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3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역사의 성격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전도서 1-2장과 3장의 탐구 논제
전도자는 1장에서 인간 바깥 세계로부터 인간 내면 세계로 그리고 2장에 와서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인생이라고 하는 소우주와 같은 세계를 거쳐 마침내 하나님의 존재로 귀착되는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 철학적 논제들을 시도해 왔었다. 즉 자연계의 현상 세계에 대한 탐구(1:2-11)와 인간에 대한 탐구(1:12-18) 그리고 경험에 대한 탐구(2:1-23)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탐구(2:24-26)라고 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적인 탐구 과정에서 전도자는 먼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없는 세계관, 즉 무신론적 세계관(혹은 세속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큰 전제 아래에서 탐구를 시작했었다. 그러나 무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탐구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같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을 가져 왔다. 전도자가 도달한 ‘헛됨’은 피조 세계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인간 이성에 근거한 것으로 그 누구도 이 결과 이외의 결론을 유추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무신론적 세계관에서 추구한 삶의 의미는 전도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탐구한다 할지라도 결국 ‘허무’로 귀착되고 만다는 사실을 1-2장에서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구태여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복선이 그의 논증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철학적 논제가 부정적인 결론으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무언가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 점을 되돌아본다면 ‘세상의 자연 현상이 과연 허무한 것인가?’ 그리고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이성적 탐구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끝으로 ‘인생이 이 땅에서 수고한 그 모든 것에서 과연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로 전도자는 하나님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결과되는 일들에 대해 탐구해 나가기 시작한다. 전도자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유신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3장에서부터 ‘삶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철학적 논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역사의 성격과 그 현장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
전도자는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먼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는 전제 아래 삶의 의미에 대한 논증을 펼쳐 나가고 있다. 이 구절은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에는 때가 있으니”(KJV)라는 번역에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시기(ןמז)란 정해진 날짜 혹은 시간을, 때(תע)는 어떤 시점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전도자는 시간이라고 하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1) 전도자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역사의 불투명성
시간의 틀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삶을 구성하고 활동하는 제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전도자의 역사 의식을 보여준다. 시간의 틀 속에서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은 역사 속에도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괄적인 역사 의식 아래 전도자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전개시키고 있다.
전도자가 제시한 것은 먼저 생과 사에 대한 것이다(2절). 출생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은 출생으로부터 시작해 죽음이라고 하는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인생의 모습과 성격을 포괄하고 있다. 전도자는 양극단을 통해서 그 사이에 포함되는 모든 삶과 활동들, 그 다양성과 상반성까지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안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출생과 죽음을 좀더 일반화시키면 생성과 소멸, 나아가 창조와 파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만물은 그 시작이 있는 것같이 그 끝이 있으며 이것은 정해진 때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시작도 정해진 질서를 따라 난 것이며 스스로 자의적인 결정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는 것 역시 같은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파종과 추수란 사람들에 의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정해진 때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고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3절)는 것 역시 인간은 피조 세계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신이 임의로 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정해진 규범이라고 하는 한계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4절)는 것은 인간의 다양한 정서와 감정의 변화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 역시 정한 때에 따라 이루어짐을 말한다.
심지어 돌멩이같이 흔해빠진 것도 버릴 때가 있고 모을 때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는 것처럼 매사의 작은 일까지도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이다(4절). 마찬가지로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아내라도 안을 때가 있고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고 각가지 삶의 형태와 여건에 따라 제각기 때를 따라 진행된다는 것이다(5-8절).
전도자가 이렇게 세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 아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시간적인 틀을 역사라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틀 속에서 친히 개입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이 전도자의 역사 의식이다.
시편 기자 역시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계시로서 역사를 포함한 자연 계시와 더불어 말씀 계시를 주셨다고 말한 바 있다(시 19:1-9). 이것은 인간이 창조된 이후 독자적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주어지는 자연 계시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통해 살도록 되어 있음을 말한다. 즉 사람은 어떤 경우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존해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창조이래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시간, 즉 역사라고 하는 틀 안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것은 역사의 불투명성으로 인간은 그 한계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스스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발견함에 있어 완전한 능력을 행할 수 없는 한계 안에 있다. 그 결과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전 3:9)고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때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하나의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자가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느낀 첫 번째 ‘허무’이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의지의 무용성
여기에서 전도자는 새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주관된다면 인간 존재에게서 과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주장된다면 인간이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를 철학적 논제로 제시하고 있다(10절). 이 논제에 대해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해진 때에 따라 살도록 하신 것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11절). 하나님은 양극단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구성 요소들, 또는 그와 상반되는 요소들까지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따라 배치, 배열, 정리, 발생케 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참된 의미를 갖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사가 진행되고 있는 역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본능을 심어주셨다고 전도자는 평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도자는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인생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는다.
이러한 전도자의 시각 전환은 1-2장의 세계관과 상반되는 결과이다. 자연계와 인간 그리고 인생의 일들 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허무’를 느낀 것은 무신론적 세계관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유신론적 세계관으로 바라 본 세상은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신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신론적 세계관 안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전 3:11하)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역사 의식을 주시고 때에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부여하셨고 그것을 탐구하기 위한 본능을 주셨지만 정작 삶의 의미를 의미 있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전도자는 하나님의 주권 행위가 오히려 삶의 주체자로서 인간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문제를 도출시키고 있다. 인간이 행위 주체자로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자기가 좋아하는 뜻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의지나 가치관에 따라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행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12절). 이러한 논리적인 귀결에 따라 전도자는 자신이 수고해서 얻은 것을 먹고 마시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 선(בות)이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13절). 이것이 전도자가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느낀 두 번째 ‘허무’이다.
3) 하나님의 통치와 부조리한 역사의 현장
그러나 전도자가 느낀 허무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통치가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선(בות)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해서 불변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행함에 있어 가감이 필요치 않고 주권적이라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며 궁극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일은 그 앞에 경외를 표하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 앞에서 경외를 표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는 전도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행하심은 너무도 완전하여서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일관성이 있으며 그 질서 안에서 누구도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완전성이 더 분명해질수록 전도자는 삶에 대한 강한 희열을 느끼거나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 희박해짐을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전도자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를 너무 완벽하게 이끌고 가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닫혀 있다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역사의 현장을 자세히 관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완벽한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세상에서도 일종의 부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전 3:16)는 점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공평과 공의로 대변된다. 그런데 그 자리에 불공평과 불의가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어떻게 불의와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 안에서 선과 악의 질서가 바뀌어 있다는 것은 역사의 궁극적인 원인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지셔야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역사의 진행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생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책임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유추될 수 있다. 결국 전도자는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2)는 생각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전도자가 느낀 세 번째 ‘허무’이다.
4) 미래에 대한 소망과 인간의 죽음에 대한 논의
그러나 세 번째 허무에 대한 생각은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전 3:17)는 깨달음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즉 역사의 처음과 끝이라고 하는 양극단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는 제 각각 그 때가 있으며 언젠가 때가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 세계 안에서 잠시 나타나고 있는 선과 악이 뒤바뀐 일들은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역사를 진행시키시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전도자는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전도자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선과 악의 질서를 바로 잡을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접함에 있어 전도자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일종의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하심이라”(전 3:18). 전도자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문제들로 인하여 무척 피곤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곧 전도자가 봉착한 문제는 역사 속에서 전도된 선과 악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해결될 것이지만 그러나 유한한 사람으로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존재란 죽음 앞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 존재가 헛되이 죽어 가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하여 인간이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다는 환상과 교만을 제거하시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인생 자체가 헛된 일일뿐이다(19절).
비록 인간의 영혼이 하늘에 오르고 짐승의 영혼은 땅으로 내려감으로써 질적인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둘 다 죽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인간이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20-21절). 이 사실은 인간의 삶이 유한하고 단회성이기 때문에 한 번 죽음으로써 종결되면 다시는 그 삶을 반복할 수 없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된다(22절).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몫)이라”(전 3:22)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즉 인생은 결국 자신이 역사 속에서 쌓아 올린 일에 대한 보람과 가치를 찾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몫이며 최선의 길일뿐이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그 안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이 네 번째 느낀 ‘허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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