> 역사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부조리한 삶의 형태들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1.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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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4장 구속사 강해

역사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부조리한 삶의 형태들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4장의 탐구 논제

 

1-2장에서 전개된 무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들이 허무라는 결론으로 끝나고 3장에서는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도자는 무신론에 근거한 세상의 자연 현상 탐구, 인간에 대한 순수 이성 탐구, 실천적 이성 탐구를 통해 인생은 이 땅에서 수고한 그 모든 것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으로부터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 아래 유신론에 근거한 철학적 논제들을 전개시켰다.

3장부터 유신론적 세계관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 했던 전도자는 먼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완벽한 역사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이어 전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인간의 주체성이란 아무 가치가 없는가에 대한 추론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선과 악이 전도되어 있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산다는 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는가라는 논제를 제시한다.

전도자는 마침내 궁극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게 적절한 보응을 하실 것이지만 죽음이라는 한계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신론적 허무를 느낀다. 이런 논제들은 인간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삶의 한계를 확인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삶이 허무하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삶을 즐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상에서 전도자가 전개시키고 있는 무신론적, 유신론적 질문들은 누구에게든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요한 철학적 논제들이다. 이 논제들은 역사이래 꾸준히 사람들에 의해 집중적인 탐구가 되어 왔으며 여전히 그 해답을 찾지 못한 난제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는 전도자가 단순히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탐구 자세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성격을 충분히 검토한 후 전도자는 4장에 와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 최선의 일이란 사는 날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기며 살자3장의 논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에 들어간다. 과연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삶을 즐기는 것보다 더 나은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제들을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전도서는 앞서 3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4가지의 허무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를 시작하고 있다.

 

2. 부조리로 가득한 사회 공동체에 대한 논의

 

전도자가 탐구한 철학적 논제들에 대해 계속해서 허무를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전도서가 결코 삶의 의미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전제하지 않고 있다는 역설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몇 번에 걸친 관찰을 통해서 얻어진 허무는 사실 긍정적인 어떤 결과를 추구하기 위한 의도적인 결론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전도자가 전도서 이면에 숨겨둔 복선이다.

전도자는 이미 삶의 의미에 대해 확고하면서도 긍정적인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정적인 결론을 유추해 나가고 있는 것은 최후의 순간에 제시될 긍정적인 결과를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전도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철학적인 논제들을 부정함으로써 최후에 있을 진정한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도자는 먼저 하나님은 완벽하게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일을 즐기는 것이 가장 선하다3장의 결론을 하나의 전제로 삼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현실을 통해 탐구해 나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3장 말미에서 결론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과연 이 세상은 사람이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고 있다.

 

1) 폭력과 악으로 가득한 사회 현실

전도자는 먼저 해 아래에서 행해지고 있는 착취, 억압, 억울함에 관심을 가진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4:1)는 전도자의 관찰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즐기며 살아감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학대를 당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학대하는 자가 있음을 전제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그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권력은 학대하는 자의 편에 서 있다. 때문에 학대를 당하는 자는 학대하는 자의 권력 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사회는 이처럼 착취와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사회는 억울한 사람을 위해 위로해 주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권력의 속성을 밝히고 있다. 왜 사람들이 권력 지향적이 되는가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착취하여 자기 유익을 얻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성향이다.

이로써 전도자는 권력이 오용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를 제시하고 있다(2). 살아 있는 자보다 차라리 죽은 자가 복되다는 역설적인 강조는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한 발 더 나가서 차라리 출생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강조한다.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악을 보기보다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복되다는 것이다(3). 여기에서 전도자는 권력이 오용되는 사회의 심각성을 제시하고 있다.

 

2) 자아 실현에 인생을 건 사람들

전도자가 볼 때 이 사회는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인줄 알았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약육강식의 피비린내가 나는 정글과 같은 곳이었다. 이에 그 원인을 추구한 결과 사람들의 수고라는 것이 결국 질투와 시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4:4)는 말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이 힘들여 수고한 모든 수고가 결국은 이웃과의 경쟁심이 그 동기인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이 힘들여 노력하며 사는 일의 정체, 목적, 의미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시기로부터 발단된 경쟁심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수고라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사람들이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더불어 어떤 목적을 도모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전도자는 차라리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살을 깎아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본다. 즉 열심히 일해서 허무하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하지 않고 평안을 찾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5-6). 이것은 서로의 이익 추구가 일치하지 않는 사회의 한 단면을 지적하고 있다. 상호 유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상호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 공동체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타인을 위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곧 자아 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로 하여금 폭력과 경쟁을 유발시키는 원인이다.

 

3) 상호 신뢰가 무너진 사회의 성격

전도자는 이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음을 보고 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사람에게는 라고 하는 1인칭만 있을 뿐이다. ‘라고 하는 2인칭 개념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인간을 가리켜 홀로 사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그에게는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민족도 없다. 이처럼 인간 사회는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다. 이것이 사회와 인류의 분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안에서 사람은 타인을 잠재적인 경쟁 상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4:8)고 말하고 있다. 혈육도 없고 이웃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 사회의 극단적인 모습은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벌레처럼 일을 추구하게 만들 따름이다.

그 결과 인간은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곧 철저하게 고립된 자신이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 아닌 고역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 자체가 헛된 것에 지나지 않다(7).

전도자는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일하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3:22)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 이 회의의 근원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부터 온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은 처음부터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개개인에게 삶의 목적을 추구하게 하셨다.

인간은 본래 타인과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창조 원리이다. 전도자는 바로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공동체와 더불어 사는 삶은 서로 수고함으로써 더 나은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며(9),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으며(10), 궁핍할 때 위로를 얻을 수 있으며(11),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12)에서 찾을 수 있다.

전도자는 앞서 혼자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모습(1-8)에 대한 회의로부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사회 구성의 기본 원칙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뢰와 사랑이다. 신뢰와 사랑만이 함께 살아가게 하는 근본 질서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상대방과의 신뢰와 교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 공동체는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게 되며 그 안에서 개개인들의 존재 가치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자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신뢰가 무너지고 그 안에서 사랑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4)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여 악이 가득하고, 이웃과의 경쟁으로 시기가 가득하며, 죽도록 자신을 위해 일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그 원인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거국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때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전도자는 한 예를 제시하고 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4:13-14)는 기사가 실제 역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은 이 기사의 배경 인물을 추적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기사에 적합한 실제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이 기사는 전도자가 지금까지 전개하고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제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전도자는 이 이야기 속에서 전혀 상반된 두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다. 한 사람은 젊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옥살이를 할 정도로 미천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왕으로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평생 최고의 지위를 누려 왔었다. 이 두 신분의 차이는 마치 최하위층과 최고위층의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의 젊은이는 지혜롭지만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왕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일반적으로 젊은 청년은 미숙하고 경험이 없음을, 반면에 늙은 왕은 원숙하고 노련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의 설정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 사회의 현실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왕권을 계승하여 승승장구해야 할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고 미련하다는 것은 왕권의 계승이 결코 순조롭지 않다는 복선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은 왕으로서 훈련을 받고 최고의 학문적 지식과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상식이다. 그러나 그만한 인물을 왕가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사회의 현실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최고의 권세와 지위를 누리고 있던 왕은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전혀 예상치 않은 인물이 왕권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것으로 백성들의 선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4:15)는 이야기처럼 한 때 젊은 왕을 선호했던 백성들은 그 젊은 왕에 대해 실증이 나면 다른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왕과 백성 사이의 관계는 신의로써 맺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신의보다는 실리(實利)를 따른다.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한다. 명분은 그 다음에 추구할 뿐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명분은 이익이 없을 때 이익에 대한 보상으로 앞세울 뿐이다. 이것이 신의가 없는 사회의 단면이다. 이것은 개인 사이뿐 아니라 거국적인, 좀더 명분을 세우고 중시해야 할 국가적인 대사를 앞에 두고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이 사회가 그런 것처럼 국가적인 대사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전도자는 3장에서 역사라고 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삶의 의미를 추구했었지만 완벽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몫은 그저 현실 세계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유추했었다. 그리고 전도자는 4장에서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배경이 되는 현실 사회를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전도자가 발견한 것은 폭력과 불의와 불신과 같은 비 정상적인 현상만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결과는 3장에서 탐구했던 결론을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선한 일을 추구하며 즐기고자 했던 인생이 사회적인 외적 요소들로 말미암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사회나 국가와 같은 거대한 질서조차도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사람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곳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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