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의 목회편지(106) 딤전 6:1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교회는 세상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렇다고 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사도들은 교회
가 세상과 야합하려는 시도에 대하여도 경고를 주지만 동시에 세상과 결별하
려는 움직임에 대하여도 경고를 준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
면서도 또한 세상의 잡다한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이런 이중적인 사상은 예
수 그리스도에게서도 이미 발견된다. 소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리는 요한
복음 17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편으로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14, 16절)고 말씀하면서도 다른 한편
으로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
다”(18
절)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다양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다양한 체계에서 근
간을 이루는 것은 상하관계이다.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다. 부리
는 사람이 있고 부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있고 명령
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체계는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공존할 수 없는 교회와 세상
노예제도로 대표되는 주종관계는 이런 체계의 가장 심각한 방식으로서 인류
역사에 오랫동안 세력을 떨쳐왔다. 노예제도는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취
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현상일 뿐이다. 실제적으로는 주
종관계란 것이 지금도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
이다. 이것은 세상에 낙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마지막까지 계속될 현상이
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면서 때때로 그 체계를 수용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무조건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심지어 노예제
도로 대표되는 상하제도와 같은 악한 체계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
는 것처럼 보인다. 본문에
서 사도 바울은 상전들을 크게 존경받을만한 사람
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노예제도를 해체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인들에게 노예를 풀어주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인 노예들에게 주인과 싸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뜻 보면 사도 바울
은 마치 노예제와 같은 악한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로서 삶의 가치관 분명해야
하지만 사도 바울이 신자들에게 노예제도에 항거하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영혼에 변화가 없으면 질서에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회체계를
개혁한다고 해도 영혼이 개혁되지 않으면 금새 허사가 되고 만다. 관건은 제
도를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바꾸는 데 있다.
영혼에 변화가 없는 사회개혁은 썩은 감자에 금박을 올린 것과 같다. 그래
서 사도 바울은 제도와 관련된 외형적인 변화보다는 영혼과 관련된 내면적
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를 받으면 결국 사회질서가 새로워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
상의 변화는 짧은 시간에 성취될 것으로 생
각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
다려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악한 제도에서라도 멋있게 사는 법을 가르친
다. 사도 바울은 멍에 아래 있는 종의 위치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
각한다. 이것은 노예근성을 발휘하라는 말이 아니다. 신자가 심지어 종의 신
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
었기 때문이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
었다. 그래서 신자는 종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다. 만일에 그
가 종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신기한 삶을 배울 수만 있다면 종의 위치가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니다. 오
히려 그런 경우에 종으로 있는 것도 즐거움이 된다.
가치관이 새롭게 형성된 신자는 자신의 낮은 신분마저도 충분히 화려하게 누
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또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