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가장 무서운 적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은 죽음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슬프게 만드는 것 역시 죽음이다. 피할 수도 없고 예견할 수도 없는 죽음인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두 번의 기회도 없다. 한 번의 기회다. 후회나 용서도 없다.
인간이 만든 제품들은 재생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재생이 될 수 없다. 불구의 몸이 되면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 불치의 질병에 걸리면 그것과 싸우며 살아야 한다. 평생을 통해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를 선용하는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스쳐 지나치고 만다. 죽음 역시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슬픔의 대상이다. 인류를 힘들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면, 슬픔과 공포이다. 이 두 가지는 죽음을 통해 임한다.
죽음은 죄에서부터 임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당시 죽음이 전제된 창조가 아니었다. 아담은 죄를 범했고 죽음을 초래했다. 아담 이후의 인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원죄를 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운명이 되어버린 죽음을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인류는 이것을 극복할 수 없다. 누군가 이 죽음을 옮겨야만 한다. 그것은 창조자의 개입을 요청하고 만다. 그분의 개입만이 죽음을 지울 수 있다.
죽음을 지울 수 있다는 의미는 죽음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죄의 속죄가 없으면 죽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류의 죄를 위해, 나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그분의 죽음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사하셨다. 이제 죽음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육적 죽음까지 없다고 말해선 안된다. 육적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임한다. 그 이유는 죽음이 없어졌다는 의미를 파악할 때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의 사라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분의 죽음은 인류의 죽음이다. 이제 죽어야만 하셨다. 그런 후 부활하셨기에 그분의 보혈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본다.
우리의 죄가 그분의 보혈로 사라졌다. 아니 죄인으로 더 이상 여기시지 않는다.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더 이상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죄와 싸우며 이생에서 지내야 한다. 죄는 죽음을 일으켰다. 죽음으로 죄는 사라졌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죄는 우리의 죽음으로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육체적 죽음으로 더 이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죄의 사슬을 끊는다. 더 이상 죽음은 신자들에게 공포와 슬픔의 대상이 아니다. 부활의 출구인 것이다. 영원한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구속의 사역의 면모를 보이시기 위한 사건이다. 부활로 끝난 것이 아니다. 구속의 사역의 시작인 것이다. 재림과 심판이 우리를 기다린다.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로선 그분의 오심을 기대한다. 아가서 마지막장 마지막절의 내용은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