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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같이···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의 오심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뎠습니다. 그리고 자연히 주님을 뵙지 못하고 먼저 죽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이 같은 죽음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던 남은 자들에게 슬픔을 주었습니다. 이 슬픔이 전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 어떤 슬픔은 잘못된 슬픔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신자도 죽은 자로 인하여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슬픔이 잘못된 슬픔인가 할 때, 그 판단 기준은 ‘소망’입니다. 소망 있는 자로서 슬퍼하느냐? 아니면 소망 없는 다른 사람같이 슬퍼하느냐? 여기서 사도는 그 판단 기준이 되는 ‘소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이 소망이 있고 그 내용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간직하고 있고 알고 있는 소망에 근거해서 하신 말씀이 다음 14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소망의 내용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일’과 더 나아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부활의 소망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의 내용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거기서 유대인들에게 크게 봉변을 당하다 로마군 천부장에게 구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복음을 전한 일로 인하여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사도가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 23:6)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가이사랴로 옮겨져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어째서 유대인들이 자신을 고소하는지에 대해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 한 까닭이라고 변호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전하였습니다(참조. 행 26:6-8, 23; 28:20).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오순절 이후에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증거 하였는데, 이 부활의 소망은 전에는 없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생겨난 게 아니고,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의 공통된 소망이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약속바울 사도는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회당장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바울과 그의 일행에게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행 13:32-34)라고 하여서, 여기서도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지 별나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부활하신 것과 같은 몸의 부활이었습니다(참조. 행 26:6-8). 그러니까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약속은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과 그 후손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동일한 소망을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자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인 까닭에 사도와 동일한 소망, 곧 ‘마지막 날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나사로가 죽은 후에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과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의 대화 중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간직했던 부활의 소망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가 병들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장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시고서야 제자들과 함께 나사로의 집이 있는 유대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 어귀에 이르셨을 때, 주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하였고,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믿나이다”(24절)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르다의 대답은 단지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관념적이고 전통적인 지식일 뿐임을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 생명에 연결된 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새 사람은 또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몸과 영혼의 분리인 육신의 죽음을, 장차 더 좋은 영광의 몸을 새 옷으로 입기 위해 헌 옷을 벗어 버리는 일로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지배할 수 없는 자리에 이르렀기에 이 생명과 부활의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마치는 말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복음과 함께 전한 이 부활의 소망은, 마르다나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른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과 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소망의 약속을 성취하신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므로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을 보증합니다(참조. 고전 15:20). 주님의 이러한 부활을 믿는 자들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습니다(참조. 살전 4:14). 그러므로 이런 복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서 함께 교회로 한 몸을 이루었던 형제가 먼저 주님께 간다 하여도 그 죽음을 놓고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믿는 자들, 곧 먼저 자는 자들이나 그때까지 산 자들이 다 영광의 몸을 입고 주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을 바라며 주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워 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
이런 말씀으로 교회 안에서 슬픔을 당한 자들을 위로하고 피차 권면하며 덕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에 있어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모범을 보였습니다(참조. 살전 5:6-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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