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교회의 일치와 순결

김길성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9. 12. 31. 15:07

본문

교회의 일치와 순결

 

김길성 교수- 기독교로 위장한 이단들의 무차별적 교회침투 막아야

 

이 글은 총신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는 김길성 박사가 「개혁논총」 권두언에 기고한 글이다. 교회는 일치와 순결 모두를 위해 힘써야 한다. 이 중에 한쪽으로 치우치면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해묵은 논쟁에 휘말릴 필요도 없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우리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의 문제를 과거의 역사 속에서 되짚어보는 것은 시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오늘을 사는 지혜를 획득하는 길이기도 하다.
 
로마의 감독 칼릭스투스(St. Calixtus, 217년 감독)와 히폴리투스(Hippolitus)와의 논쟁에서, 교회의 일치와 순결에 대한 관심을 보게 된다. 이 논쟁에서 히폴리투스는 당시 여러 교회에서 흔히 하던 것처럼, “친족 살인, 음행, 배교”이 세 가지 죄는 용서받지 못할 죄로 취급하고, 교회가 이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말도록 했다. 칼릭스투스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위의 세 가지 죄는 중대하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에게는 교회 교제의 기회가 주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박해 시 배교자에 대한 처리 문제는 그 후 키프리안(Cyprian, 248년 카르타고 감독)과 노바티안(Novatian, 250년 로마 감독)사이의 논쟁에서도 재연되었다. 키프리안은 250년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 때에는 사막으로 피신하여 편지로 교회를 지도하였으나, 다시 발레리안(Valerian) 황제의 박해 때에는 사막으로 귀향을 갔으며, 258년에 돌아와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키프리안은 생전 세 개의 논쟁에 참여했는데 그것은 모두 교회에 관한 문제였다. 키프리안은 박해 시 배교자 또는 변절자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은 적절한 권징과 규례를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키프리안은 박해 시 배교자의 처리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말 것 2) 거짓증서를 산 자는 즉시 허용할 것 3) 타락자는 평생 회개하고, 임종 시 또는 이후에 또 다른 박해가 있을 때 회개를 중명하는 자는 교회의 교제를 허용할 것 4) 타락한 성직자는 폐위할 것 등이다.
 
키프리안이 이처럼 변절자들에게 적절한 권징과 규례를 따라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노력한 이유는 그의 교회관 때문이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의 승리에 함께 참여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물론 신자가 교회의 계급제도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키프리안 자신도 로마의 교회체제와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교회의 통일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런데 고백자들의 행동이 바로 이러한 통일성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키프리안은 이들의 행위를 거부하고 감독회의에서 변절자들에게 관한 문제를 결정해야만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키프리안은 터툴리안의 열렬한 숭배자로서 그의 저술들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터툴리안의 엄격한 경향은 키프리안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그는 변절자들을 지나치게 쉽게 다시 복원시켜 준다는 의견에 반대하였다. 즉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였으므로 우상숭배자들과 배교자들은 함께 참여할 수 없었다.
 
노바티안의 입장은 키프리안의 그것보다 더욱 엄격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고넬리우스(Cornelius)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왜냐하면 노바티안의 눈으로 볼 때에 변절자들이 너무나 쉽게 다시 교회로 영입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문제의 결과 분파가 생겨서 로마에는 두 명의 감독이 존재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건의 핵심은 결국 교회의 순결, 혹은 용서하는 사랑 중 무엇이 교회의 특성으로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히폴리투스의 분파는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바티안주의자들의 분파는 그 후 수세대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변절자들을 복원이 서방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세례 받은 후 죄를 범한 신자들의 처리문제를 두고 그 후에도 서방교회는 몇 번이나 분열을 반복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 후 고행제도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나타난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은 어떤 면에서 볼 때 바로 이러한 비성경적인 체제에 대한 항의였다.

W.C.C.의 배교와, 로마 가톨릭의 이단적 가르침, 기독교로 위장한 이단들의 무차별적 교회침투, 이러한 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외침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되자.

 

 

http://www.reformednews.co.kr/4128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