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청교도의 이주
1.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1607년 영국의 국교회를 개혁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청교도의 한 급진적인 무리인 분리주의자들의 한 소수 집단이 네덜란드의 레이덴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네덜란드 당국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받은 것이다. 그러나 칼빈 파에 속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들을 주로 저임금의 노동직에만 종사할 수 있게 했다.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11년 동안 머물렀었다. 본래 고국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들 있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노동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풍습을 배워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들 보다 훨씬 덜 보수적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주일이나 교회 생활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이들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영국인으로 살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대륙 행을 결심했다.
청교도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다.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결은 그들을 북쪽 해안으로 밀어 갔고,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을 플리머트(Plymouth)라 불렀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후에 스스로 플리머트 식민지의 총독이 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였다. 그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으로 신학적인 지식도 깊었다. 그가 쓴 일기는 당시 플리머트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 메이플라워 호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에서 한 척의 배가 닻을 올렸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호로 10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배였다. 장장 9주일에 걸친 항해 끝에 마침내 배는 북 아메리카 동해안에 다다랐다. 새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곳을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의 이름을 떠서 플리머스라 부르기로 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고국을 생각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퓨리턴(Puritan), 즉 청교도로 제임스 1세의 청교도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그 해 겨울, 이주자들의 절반 정도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길을 닦고 집을 짓는 등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함께 예배를 드릴 장소도 만들었다.
(2) 필그림 파더스의 맹약
이들은 이미 항해 도중 정부형태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을〈메리플라워 맹약〉이라 한다. 맹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인 남자가 참여하는「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메이플라워 맹약〉은 훗날 미국 헌법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 호 사람들―이들을 후세 사람들은〈필그림 파더스(Philgrim Fathers〉라고 부른다. 이〈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들이다.
“신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들, 즉 신의 은총에 의해 영국, 프랑스 및 아일랜드의 왕으로 즉위해 우리의 최고 통치자가 되시고, 또 신앙의 옹호자이신 제임스 폐하의 충성스런 백성인 우리들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기독교를 보급하고, 우리 국왕과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하여, 버지니아 북부 지방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항해를 계획하였던 바, 이제 이 서약서에 따라 각자 신과 상대방 앞에서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맺어 정치 단체를 만들어, 그것으로 우리의 공동 질서와 안전을 지켜 나가고, 또 위에 적은 목적을 수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식민지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바에 따라, 언제든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률, 명령 등을 만들고, 헌법을 제정하며, 또 공공 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이에 대한 맹세로 우리들은 제임스 폐하의 재위 18년째 되는 기원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 코드 (Cape Cod)에서 여기에 서명하였다.”
<메이플라워(Mayflower) 서약(1620년)>
1620년 11월 11일, 필그림 파더스가 메이플라워호 안에서 맺은 이런 서약에 따라 정치 사회를 형성한다는 새로운 형식은, 그 뒤 아메리카의 동북부 지대에 만들어진 식민지 형성의 본보기가 되었다.
(3) 뉴잉글랜드에 정착
때는 11월 중순이었다. 1620년 일단의 레이덴 청교도들이 버지니아회사로부터 토지 소유 허가를 받아서, 101명의 남녀와 어린이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서 버지니아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폭풍을 만나 북쪽으로 떠밀려, 목적지와는 다른 뉴잉글랜드의 케이프코드에 상륙했다.
해변은 춥고 황량하였다. 원주민들은 불친절해 보였다. 별수 없이 그들은 거기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통나무집을 세워야 했다. 가져온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6개월 동안에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생존은 기적이었다. 그들의 신앙심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2만 명이 넘는 청교도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고국의 이름대로 뉴잉글랜드로 불린다.
뉴잉글랜드(New England) 는 지금의 미국 북동부지역에 위치한 6주(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를 뜻한다.
이때에 청교도 지도자 William Bradford는 청교도로서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우리를 오게 하시고 아름다운 항구와 평화로운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하신 하늘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바로 그 해 겨울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으로 그들의 절반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덤을 감추어야 했다. 그 고생스러웠던 첫 해 겨울 초대 총독 John Carver도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William Bradford가 총독을 계승했다.(30년 이상을 재임) 그의 지도 아래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가져왔던 씨앗들을 심게 되었고 콩, 옥수수의 씨앗은 인디언들로부터 받았다. 첫 수확을 거두게 된 해 가을 추수감사절을 하나님께 드렸다.
(4) 메사츄세츠
그 후 청교도들은 1621년 Fortune호를 타고 32명이 이주했고 1623년 Anne and little James호를 타고 100여명의 이주민이 새로 정착하게 되었다. 1630년에는 1000여명의 청교도 이민자들이 마사츄세츠 베이회사의 지원으로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늘의 보스턴을 건설했고 후에 하버드 대학을 세웠다. 그 후에는 영국에서 10년 동안 1만 8천명의 대 이민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1630년 찰스 1세로부터 식민지 건설의 허가장을 받은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매사추세츠만 연안에 도착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 종교적 관행이 영국에서 점차로 금지되던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의 지도자가 존 윈드롭은 신세계에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하며, 이 일에 착수했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엄격하게 자기들의 신앙에 따라 생활할 장소를 뜻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지방 전체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윈드롭이 이끈 이들 청교도들이 특허장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식민지를 다스릴 권한은 영국 아닌 매사추세츠에 있게 되었다.
특허장의 규정에 따라 청교도 교회의 소속이어야 하는 "자유인"으로 구성된 '제 지방 집회'(General Court)에게 통치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렇게 해서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청교도들이 종교는 물론 지배적인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이 보장되었다. 지사를 선출하는 것도 '제지방집회'였다. 다음 한 세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존 윈드롭이 지사직을 맡았다.
청교도의 엄격한 통치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지방집회'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로저 윌리엄스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과 그리고 그 '집회'와 영국교회와의 관계를 반대했다.
그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로부터 추방당하여, 1636년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덴스에 사는 나라가나세트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매입했다. 그는 그곳에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아메리카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매사추세츠를 떠난 사람은 윌리엄스와 같은 세칭 '이단자'들 만은 아니었다. 다른 청교도들도 더 좋은 땅과 기회를 찾아 이윽고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코네티커트강 유역의 땅이 비옥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토질이 박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630연대 초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들이 평평하고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 인디언들의 습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들은 흔히 교회의 신도가 아니더라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으며, 그리하여 선거권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되게 되었다.
이 무렵 차츰 많은 이민들이 신세계가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땅과 자유를 찾아 이주해옴에 따라 뉴햄프샤와 메인의 연안에는 다른 정착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청교도 지도자들은 경건한 새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시민권 부여와 이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자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헌장에서 청교도 이주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 오직 성경에 약속된 자유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 대자연에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신대륙을 많이 찾았다. 오늘날 미국 역사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청교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교도(Puritan) 분야의 권위자인 페리 밀러(Perry Miller)도 “청교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2. 신대륙의 영국 식민지
영국은 세력이 확장되면서 전쟁을 통해 화란 인들의 영토를 빼앗았다. 차츰 영토를 넓혀 17세기말쯤에는 스페인이 차지한 플로리다의 북쪽에서부터 메인에 이르는 동부 해안 지역을 차지하였다. 영국 식민지의 주 거점은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였다. 그러면서 두 지점 사이는 좁혀져 갔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영토가 넓혀졌다. 소위 서부 개척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버지니아는 영국의 최초 식민지로서 1607년 개척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보내졌다. 버지니아란 처녀 왕 엘리자베스를 존경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여기에 보내진 이들은 주로 부랑자들이었다. 산업의 부산물로 도시마다 부랑자들이 넘쳐흘렀던 것이다. 이들은 감옥이나 신대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듣는다. 그리하여 이 무위도식 자들은 그 비싼 배 값도 내지 않고 신대륙으로 보내진다. 이들을 보내면서 영국인들은 꿈에 부풀었다. 이제 새로운 인종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미개한 인디언들은 문명을 받게 되고 혼혈의 인종이 새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영국을 존경하고 섬길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이들에게 모든 발전한 문명을 심어 줄 것이다. 영국에서 간 백인들과 현지의 토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새로운 나라, 이상의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부랑자들은 영원히 부랑자였다. 그들은 절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영국에서처럼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인디언들도 영원히 이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친절했지만 결국에는 거절해야 했다. 그러자 부랑자들은 강도가 되었다. 총으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고 그들이 저장한 옥수수를 모조리 털어 갔다. 이 일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부랑자들 외에 또 신대륙에 온 이들은 종교적 불만 세력들이었다. 주로 청교도들과 각종 분파들 그리고, 카톨릭교도들이었다. 1632년에는 카톨릭 교도인 볼티모어에 의해서 마릴랜드(Maryland)가 시작된다. 매리는 예수의 모친을 말하는지, 당시 국왕 찰스 1세의 아내 매리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는 모든 이주자를 환영했지만 특별히 카톨릭교도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은 것은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의 건국 정신을 세웠다고 인정될 정도로 분명한 신앙적·도덕적 기초를 세웠다.
3. 분리주의자와 비분리주의자
(1) 플리머스 분리주의자(Plymouth separatist)의 건국이념 이해와 이들이 끼친 영향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남동부인 플리머스에 정착한 102명의 분리주의자들 이들을 ‘분리주의자’라 칭한 이유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영국 성공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그러한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경제적 번성과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며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데 있었다. 그들은 인디언의 침입과 내부 혼란을 막기 위해 정치 조직이 필요하게 되자 ‘메이플라워 계약’을 맺고 자유가 최대한도로 보장되는 사회를 신대륙에 건설하고자 했다. 분리주의자들이 미국에 남긴 영향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 사상은 무질서와 방탕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양심을 가치 판단 기준으로 두면서 절대적 의미의 진리가 사라지고 상대적인 게 진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우린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게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는 데서 온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있다.
(2) 보스턴 비분리주의자(Boston non-separatist)의 건국이념 이해와 이들이 끼친 영향
그러나 1630년 3월 아르벨라(Arbella)등 10여척의 배를 타고 미국 보스턴에 도착한 존 윈스롭(John Winthrop, 1588-1649)등의 비분리주의자들은 개인주의를 경계하면서 공동체의 의를 실현하는 경건한 사회 즉,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기독교 사랑에 기초한 신앙적 이상향의 사회인 성경에 기초한 법을 만들고 성도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비분리적인 청교도들은 변혁적인 문화관에 기초하여 영국을 개혁하고 신대륙에 이민하여 전 세계가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경건한 사회를 건설함으로 미국의 기초를 놓았다. 이들은 플리머스의 분리주의자나 현대 미국 헌법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은 금지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노동을 신성시하게 되었고, 법이 다스리고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되어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4. 뉴네덜랜드와 메릴랜드 (English)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고용된 헨리 허드슨은 1609년에 지금의 뉴욕 시와 그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 일대의 땅을 아마 지금의 올바니 북쪽까지 탐험하였다. 그 후에 있은 네덜란드인의 항해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 주장과 초기 정착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북쪽을 차지한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인의 최초의 관심은 모피무역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모피가 나오는 오지에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로키 인디언 5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617년 네덜란드의 정착민들은 허드슨강과 모호크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올바니이다.
맨하탄도 정착은 1602년 초에 시작되었다. 이 섬은 1624년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24달러를 주고 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섬은 즉시 '뉴 암스테르담'으로 명명되었다.
허드슨 강 지역으로 정착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농원 지주" 제도로 알려진 일종의 봉건적 귀족제도를 장려했다. 1630에 허드슨강 유역에 그 최초의 거대한 농원이 설치되었다. '농원 지주'제도 하에, 4년 동안에 자기의 농원에 50명의 성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25킬로미터 길이의 강변 땅과 독점적인 어로 권과 사냥 권 그리고 자기의 땅에서의 민사상 및 형사상의 관할권이 부여되었다. 그 대신 그는 소작인들에게 가축과 농구와 건물을 제공해야 했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바치고, 지주에게 잉여 농작물에 대한 '우선적 선택권'을 부여했다.
이들 네덜란드인과 유대를 가지고 있는 스웨덴의 한 무역회사가 그로부터 3년 후에 그보다 남쪽의 델라웨어 강 연안에 최초의 정착지를 설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지를 공고히 할 방편이 없었던 스웨덴인村은 네덜란드인의 정착지에 흡수되고 말았고, 이 땅은 후에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로 발전했다.
1632년 캘버트 일가는 찰스 1世로부터 포토먹 강 이북의 땅을 개발할 수 있는 특허를 얻었다. 지금의 메릴랜드이다. 이 특허장은 비개신교 교회의 설치를 명백히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캘버트 일가는 같은 신앙의 카톨릭교도들이 그곳에 정착하도록 권장했다. 메릴랜드 최초의 邑인 세인트 메리邑은 1634년 포토먹 강이 체사피크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건설되었다.
캘버트 일가는 영국에서 차츰 종교적 박해에 직면하게 된 카톨릭교도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하는 한편, 이문이 있는 자산을 일구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영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개신교도들의 이민도 권장했다
이들은 신대륙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미국적인 특성을 가진 청교도 정신을 발전시켰다. 이 청교도 정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이들은 종교와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종교개혁 정신에 투철하였다.
5. 청교도 정신과 Frontier
18세기 말에 이르러 New England 사람들이 서부로 진출하여 Frontier(미국 역사상 서부의 개척지) 의 자연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접하였을 때 청교도 정신은 변화되었다. 프런티어의 존재(또는 소멸)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광대한 프런티어는 땅의 입수를 용이하게 하여 농업발달에 기여함과 동시에, 공업제품에도 충분한 국내시장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립의 기회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부의 과잉노동인구를 흡수하는 안전판의 기능을 다함과 동시에, 미국사회의 유동성(流動性)을 높여 그 중산계급화를 촉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정치면에서도 기존(旣存)의 사회적 제약이 적은 프런티어는 자유 ·평화라고 하는 이념(理念)에 제대로 들어맞아 보통선거운동 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고, 자치의식도 높였다.
그리고 대자연에 맞서 살아 나가야 하는 냉혹한 상황 속에서 ‘프런티어 스피릿’이라 부르는 개척정신의 기풍이 배양되어 그것은 미국 국민의 국민성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개인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혹은 개개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성향을 강화해 주었다.
이런 Frontier의 강력한 평등주의 앞에 청교도들의 귀족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은 사라지고 개척민의 거대한 포부와 낙관주의가 청교도 정신의 비관적인 색채를 퇴색시켰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하게 남아있는 특징은 모든 일을 선악으로 판단하는 도덕적 습성이다. 오늘날 종교적 신앙으로서의 청교도는 New England에서도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그 도덕적 관념은 남아 있어 어려운 사회 문제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출처] 제4편 청교도의 이주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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