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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부활

by 김경호 진실 2014. 12. 1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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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20034월호, pp.78-87 게재된 원고(“부활의 아침에 외쳐야 할 메시지”)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변 종 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은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요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의 난제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해마다 발표되는 부활절 메시지는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을 기원하거나 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남북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종교간의 대화나 화해 협력을 바라는 메시지도 많다. 물론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잘 되기를 바라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민족의 평화와 발전과 통일을 진심으로 염원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그런 인간적인 희망을 주는 것으로 그치느냐 하는 것이다. 단지 이 세상에서 잘 되고 번창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목적이며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한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은 죽었던 예수님의 몸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요,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사건이라고 말한다(고전 15:20, 2:14).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 권세를 정복하셨으며, 사망에 붙들려 종노릇하는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이것은 온 인류가 해결하지 못했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삶의 길을 열어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앞두고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생각해 보도록 하자.

 

I.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을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로 말미암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5:20,23). ‘첫 열매(aparchè)’란 원래 곡식이나 과일 또는 짐승 중에서 일부를 먼저 하나님께 바쳐서 구별된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중에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보증해 주는 첫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예요 본보기가 되는 사건이다(고전 15:13 참조).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뜻한다. 단지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운 삶이나 희망찬 미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부활이란 단어의 세속화이며 오용이다. 성경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다고 말하며,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의 이 부활할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육체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예수님이 누우셨던 자리는 빈 무덤으로 남아 있다(28:6, 16:6, 24:3, 20:1-7, 11-15).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를 가지고 계셨으며,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잡수셨다(24:39-43).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시기 전의 몸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이 잠겨 있는데도 그냥 들어오셨으며(20:19,26),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셨다. 그리고 아무런 기구도 없이 그냥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1:9).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중력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듯이 보인다. 우리 인간으로서 그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현재 우리의 몸과 구별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한다(고전 15:44). 신령한 몸(sòma pneumatikon)’은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며 강하고 영광스러운 몸이다(고전 15:42,43). 현재 우리의 몸과는 다른 종류의 몸이지만 그래도 이라고 불리고 있다.

우리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6:23, 9:27). 그래서 우리는 한 평생 죄 있는 육체를 안고 살아간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마치 고장난 중고차를 끌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고차는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그 때마다 고치고 수리해서 사용하지만 결국은 망가져서 폐차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운전수는 그 차를 버리고 떠나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한 평생 동안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데리고 살다가 마침내 떠나가고 만다. 이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죽고 나면 영혼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린다(14:13). 그러다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영혼들도 함께 온다(살전 3:13, 5:16,17). 그리하여 땅에서 다시 살아난 과 합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살게 된다(20:13, 21:2, 벧후 3:13).

따라서 마지막 종말에는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헤어졌던 영혼육체의 재상봉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그저 옛 모습 그대로의 재회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두 요소의 극적인 재상봉이다. 완전히 죄에서 해방된 거룩한 영혼과 다시는 병들지 않고 썩지 않고 죽지 아니하는 영광스런 육체의 영원한 재결합이다. 그 때에는 죄로 말미암은 이별이 다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드라마의 정점에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 있다. 그리고 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정신적인 부활이거나 영적인 부활이 아니다. 그런 것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첫 열매로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 것이다.

II.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은 마치 영원불변의 철칙처럼 이해되어 왔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죽으면 사람들은 몹시 슬퍼한다. 그 이유는 죽은 사람은 이제 다시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다.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시며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철학자들의 신은 죽음 앞에 묵묵부답이며 이방 종교들도 죽음 앞에서는 꼼짝 못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무덤 속에 들어간 자도 다시 일으키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도 현대신학자들은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한 말들을 한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레이던의 헨드리쿠스 벌꼬프(Hendrikus Berkhof)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전능(almacht)’을 부인하며, 그 대신에 하나님의 무능(onmacht)’ 또는 저항하지 않는 초능력(weerloze overmacht)’을 말한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며 세상의 악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세상의 악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며 간섭할 능력도 없다고 본다. 그 이유로서 현대신학자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유대인 학살을 든다. ,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개입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한다면, 그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의 악을 묵인하신 악한 하나님이 되고 만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같은 레이던의 신학자 판 헤넙(F. O. van Gennep)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적 성격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결코 자연 법칙을 깨뜨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자연 현상이나 역사에 물리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며 따라서 이적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사랑이 이적을 일으킨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연법칙을 파괴하는 물리적인 이적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우슈비츠의 예를 든다. 만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자연이나 역사에 개입하신다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판 헤넙도 헨드리쿠스 벌꼬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판 헤넙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거의 모든 서구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절대선(絶對善)으로 여기며, 이 기준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비난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희생된 유대인들에 대해 깊은 동정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악한 일을 저지르기까지 한 인간의 죄악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은 무능하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심히 불경건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피조물인 인간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어찌 불의하다고 하겠으며 무능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3:5,6)

뿐만 아니라 판 헤넙은 하나님보다 자연 법칙을 더 믿고 있으며, 그가 믿은 하나님은 자연 법칙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소위 자연 법칙이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운행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18세기의 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세상은 그 자체 안에 완결된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결정론적 우주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인 우주관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 원리, 이어서 발전된 양자 물리학에 의해 극복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극복된 옛 자연과학의 포로가 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대를 앞서 나간다고 하는 현대 신학자들이 사실은 오래 전에 극복된 낡은 자연과학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또 하나의 예를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다(4:17).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11:3, 1:3).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으며, 또한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시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도 살리셨다. 그 하나님은 마침내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온 세계에 선포하셨던 것이다.

 

III. 사망 권세에서 해방시켜 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정복하신 것을 의미한다. 사망은 온 인류를 압제하는 원수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일평생을 죽음의 공포 가운데 지내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그래서 인류가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것이 죽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죽음 문제만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병을 치료하려면 그 병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하듯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죽음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이다(6:23, 3:17-19). 온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에 빠졌으며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오게 되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그러므로 사망의 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죄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말한다. 왜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일까? 왜 예수님의 죽음만으로는 안 되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해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죽음 없는 부활이 불가능하듯이 부활 없는 죽음도 무의미하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파하였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사도들의 전파는 거짓으로 판명되고, 사도들의 전파를 믿은 성도들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고전 15:14). 왜냐하면 거짓 증거에 기초한 믿음은 잘못된 것이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또 생각할 것은 죄의 결과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의 해결은 그 결과까지 해결되어야 완전한 해결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 사함 받았다고 하면서 죄의 결과인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그대로 있다면 어떻게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빚이 많이 있어서 고생하고 있는데, 어느 날 채주(債主)가 찾아와서 그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고 하자. 그런데도 그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채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 것은 말뿐이요 실제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 받았다는 것(칭의, 법적 해결)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죄의 결과인 죽음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된다는 것(부활, 실제적 해결)을 의미한다. ‘죄 사함받은 우리는 현재 우리 몸의 부활에 대한 담보를 가지고 있으며(8:11), 장차 부활때에 우리의 죄 문제가 실제로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56)고 말했던 것이다.

 

IV.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연약함의 문제,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7장과 8장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안에 거하는 죄의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중생 전의 상태냐 중생 후의 상태냐 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인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중요한 주제인 부활의 소망에 대해서는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바울은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율법은 신령하다는 것과 나는 육신적이다는 것이 서로 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헬라어 접속사 de). , 항상 신령한 율법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육신적인 나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율법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시간에 관계없이 항상 신령하듯이, 그것에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관계없이 항상 육신적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과거의 어떤 모습에 대비되는 현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관계없이 항상 신령한 율법에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의 모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는 중생하기 전이나 중생한 후나 관계없이 항상 그러한 ’, 곧 연약한 인간의 본질적 모습을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중생한 후에도, 성령의 지배 아래 들어온 후에도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령의 지배 아래에 들어오면, 또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고 해서 타락한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이며,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이것은 중생 전이나 중생 후나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로마서 8장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몸은 죽을 몸이라고 말한다(11). 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고 했으며(23),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다(26).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 7장에서 말한 육신의 연약함이 로마서 8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육신의 연약함이 중생이나 성령 충만을 통해 실제로해결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율법의 신령함에 대비되는 인간의 연약함은 한 평생 동안 계속되는, 타락한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육신의 연약함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있는 해결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두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적 해결’(1-4)이며, 두 번째 단계는 우리 몸의 부활을 통한 실제적 해결이다(10-11). 첫 번째 해결은 하나님(ho theos)’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것이다(3). 이것은 우리 자신이 이루는 것이 아니며 또 성령 충만을 통해 이루어 가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미 이루어 주신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대신 이루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법정적(法廷的) 해결이며 대속적(代贖的) 해결이다. , 우리는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하는 연약한 상태에 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다 치루심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우리에게 정죄함(katakrima)’이 없는 것이다(1).

여기서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는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거나 또는 우리가 잘못해도 징계책망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12:6-8 참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결정적인 단죄저주가 없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사랑에서 영원히 단절되는 지옥 형벌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의미이다(8:37-39).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정죄가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3).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가 단번에이루어졌다(4, 아오리스트 시상). 이것은 우리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또는 경건한 삶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이루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 문제에 대한 대속적 해결이며,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끝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외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이 실제로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상태에 있다. 비록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아가지만, 우리는 여전히 속으로 탄식하며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이처럼 연약한 우리의 육신은 언제 실제로해결되는가? ,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법적으로완전히 해결된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19:31, 8:3)가 언제, 어떻게 실제로 집행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이다. 곧 우리의 죽을 몸이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은 부활의 소망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여기서 현재의 죽을 몸과 미래의 부활사이를 연결하는 고리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신데, 그 동일한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미래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요 담보가 되신다.

사도 바울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 여기서 양자 될 것우리 몸의 구속은 예수님 재림시에 우리 몸이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그 때에 우리의 몸은 모든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 때에는 죄가 조금도 끼어들지 못할 것이며, 마음의 원하는 것을 육신이 불순종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 실제적인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며, 100% 완전한 성령의 충만과 지배가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연약함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이다.

따라서 우리는 몸의 부활이 육신의 연약함에 대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해결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날마다 괴로워하며 고통하는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 마음의 원함은 있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실천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가 마지막 부활 때에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몸의 부활은 대단히 중요하고 실제적인 문제이다. , 부활은 모든 성도들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궁극적인 해결점이며,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오메가 포인트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신앙은 이 마지막 대사건, 곧 예수님 재림시의 육체의 부활을 목표로 달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맺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활절에 이런 메시지나 설교를 별로 듣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인간적인 성공에 대한 소망이나 사회 개선에 대한 희망, 또는 평화와 통일에의 염원 등으로 일관하고 만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참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좀더 잘 살게 해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죽고 말 것을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할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

이 부활의 예수님에게 우리의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가장 오래된 숙제요 원수인 죽음에 대한 진정한 해결이 있으며,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 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생명을 찾고 문제 해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육체의 부활이 없고 사망 권세에 대한 해결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생명이 있고 참 소망이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무덤 비석에 새겨진 글귀처럼,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활절 아침에 온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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