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청교도운동의 전개
1. 영국 청교도운동 전개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개혁을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성서에 따라 더욱 철저한 개혁을 추진하려 한 영국 프로테스탄트는 사상적 배경은 칼뱅이즘으로 하여, 개혁운동은 16∼17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국교회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지향하는 무리, 국교회와의 분리를 주장하는 무리,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와 같이 외국으로 탈출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무리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후에 칼뱅주의적 개혁을 지향한 장로파를 중심으로 독립파·침례파·퀘이커파·수평파·디거파· 제5왕국주의자 등 여러 파로 나누어졌다.
개혁의 바퀴가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것은 멈출 수 없는 힘이 되었다. 각기 새로운 지도자들과 그룹들은 개혁을 한층 더 몰고 갔으며, 1600년대는 영국교회에 부흥이 있었던 한 시기를 내다보고 있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영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로 보기도 한다.
첫째, 성장의 시기가 있었다(1560-1640). 청교도 운동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안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청교도들은 성경적 권위와 근거를 찾을 수 없거나 희박한 종교적 의식들을 폐지하기 원했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성경에 기초된 설교와 실천에 있었다. 이 영역에서의 진전은 특히 개인적 성결과 가정의 성결을 통해서 나타났다. 이러한 성결의 강조는 매일의 ‘Q T(Quiet Time)’와 가족 경건회(family devotions)를 낳았다. 이 성결에 대한 동일한 열망은 또한 19세기 후반의 케스윅 운동(Keswick Movement) 배후에 놓여 있으며, 심지어 1990년대 미국 플로리다 펜사콜라 부흥과 영국 선더랜드의 부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Ⅰ, 1558-1603) 재임 초기 동안, 청교도들은 의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개혁에 대한 높은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의 후계자 제임스 1세(King James Ⅰ, 1603-25)는 청교도들에게 적대적이었고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국교회에 순응하도록 만들겠다. 아니면 나는 그들을 영토 밖으로 내몰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보다 심한 것을 보여주겠다.” 그 결과, 국교회로부터 나와 그들 자신의 독립된 회중들을 만든 성직자들에 의해 분리주의 운동이 자라났다.
이 시기에 핍박이 심했고, 적지 않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회중들과 함께 보다 관대한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 망명에 의한 두 가지 사건은 특별히 의미가 있다.
첫째, 1608년, 네델란드의 홀란드에서 일군의 메노나이트(재세례파)들과 교섭한 결과,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1550-1616) 존 스미드(John Smyth, 1570-1612)는 산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재발견했다.
헬위스는 자신을 포함하여 스미드와 52명의 교회 멤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3년 후, 헬위스는 런던으로 돌아와서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둘째, 1620년, 순례자들(Pilgrim Fathers)은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뉴잉글랜드의 새로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좀 더 개인적인 경건의 측면에서 보자면, 청교도 운동은 개인과 가족의 경건을 강조한 가정 중심의 운동이었다. 매일의 가족 기도의 강한 실천이 있었다. 성서가 온 가족들에게 읽혀질 때, 가장은 성서 본문을 설명하면서 말씀을 나눴을 것이다. 종종 이것은 거의 칼빈주의적 예배 형태로 발전했다. 이와 맥을 함께하는 개척자들 가운데 한 명은 매튜 핸리(Matthew Henry)였다. 그가 쓴 성서주석은 바로 이런 실천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둘째, 청교도적 이념의 전파는 많은 부분을 영국시민전쟁 기간 동안 의회 의원이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그의 신형군대(New Model Army)에 빚을 지고 있다. 이 군대의 많은 병력들은 거듭난 신자들이었으며 청교도적 설교 가들이었다. 이 군대의 발길이 닿았던 어떤 지역들에는 독립교회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 모든 교회들은 그 군대가 주둔해서 설교했던 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청교도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종교적 개혁운동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마지막 시간까지 극단적일 만큼 급진적이었던 하나의 정치적 힘이었다.
1625년, 청교도들은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윌리암 로드(William Laud, 1573-1645)는 종교개혁과 선택의 교리, 예정설, 그리고 믿음에 의한 칭의 등을 거부했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면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을 선호했다. 이 ‘세상을 긍정하는 신학’(world-affirming theology)은 보다 더 세상을 부정하는(world-denying) 청교도적 이념과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1662년, 모든 성직자는 개정된 국교회 기도서에 따라야 한다는 일련의 의회 법안이 통과되었다.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국교회로부터 축출되었고, 그들의 이전 목회지로부터 5 마일 이내의 지역에서 설교가 금지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약 2000명의 성직자들이 축출되었다. 가정 모임들 또한 금지되었다. 퀘이커 지도자 윌리암 펜(William Penn)은 추산하기를, 이 박해기간 동안, 적어도 5 천명이 그들의 종교적 확신 때문에 죽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은 보다 관용적인 유럽 국가들 혹은 아메리카로 망명하여 거기서 그들의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은 침례주의자(Baptists)와 퀘이커(Quakers) 등과 같은 다양한 그룹으로 분해 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이 운동의 추진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물론 정치적 힘으로서의 역할도 실질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고난의 신학에 길을 열어주었다.
매튜 헨리 이외에, 아마 가장 유명한 영국 청교도는 사상가이며 목회자였던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열정을 가졌기에, 설교를 금지하는 박해를 대항해서 1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에 남긴 가장 위대한 공헌은 아마 네 단어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이것은 그가 옥중에서 쓴 것이다. 그는 청교도적 사상들이 어떻게 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습득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가 될 것이다. 그는 또한 17세기 말, 청교도주의를 계승했던 새롭고 그리고 덜 정치적인 비국교도들(Nonconformists)의 전형이다.
청교도의 개혁운동은 예배개혁에서 교회정치개혁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정치개혁으로 나아갔다. 국교회의 탄압 속에서도 설교운동과 클래시스운동 등으로 동조자를 늘려, 제임스 1세 시대에는 그들 요구대로 《흠정역성서(欽定譯聖書, 1611)》가 나오게 되었고 마침내 찰스 1세 때 혁명이 일어나 청교도는 크롬웰의 지휘 아래 왕정을 쓰러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은 11년으로 끝나고 왕정복고와 국교회의 부활로 청교도는 비국교회파가 되었다. 성서주의, 간소한 영적 예배의 강조, 신에 대한 강렬한 책임의식, 성스러운 공동체 건설 등이 청교도의 중심적 주장이었다. 또한 정치적·경제적으로 근대사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 청교 주의의 문학
한 걸음 더 나아가 청교 주의의 문화 풍토에 있어서 문학의 목적은 실리적인 것이었으며, 종교가 우선이고 모든 것은 종교를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이 즐겨 사용한 장르는 설교집이나 신학적 논술, 전기, 토론 그리고 역사로 실리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작품 주제는 그들 생활의 종교적 절대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모든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주제는 복잡한 과정의 갱생을 통한 원죄로부터 영적 세계로의 여정이었다.
청교도들의 문체 역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고 믿음으로써 청교도들은 일상적인 일들을 우화적이거나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청교도들의 신천지로의 출국을 명령하셨다고 믿음으로써 그들은 이 위대한 사건을 진지하면서도 극적으로 서술했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이 그들의 모든 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은 성서적 바탕과 심상 그리고 비유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끝으로 그들은 간소한 의식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문체도 간결함을 지표로 삼았다.
3. 미국에 끼친 청교 주의의 영향
아메리카에 이주한 청교도들에 의하여 미국의 건설은 청교 주의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정치 참여를 한정된 교회 구성원으로 제한하였고 특히 종교적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일종의 엘리트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오히려 미국의 독자적 민주정치에 역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집회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촌락공동체, 지방분권적인 정치제도의 발달은 미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고 중앙에 파견하는 대표자를 직접 선출하고 세금에 의한 공공사업을 펼쳤다는 것은 미국 정치의 중요한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갖는 독특한 선민의식은 미국인들의 낙천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선민의식은 다른 민족과의 접촉이나 선교 대상의 출현 시 수단이 무력이라 해도 과감히 자행하는 극단적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호전성 역시 미국인의 피 속에 선민의식과 같이 용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대륙 정착 시 인디언 정벌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레이건 대통령의 말 '소련은 악마의 제국(Evil Empire)'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잘 밝혀지고 있다.
한편 16C에서 17C동안 전 유럽과 미대륙 뉴 잉글랜드 지방을 휩쓸던 마녀 선풍이 있었는데 특히 뉴잉글랜드의 세일럼의 마녀 선풍은 청교도 사회가 낳은 폐단을 단적으로 지적하는 것이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점차적으로 상업 자본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게 되고, 청교도 사회 역시 상업에 의한 부를 축적한 세력과 주로 농업 위주의 기존 세력이 갈등을 겪게 되었다. 전자가 뉴잉글랜드 동부의 John Poster 세력이고 후자는 항구 서쪽의 John Putnam 세력이었다. 이 분파 싸움의 치열함 속에 부임할 페리스 목사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를 배격하고 성지를 더럽히는 악마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사탄의 허수아비로 취급되어 죽어 갔다. 상업주의의 거센 바람이 청교도들의 독특한 정신과 생활 그리고 마을의 특수성과 합쳐져 일으킨 큰 비극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미국인들은 17C청교도사회를 이상적인 세계로 간주하고 있으며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극도로 치달을 때마다 17C청교도 사회로의 복고를 주장한다.
[출처] 제3편 청교도 운동의 전개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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