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곳을 채우는 하나님
빈 곳을 채우는 하나님(God of the gaps)! 익숙한 의미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용어이다. 20세기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설정이다. 이 용어는 19세기 스코틀랜드 복음전도자인 헨리 드루먼드(Henry Drummond)에게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과학이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과학만능이 아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없다. 진정으로 만족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내재하시는(immanent) 하나님! 1945년 히틀러를 암살하는 모의에 가담하여 죽임을 당기 전 감옥생활 하면서 훌륭한 글을 남긴 본훼퍼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다.
빈 곳을 채우는 하나님은 반드시 자연법에 내재하시는 분이어야만 한다. 모든 현상들에 하나님은 간섭하신다. 모든 것의 궁극적인 답변이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의 답이다.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분이 하나님이다. 답답하면 그분을 찾는다. 힘들면 그분을 찾는다. 내가 요구될 때 그분을 만난다. 내가 원활하게 행할 때는 그분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6일 동안 우리가 힘써 일하다가 쉬면서 그분을 찾는다. 나의 빈 곳을 그분으로 채운다. 그분이 없으면 살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분만이 나의 영의 갈증을 채우는 분이다. 정말 필요하다.
흔히들 그분을 믿는 자들이 가진 신앙 양태들이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 빈 곳을 채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이 신앙에 대해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바른 신앙은 그분이 어떤 분이냐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분이 나의 삶에 어떻게 임재하셔서 섭리하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사탄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떤다. 모든 것의 원인을 그분에게 기인시킨다고 하여 그분을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어떤 분을 믿느냐가 바른 것이다. 그분에 대해 알자고 외친 호세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임을 알자고 외친 것이다.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그분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라고 강권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분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을 섬기고 따르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필요할 때 그분을 찾는다면 엄밀하게 말해서 영적 매춘하는 것과 같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말을 빌리면 영적 간음이다. 그분은 항상 일하시는데 내가 요구될 때 일한다면 일하는 자가 아니라 일을 부리는 자이다. 청지기가 아니라 상전일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지 상전이 아니다. 예배(service)로서 그분이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시간, 방법,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실제로 살피고 또 살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런 후에 예배 형식들을 채택해야 한다. 즉흥적으로 누가 하니 따라하는 식은 빈 곳을 채우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즉흥적으로 누가 이 프로그램으로 성공하니 따라하는 신앙은 빈 곳을 채우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영적 매춘 행위를 행하는 것이고 영적 간음을 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도우시고,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필요할 때 나아가거나 원할 때 드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진지하게 자신을 분석해보다. 한국적 신앙 양태에서 바라보지 말고 성경과 역사를 통해 살피자. 무엇이 바르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지. 단지 목적만이 선하면 방법까지도 선하다는 세속적 방법을 채택하는 대부분의 교회들과 신자들은 한꺼번에 무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의 빈 곳을 채우는 하나님을 섬긴다면 반성하고 회개해야만 한다.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명사, 형용사, 부사로 분명하게 표현하고 구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분을 삶에서 그분의 어떠함을 체험하는데서 이뤄진다. 머릿속에서만, 죽은 문자에서만, 혀에서만 맴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성경에서 분명하게 바르게 말하는 분을 삶에서 체험해야 한다. 이런 체험을 하면 할수록 겸손해진다. 성령의 9가지 열매의 측면들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