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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성 교수의 교회론 에 대한 문병호 교수의 논문

김길성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4. 10. 2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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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성 교수의 교회론 에 대한 문병호 교수의 논문
문병호 교수의 김길성 교수의 은퇴기념에 붙인 "김길성 교수의 교회론"
 
김순정 기사입력  2014/10/18 [23:55]
 
이 글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20여년 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쳐 왔던 송암 김길성 교수의 은퇴를 기념해서 기고한 논문으로 「신학지남」 2014년 가을호에 실린 글이다. 저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는 문병호 박사이다. 그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많은 목사후보생들을 길러내면서 교단의 신학을 심어주었던 김길성 박사의 열정과 노력을 제자들은 다 알고 있다. 늘 한결같고 성실했던 스승의 모습을 제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여러 문제들로 혼란을 겪고 있으며 바른 개혁주의 교회론, 성경적 교회론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이런 중에 이 논문은 우리에게 다시금 개혁주의 교회론에 대한 시각을 바로 세우게 하고, 바른 교훈을 제공할 것이라 여겨 요약하여 소개한다.


1. 들어가는 말


본고에서 부족한 종은 은사되시는 김길성 교수님의 은퇴에 즈음하여 당신이 일생 동안 주력하여 가르쳐 오셨던 교회론에 대하여 그동안의 저술을 일별하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교수님의 교회관은 분명했으며 교회사랑은 남달랐다. 후학을 향한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있었으니, 매사에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삼가고 언제든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힘쓰라고 하셨다.

김길성 교수님의 지론에 따르면, 교회론은 단지 조직신학의 한 분과로서 외따로 존재해서는 안 되며 전체 교리를 조화롭게 아우를 뿐만 아니라 성경신학과 역사신학 등과도 끊임없는 대화를 하는 가운데 심층적, 역동적으로 개진되어야 한다.

교회론은 음악으로 말하면 오페라와 방불하다. 교리신학 혹은 모든 가르침과 취지와 전망이 교회론으로 흘러든다. 교회론의 토대는 신학서론 즉 계시론이다. 교회는 말씀의 터 위에 서야 한다. 교회가 말씀을 앞설 수 없다. 교회는 말씀을 수납하는 곳이지 창출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론의 당위는 신론에 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내적 협약이 역사상 성취된 경륜 즉 언약의 산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기구적이거나 조직적인 세속적 개체(個體)에 불과할 뿐이다 교회론의 본질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차원에서 파악된다.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다 이루신 의를 법정적으로 전가받은 지체들의 몸이다. 교회론의 완성은 종말론이다. 종말론의 핵심 논제는 교회의 완성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된다는 점에서 기독론적 지평을 갖는다.

대체로 김길성 교수님의 저술은 비평적이거나 비판적이라기보다는 서술적이고, 논쟁적이라기보다는 고백적이다. 어떤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는 경우에 있어서도 교수님의 지향점은 뚜렷하다. 그것은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교회론도 그 예외는 아니다.

본고에서 필자는 이러한 교수님의 지향점이 교회론의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loci)을 다룸에 있어서 어떻게 추구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주력한다. 이러한 접근은 조직신학의 종합적-체계적 방법론에 부합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김길성 교수님의 교회론에 영향을 미친 신학자들에 대해서 살펴본다.

2. 신학자들과 신학사조의 영향

김길성 교수가 최근에 묶어서 출판한 책 『총신의 신학 전통』에는 그가 일생 동안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이 누구이며 신학사조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 있다. 본서는 기간(旣刊)의 글모음으로서, 전반부는 “총신의 신학자들”이라는 제하에 박형룡, 박윤선, 명신홍, 이상근, 차남진, 박아론, 서철원, 정규오의 신학과 사상을 담고 있다. 각각의 논문에서는 한국교회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잇는 주요한 신학자들의 면모가 잔잔한 필치로 전개되어 있다. 본서의 후반부는 “총신 신학의 배경”에 할애된다. 여기에는 다섯 논문이 수록되었다.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 “『신학지남』으로 표현된 개혁신학 전통,” “청교도 장로교회 신학 전통,” “12신조에 나타난 고백교회의 전통,” “W.C.C. 신학 배격.” 여기에 나타나는 “구 프린스턴 신학,” “개혁신학,” “청교도 장로교회,” “고백교회,” “W.C.C. 신학 배격”은 김길성 교수가 강단이나 교단에서 일생 동안 추구해온 신학적 가치관 혹은 신학적 전통을 마치 모토와 같이 표현해 주고 있다. 본서에 수록된 논문들은 구체적인 신학 주제에 대한 정밀한 논변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김길성 교수의 주관심사의 하나인 교회론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개론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김길성 교수가 신학을 전개하면서 언급하는 학자들로는, 국내의 박형룡 박사, 국외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와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이 두드러진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도 간혹 인용되나 개론적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아마 루이스 벌콥이 바빙크의 신학을 충실히 개진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김길성 교수의 교회론에도 대동소이하게 드러난다. 다만 차알스 핫지는 그의 대작(opus magnum) 『조직신학』에서 단지 은혜의 수단(the means of grace)으로서 말씀, 성례, 기도를 다루고 있을 뿐 교회론의 핵심주제인 교회의 본질과 속성과 사역 등에 관해서는 논의하고 있지 않으므로, 해당 부분에 대한 것만 다룬 논문을 작성해서 출간했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김길성 교수가 가장 많이 참고하는 책은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이다.
 
이 책은 박형룡 박사의 교회론의 모판이 된다. 김길성 교수가 지적하듯이 박형룡 박사는 벌콥에 비해서 훨씬 많은 페이지를 교회론에 할애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상 벌콥과 거의 대동소이하며 어떤 부분은 거의 번역에 다름이 없을 정도로 일치하는 곳도 있다. 교회론에 있어서도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개론 정도로 논의되는데 그친다. 이러한 신학자들과 더불어 게르할두스 보스(Geerhardus Vos), 존 머리(John Murray), 올리버 버스웰(Oiver Buswell, Jr.), R. B. 카위퍼 (R. B. Kuiper),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가 언급되고,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과 웨인 그루덤(Wanye A. Grudem)이 다루어진다. 에릭슨의 복음주의 노선이 개혁주의와 차별화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루뎀이 은사운동에 열려있다는 점이 비판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김길성 교수가 교회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영향을 많이 받은 학자는 존 칼빈(John Calvin)과 잔 그레스햄 메이천(J. Gresham Machen)이었다. 우리가 이하에서 살펴보겠지만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속성과 표지, 그리고 교회의 일치를 다루는 논문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메이천에 주목해야 한다. 김길성 교수는 메이천의 교회론에 관한 박사 논문을 썼다. 메이천의 신학 작업은 성경신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바울 신학의 기원을 다룬 책에서 현저히 드러나듯이 메이천의 주된 관심은 신학의 분과를 넘어서는 기독교의 진리 자체에 있었다. 메이천은 교회론을 별도로 다룬 눈문이나 책을 쓰지는 않았으며, 교단 정치의 회오리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입장을 불가피하게 밝히는 가운데서 교회에 관한 몇몇 글들을 남겼다.

김길성 교수는 메이천의 신학이 “신실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의 것” 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과 명료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언한다. 메이천은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가운데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교리를 ‘지성적으로’ 옹호하려” 하였고, “자신의 확신을 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김길성 교수는 메이천이 교회는 복음에 바로 서야할 뿐만 아니라 복음 가운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함을 강조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다음 인용문에 주목하자.

교회는 그 같은 온갖 오류로부터 벗어나 복음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의 구속자는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으니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가지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21) 간단히 말해, 이것이야 말로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에 관한 기사인 것이다. 그 같은 정의를 담고 있는 매 구절마다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며, 초기엔, 때때로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복음이 가르치는 내용의 본질적 요소가 담겨져 있다. 구절마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를 통해 검증되고 입증된 것들이다.

성령을 소유한 교회는 단순히 구원을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교회인 것이다. 성령은 인간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며, 첫 선물이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미치게 하시는 이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것들은 아직도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세상은 점점 악에 빠져 들어가고, 기독교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 마지막 영광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여기에서 김길성 교수는 메이천이 복음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서로 연결시켜 역동적인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메이천은 진정한 교회는 “철저하게 교리적,” “철저하게 비관용적,” “철저하게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교회의 책임을 다루는 연설에서 역설할 바 있다. 여기에서 “비관용적”이라 함은 배타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는 어떤 혼합이나 타협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길성 교수는 메이천의 입장을 네 가지로 결론짓고 있다.

1. 메이천의 교회론은 전반적인 그의 신학과 분리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의 교회론은 그의 신학과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2. 메이천의 교회론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던 당시의 시대적 사상과 조류를 배경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3. 메이천의 교회론의 큰 주제는 기독교의 역사성 또는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지성적인 변호와, 교회의 일치와 순결이라고 하는 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4. 메이천의 교회론의 특징 중 하나는 개혁고백주의에 대한 강조이다.

우리는 이러한 메이천의 입장이 김길성 교수의 교회론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음을 이하의 신학적 고찰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3. 교회론: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서

3.1. 교회의 기원과 본질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기원과 본질을 다루면서 양자가 서로 밀접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후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25장에 고백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정의(定義) 규정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1. 무형한 공동 즉 보편의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피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는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며 충만이다.
2. 유형 교회도 복음 아래서는 역시 공동 즉 보편의 교회이니, 전에 율법 아래서처럼 한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하여 참 종교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것밖에는 구원의 통상한 가능성이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세 전의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그의 대속(代贖)을 구속방식으로, 택함 받은 자들을 구속백성으로 영원히 작정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로 구속이 작정되었다. 이러한 작정이 역사상 성취된 경륜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는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그것을 모두 전가해 주신다. 교회의 -무형이든 유형이든- 기원과 본질이 여기에 있다.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이러한 기독론적 특성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하에서 보듯이 그의 교회론은 이를 전반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회의 기원]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기원을 다루면서 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을 문제 삼는다. 개혁신학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김길성 교수도 교회의 시작을 구약시대부터 시작되어 세상종말까지 계속된다고 본다. 특히 카이퍼(R. B. Kuiper)를 인용하면서 교회는 “성도의 서로 교통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신구약 성도가 모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사야, 다윗, 아브라함이나 아벨과 같은 그 밖의 다른 족장들까지도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이요, 또한 몸 된 주님의 교회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김길성 교수는 세대주의자들이나 수정 세대주의자들을 거론하면서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구약시대에는 없었다고 하는 그들의 입장을 비판한다. 구약의 카할이 신약에서 교회(에클레시아)라고 번역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회중”을 의미할 뿐이라고 본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였던 라이리(Charles C. Ryrie)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지지하는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을 향하여 구체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에릭슨은 행 7:38에 나오는 “광야 교회”를 번역하는 가운데 사용된 70인경의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교회를 의미하는 전문적인 단어가 아니라고 보고 교회의 출발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이며 그 이전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에릭슨은 이 단어가 마태복음 외에 다른 복음서에는 사용된 적이 없으며, 사도행전에는 누차 나오지만 누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마태복음의 경우에도 16:18의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에서 사용된 동사는 미래형으로 사실상 그 당시에 교회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김길성 교수는 주님의 이러한 말씀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면서, 주님께서 사용하신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미래형 동사는 굳이 주님의 수난 이후에 일어날 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에도 존재하는 교회를 상기시키면서 이제 그것을 자신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신앙의 고백 위에 세우시겠다는 예언적인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권징과 관련해서 주님께서 교훈하신 말씀인 마 18:15-20에 두 번 나타나는 ‘에클레시아’도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례가 된다고 김길성 교수는 지적한다.

김길성 교수에 따르면, 사도행전에 23회 사용된 에클레시아는 그 용례상 두 가지 기원이 있다. 첫째, 이 단어는 이미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고전헬라어로 사용되었는데 그 경우 비전문적으로 모임이나 회집을 뜻한다. 이러한 용례가 19:32, 39, 41에 3회 나타난다. 이 경우 “모인 무리,” “민회,” “그 모임”은 문맥상 교회를 지칭할 수가 없다. 둘째,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교회를 뜻하는 두 단어인 카할과 에다에 대한 번역으로 신약에 나타난다.
 
이러한 용례는 나머지 20회에 모두 동일하게 나타난다. 굳이 행 7:38의 “광야 교회”에 사용된 에클레시아를 이러한 다수의 용법과 달리 바라볼 근거가 없다. 오히려 스데반이 구약의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으로 그를 믿는 백성들의 모임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가운데 이 말을 사용했다고 본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입장을 개진하면서 김길성 교수는 에릭슨과 동일한 침례교 신자인 그루덤(Wayne Grudem)조차도 행 7:38의 “광야 교회”는 엡 5:25의 “교회”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고 제시한다.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기원을 단지 시기 문제로 한정하여, 구약의 교회를 부정하는 세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행 7:38을 들어서 설명하는 선에서 멈춘다. 자신의 입장이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 있다는 선포가 있을 뿐,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언급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이 부분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하여 후속하여 논의된다. 교회의 기원에 대한 김길성 교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부터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이요, 2. 구약시대에도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요, 3. 구약시대의 교회와 신약교회 사이에 구속사적인 구분이 있다는 것이요, 4. 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의 시초가 아니라, 신약교회의 출발이라고 하는 점이요, 5. 계시의 진전에 따라 구약 시대의 교회보다는 신약교회의 영광이 훨씬 더 크다고 하는 점이다.

[교회의 본질]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본질을 다루면서 교회를 지칭하는 용어들인 구약의 카할과 에다와 신약의 에클레시아와 쉬나고게를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여기에서 김길성 교수는 카할과 에다의 어의와 에클레시아와 쉬나고게의 어의가 구별은 되나 성경적 용례를 볼 때 자로 대어 긋듯이 양단(兩斷)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한다. 벌콥(Louis Berkhof)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카할은 실제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모이는 회집(會集)를, 에다는 그 회집의 주체인 기구를 지칭하는 경우가 상례이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카할과 에다에 대한 헬라어 번역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와 쉬나고게의 경우에도 두 단어는 주전 250년경에는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후 신약에서는 이 두 단어가 서로 다르게 사용됨은 물론이다.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구약이 하나가 되는 교회를 의미하는 반면, 쉬나고게는 유대인의 종교적 집회 혹은 모임을 위한 장소 혹은 건물 등을 뜻하는 경우로 용례가 한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카할의 경우 70인경에서, 모세 오경 중에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서는 예외 없이 쉬나고게로, 신명기에서는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에클레시아로, 시편에서는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쉬나고게로, 예레미야와 에스겔에서는 언제나 카할로 번역되고 있다. 에다의 경우 70인경은 항상 쉬나고게로 번역하고 있다. 카할과 에다는 그 성격은 다를지라도 그 대상을 언약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제사 공동체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종류별로 카할이 에클레시아와 쉬나고게로 나뉘어 번역되는 것은 문맥의 고유한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고찰 가운데 김길성 교수는 그루덤(Wayne Grudem)과 같이 카할만을 신약의 교회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모하다고 결론짓고 카할과 에다 모두 번역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본질상 교회 즉 에클레시아에 관련된다고 보는 박형룡 박사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에다를 “현실적 상황 하에 있는 교회”로, 카할을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구원으로 부름 받은 백성들의 모임을 나타내는 이상적인 상태 하에 있는 교회”로 보는 바빙크(Herman Bavinck)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여 김길성 교수는 에클레시아가 그 영역상 지교회, 가정교회, 지역교회, 무형과 유형을 포함하는 보편교회를, 그 의미상,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새예루살렘, 진리의 기둥과 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 증인 등을 광범위하게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머리(John Murry)와 에릭슨(Millard J. Ericson)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3.2. 교회의 속성과 표지

[교회의 속성]
교회의 속성과 표지를 다룬 글에서 김길성 교수는 칼빈의 마지막 판 1559년 『기독교 강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및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그 근간이 된다. 이는 교회의 통일성(unitas), 거룩성(sanctitas), 보편성(catholicitas), 사도성(apostolicitas)으로 논의된다.

교회의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이는 외면적, 제도적 통일이 아니라 내면적, 영적 특성을 지닌다. 칼빈은 이를 다루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아니라 사도신경에 문의한다. 칼빈은 이를 설명하면서 한 목자를 둔 양들의 소통을 비유로 든다. 사도신경의 고백 중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통일성은 성도의 하나됨과 상호교통을 함의하고 있다.

교회의 거룩성은 성도의 성화에 부합한다. 김길성 교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의로움의 효능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단언한다. 완전한 성도가 없듯이 완전한 교회가 없다. “교회는 날마다 거룩을 향하여 전진한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는 칼빈의 말이 인용된다. 밖에는 양이 있고 안에도 이리가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로 대변되는 지상의 혼합 교회(ecclesia permixta)를 다루면서 김길성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다음 셋이다. 첫째,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 둘째,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대제사장직과 중보자로서의 계속되는 중재대언 사역,” 셋째, 날마다 거룩해지는 교회 곧 거룩을 위하여 힘쓰는 교회.

교회의 보편성은 주님의 교회가 세계 모든 곳에 걸쳐있다는 의미이다. 무형교회는 지상의 유형교회와 분리해서 다룰 수 없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머리가 되시며 자기 백성을 아시고 여전히 지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지 않으시는 이상 교회는 두 개 혹은 세 개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으며 날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자라간다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unio cum Christo)를 상기시킨다. 김길성 교수는 이를 다루면서 칼빈이 “공교회(catholic church)”을 “보편교회(universal church)”라고 부른 이유에 주목한다. 그리고 칼빈이 교회의 보편성이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에 모두 해당한다고 봄으로써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의 고백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부분에 대한 김길성 교수의 이해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에서 더욱 상론된다.

교회의 사도성을 다루면서 김길성 교수는 칼빈을 인용하는 가운데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로마교좌 곧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다른 머리를 두는 것은 사실상 그 머리로부터 잘려나간 몸과 다름이 없다는 칼빈의 말이 인용된다. 이로써 교회의 통일성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있지 교황의 지고한 통치(primatus)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함께 부각시킨다. 둘째, 교회에 부여된 열쇠의 권한은 인적 권위와 영광이 아니라 말씀의 권세에 관계된다는 점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주어진 주님의 약속은 모든 교회와 그 지체들인 성도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어느 한 인물에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사도성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의 원리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권위와 그 자신의 이름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교회의 표지]
이 부분을 다루면서도 김길성 교수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주로 문의한다. 교회의 표지(nota ecclesiae)는 유형교회가 무형교회의 “필수적이요 유용한 표현”이 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된다. 이를 통하여 성도는 교회가 제공하는 은혜의 방편을 누리게 된다.

첫째, 말씀의 선포와 청취가 있어야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 서언에서부터 교회의 표지를 말씀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의 합법적인 거행해서 찾았다. 양자가 동일하게 중요하지만 성례도 말씀에 따라서 거행되어야 한다고 본다면 말씀의 선포가 더욱 본질적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설교의 의의와 가치이다. 김길성 교수는 칼빈이 설교를 그리스도의 은총이 전달되고 그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이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한 점에 특히 주목한다.

둘째, 성례의 합법적 시행이 있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성례를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표라고 말하였다. 칼빈도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성례를 은혜의 창출 방식으로 보지 않고 법정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언약의 자녀에게 그 어떠함과 어떠해야 함을 인치는 것으로 여겼다. 김길성 교수는 칼빈의 성찬 이해가 그의 기독론과 성령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성례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그 작용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지지함에 이견이 있을 수 없으며,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 루터교의 공재설, 츠빙글리의 상징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셋째,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있어야 한다. 칼빈은 이를 교회의 제3의 표지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참 교회의 힘줄로서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며, 그 성도도 분명 그러할진대, 권징이 없다면 교회의 거룩성이 지켜질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양과 이리가 섞인 지상의 교회에서 권징은 목자의 막대기의 역할을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개혁신학자들이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삼은 것은 칼빈의 뜻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김길성 교수는 말한다.

김길성 교수는 이러한 교회의 세 가지 표지가 온전할 때 교회는 참되며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 곧 보편교회의 지교회로서 자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곧 교회의 지표를 떠나 교회의 하나됨과 연합과 일치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래에서 다룰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문제와 연결된다.

3.3. 교회의 일치와 순결

김길성 교수는 현대 교회론의 문제점은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신학에 있다고 본다. 그는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로부터 몰트만(Jurgen Moltmann)에 이르는 현대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교회를 존재(Being)보다는 하나의 가능성(Becoming)으로 보며 교회의 본질(Nature)보다는 기능(Function)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정통 교회론은 정통 신학에 서있다. 키프리안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한 것은 교회에 구원의 공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가 교회에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말이다.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를 엄격히 배격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몸 된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칼빈이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교통에서 찾은 것은 교회의 주가 한분 그리스도시라는 진리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교회의 네 가지 속성이 온전히 전개되었다. 메이천이 교회의 일치를 말하기 전에 교회의 순결을 말하라고 외친 것은 당대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참 교회론을 수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메이천 역시 칼빈과 다를 바 없이 삼위일체, 기독론, 구원론 등에 관한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경우 비록 비본질적인 부분에 차이가 있더라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가운데 김길성 교수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이 함께 다루어져야 하며 그 정수가 교회의 네 가지 속성에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본 사안에 대한 김길성 교수의 입장은 W.C.C.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분명해진다. 다음 말에서 보듯이, 그의 논지는 분명하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W.C.C. 이전의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치와 연합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요, 우리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즘을 반대하지 않는다.” 김길성 교수는 W.C.C.가 신학적 자유주의를 주도하고, 종교다원주의를 넘어 혼합주의 경향을 심화하며, 성경적 교회의 일치에 심각한 폐해를 끼침을 지적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참 교회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3.4. 은혜의 수단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조직신학』에는 은혜의 수단(the means of grace)만이 교회론에 할애되어 있다. 김길성 교수는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나마 개진하고 있다.

찰스 핫지는 은혜의 수단을 세 가지 -말씀, 성례, 기도-로 다룬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인의 구원에 필수적이다. 말씀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성령의 구원의 역사는 -칭의와 성화를 불문하고-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 말씀 속에서(in Verbo) 뿐만 아니라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한다. 그러므로 해서 루터란과 같이 성령의 작용을 말씀에 기계적으로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성례는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듯이 사제의 축성(祝聖, consecratio)을 통한 사효성(事效性, ex opere operato)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고, 루터란이 주장하듯이 성례 자체의 고유한 덕이나 능력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제정된 말씀에 따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은혜의 수단이 된다. 세례와 성찬은 가시적 표징들을 통하여 비가시적인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를 제시한다. 세례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중생의 은혜를, 성찬은 거듭난 사람이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성화의 은혜를 인치는 비밀(mysterium)이다.

기도가 은혜의 수단인 것은 그것의 다섯 가지 특성으로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인격성, 내재성, 주권성, 자애성, 무한성. 기도는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에 무슨 공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4. 결론

김길성 교수는 스스로 규정하듯, 역사적 개혁주의에 서서 교회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저서와 강의안들 그리고 다수의 논문들은 교회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교회론을 단지 교회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고백과 역사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의 삶 전반에 관련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교회론을 다룬 주저라고 볼 『개혁신학과 교회』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교회론의 핵심 과제는 세부적인 교리를 조목조목 논하는 것에 선행(先行)해서 먼저 교회가 토대를 두고 있는 올바른 신학과 신앙고백 그리고 역사적 전통에 대한 인식을 환기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민감한 의식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여러모로 불법과 미혹의 영의 궤계가 심한 오늘날 이러한 고찰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바가 있다고 볼 것이다. 말씀의 신학 그리고 고백의 신학 김길성 교수의 교회론은 그의 다음 일성(一聲)으로 우리 후학의 반향(反響)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남기신 말씀과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 성경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도적 말씀의 전통에 선 교회를 고백한다.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정리 / 김순정 목사(리폼드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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