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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칼빈과 조지 윗필드

조지 휫필드

by 김경호 진실 2014. 12. 2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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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교회사를 다루고 있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청교도신앙;그 기원과 계승자들> ‘존 칼빈과 조지 윗필드’(생명의 말씀사)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터민스터 청교도 연구회’에서 1959-1978년 동안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는 청교도의 기원과 인물 그리고 청교도 교리와 역사적 배경이 자세하게 나온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청교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청교도에서 강조된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의 역사와 성령의 조명과 내주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간절함을 볼 수 있어, 나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이 책에서 소개할 부분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1964년에 강연한 ‘존 칼빈과 조지 윗필드’이다. 주로 윗필드 목사님을 소개하고 있지만,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바처럼, 칼빈과 윗필드의 관련성을 날카롭게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존 칼빈은 조지 윗필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죽은 정통주의 또는 형식주의에 빠지게 될 수 있는데, 그러한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지 윗필드의 신앙과 사역을 반드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p. 134). 윗필드 역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지만, 또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강조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곳마다 성령을 힘입어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의 설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빛과 무지개와 우뢰”(p.130)가 동반되어 많은 영혼들을 회심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윗필드의 설교 주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윗필드가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주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18세기 설교의 영광스러운 메시지였습니다. (p.135)

 

 

 

-1964-

존 칼빈과 조지 윗필드

 

방금 발표한 주제를 다루기 전에 사사기 2:8-10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 강연의 제목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제목이 현학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 연구회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존 칼빈과 그의 사역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강연을 다섯 차례나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저는 존 칼빈뿐만 아니라 윗필드까지 함께 다를 수 있는 사람인 것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여러분의 생각을 바로 잡기 원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빠져들 수 있는 잘못된 생각에서 여러분을 건져주고도 싶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미 다섯 사람이 존 칼빈에 대해서 말했으니 이제는 존 칼빈에 대해서 말할 것이 없고 조지 윗필드에 대해서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잘못입니다. 존 칼빈과 그의 사역,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풍성한 유산은 너무 크고 방대하기 때문에 존 칼빈이 죽은 지 400년을 맞이하는 이 해의 주제로 계속해 나가는 것이 제게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조지 윗필드에 대해서 말하려는 이유는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올해의 이 모임은 온전히 존 칼빈을 기념하는 일에만 전념하려고 계획했었고, 모임의 형식도 다른 때와 똑같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글로스터에 있는 윗필드 기념 교회(장로교)의 목사인 힐튼데이 씨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올해가 윗필드 탄생 250주년임을 지적하면서 그 교회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에게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와서 조지 윗필드에 대해 강연해달라는 청을 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하필 오늘을 택하였을까요? 그것은 윗필드가 250년 전 오늘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조지 윗필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특히 글로스터에서 그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상 큰 특권이 없다는 것과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연구회에 약속이 되어 있어서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정한 날짜를 바꾸는 대단한 친절을 베풀어 주어 그 교회에서 지난 12월 8일에 조지 윗필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제 마음에 즉각적으로, 오늘 저녁에 모이는 이 모임에서 조지 윗필드와 그의 위대하고 영광스런 18세기의 사역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패커 박사나 다른 이들도 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1964년의 모든 밤 중에서 이 밤을 저 위대하고 능한 사람 조지 윗필드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고 그냥 보내는 것이 아주 잘못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프로그램에 넣는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다른 논문들의 주제는 존 칼빈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윗필드를 끄집어내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충안을 택하여 “존 칼빈과 조지 윗필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소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을 함께 놓아야 하는 좋은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많은 면에서 매우 상이합니다. 존 칼빈은 극히 야윈 사람이었고 아주 창백하기조차 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윗필드는 튼튼하고 뚱뚱한 사람이었습니다. 존 칼빈은 전형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었고 윗필드는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연관지어 생각하도록 한 것은 날짜의 우연한 일치 때문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소위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만 해둡시다. 이 말은 그들이 모두 바울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칼빈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8세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라면 19세기의 메서디스트들은 두 그룹,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와 존 웨슬리가 그 두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신학적으로 이렇게 크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지 윗필드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교리에 있어서도 참으로 개혁주의였습니다. 반면에 웨슬리는 알미니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윗필드와 칼빈을 연관짓는 것입니다. 윗필드는 웨슬리보다 영국 국교회의 39개조 신앙고백을 더욱 존중했습니다. 그 신앙고백은 칼빈주의적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웨슬리는 거기서 떠났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구별의 주요한 책임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과 윗필드는 그러한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밤에 패커 박사에게서 존 칼빈의 열심과 그의 방대한 사역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특이한 일입니다. 그 모든 주석들과 기독교강요와 그의 모든 서신들과 소논문들과 그밖에 그가 남긴 모든 것들을 보십시오. 정말 엄청납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정규적인 설교를 하면서도 그러한 일을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윗필드의 경우도 정확히 그러합니다. 조지 윗필드만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큰 열심을 가지고 애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러한 면에서도 흡사합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둘 다 55세쯤에 인생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존 칼빈은 55세에 죽었습니다. 윗필드는 56세에 죽었습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한 두 사람 다 50대 중반에 삶을 마친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 또 하나는-이것은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두 사람 다 그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주의자들간의 연합을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 모임에서 우리는 칼빈과 관련시켜 그 연합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칼빈은 모든 개혁자들과 모든 복음적인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데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쟁과 차이점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어떤 일이든지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개혁적인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의 연합을 촉진할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 일이 필요하다면 열 바다라도 건널 용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 교회와의 연합이 아니고 개혁적인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의 연합을 말합니다.

 

 

조지 윗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웨슬리의 두 형제들과 맞서서 자신의 원리와 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분리를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편당을 없애고 하나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이 끝날 때 쯤에는 두 사람이 서로 강단에 서는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윗필드의 요청에 의하여 존 웨슬리가 윗필드의 장례식장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즉 윗필드와 칼빈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인 사람들의 연합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후세의 여러 세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이제 그 문제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당신은 조지 윗필드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십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 한 가지 대답은, 이 연구회 회장께서 바로 지적하셨듯이 그는 글로스터의 가장 위대한 아들이었습니다. 16세기의 존 후퍼 감독이 글로스터의 감독이었으며, 로버트 레이크스도 글로스터 사람이었습니다. 틴데일도 바로 그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패커 박사의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조지 윗필드라고 한 말을 듣고 저는 기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밤 이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의문의 여지 없이 그가 “잉글랜드”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잉글랜드” 설교자라고 강조한 표현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2백 여전인 그 시대에 라일 감독마저 윗필드에 필적한다고 인정하고 시인해야 했던 한 사람이 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니엘 로랜드(Daniel Rowland)입니다. 그는 그 당신인 18세기에 웨일즈에 살면서 사역했습니다. 그러자 조지 윗필드가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잉글랜드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확합시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하고 또 로랜드를 윗필드와 함께 놓는다면, 두 사람이 아마 사도 시대 이후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고 말하는 데 대한 아주 좋은 근거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라일 감독이 동의하듯이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윗필드가 잉글랜드 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역사에 미친 그의 심대한 영향력 때문에 그를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커 박사는 어제 밤에 존 칼빈의 그러한 측면을 말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윗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글랜드와 웨일즈와 스코클랜드와 미국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헤아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역사가 렉키는 1789년 이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으로부터 이 나를 구한 것은 분명 복음의 대각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만일 이 말이 옳다면 조지 윗필드야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잉 이러나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이요 위대한 설교자인 윗필드를 다시 음미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윗필드에 대해서 잠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놀랍게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조지 윗필드에 대하여 글을 쓰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못 흥미롭습니다. 여러분이 말할 것이 얼마나 됩니까? 그는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소홀히 취급당한 사람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무지는 섬뜩할 정도입니다. 누구나 책을 읽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 점을 부단하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200여 년 전의 위대한 각성과 부흥에 대하여 말할 때 “웨슬리의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예 상례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존 웨슬리가 행한 일로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18세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모두 존 웨슬리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프레드릭 길이 쓴 찰스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책에서 그러한 예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찰스 웨슬리, 최초의 메소디스트(우리나라에서는 메소디스트라면 무조건 우리 나라식의 감리교를 연상하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한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감기교회는 주로 알미니안적인 신학에 바탕을 둔 감기교회이지만 사실 메소디스트는 알미니안 메소디스트와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로 구분하여야 한다. 메소디스트를 감리교회로 번역한 것은 교회 정치 형태로 교회를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우리 나라식의 교회명이나 사실 메소디스트는 교회정치 형태보다는 신앙적 형태에 주안점을 두고 붙인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메소디스트가 나오면 감리교회라고 하지 않고 그냥 여어를 음역해 놓겠다-역자주)입니다. 그 책에는 윗필드가 평가절하되고 있는가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들어 있습니다. 선택이나 예정에 대하여 야기된 의견의 차이를 둘 사이의 결별 문제로 다루면서 찰스 웨슬리에 대하여 “그는 슬픔을 머금고 옥스퍼드 시절 전도하여 회심케 한 자를 떠나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윗필드를 보고 찰스 웨슬리가 전도하여 회심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은 윗필드를 망각하거나 평가절하하곤 했던 것입니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저명한 메소디스트들이 이 점을 인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저는 기쁩니다. 최근에 어니스트 래튼버리 박사는 메소디즘은 윗필드에 대해 바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현재 메소디스트 역사가 중 한 사람인 스케빙톤 우드 박사도 그러한 말을 기꺼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윗필드가 이처럼 무시되어 온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존 웨슬리에 대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저는 사람들이 웨슬리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인가를 얼마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윗필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해명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사사기 2장 말씀을 읽은 것이 바로 그 이유에서입니다. 여러분 거기서 강조되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었을 뿐 아니라 “그 세대 사람들도 다 열조로 돌아갔다”라는 말은 여호수아 당대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다음에 우리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제가 볼 때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현대 상태를 이해하는데 큰 빛을 비추어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알지 못할 때 그들은 곧장 교회사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일단 주님을 아는 지식을 상실하게 되면 주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관심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지난 100년 동안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언제나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자극합니다. 오늘 밤을 새우면서 교회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1873년 무디가 이 나를 처음 방문하고 나서 이 나라의 복음주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여기는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잘못이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오랜 기독교회사 기간 중 알려지고 기록된 모든 주님의 역사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매우 신중하게 살펴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두 사실은 불가분의 관계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리면, 주의 종들과 그들을 통하여 행하신 주의 위대한 일들을 아는 지식을 함께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적당한 때에 그러한 전제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검토해 봅시다.

그러나 사람들이 윗필드에 대하여 그렇게 무지한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그이 겸손 때문입니다. 그는 칼빈같이 가장 겸비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는 한 조지 윗필드의 이름은 잊혀지고 지워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여기 모인 분들을 위하여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존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존 웨슬리가 신봉한 알미니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보다 떠벌이는 일에 소극적이라는 생각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여 보겠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의 시설을 종교지들과 논문들에 집중하여 암시적인 말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요청하는 바입니다. 존 칼빈의 가르침은 무엇보다 사람을 겸비하게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는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또 사람이 아무리 많은 특권이 있으며 아무리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행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바로 그것이 칼빈이 관심있게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강조점과 교훈에도 이러한 것이 해당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존 웨슬리에 대하여 아는 것만큼 조지 윗필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윗필드가 그렇게 무시당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설명은, 그가 교단을 세우거나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새잉 끝나갈 무렵 이 점에 있어서 잘못이 있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존 웨슬리가 자기보다 더 지혜로웠다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자기 양을 우리 안에 넣었는데” 자기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교단을 만들거나 후세에 교단을 남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신앙적인 무리를 살지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단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교단을 남겼고 자기 특유의 신학관을 가진 교단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기억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존 웨슬리에 대한 책들이 쉬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윗필드의 경우에는 그렇게 할 만한 교단이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바로 그것이 그가 그렇게 서글프게 잊혀지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 사람을 다시 회상해 내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들과 신앙인들 앞에 이 사람을 추켜세웁니까? 저의 대답은 기독교 교회의 오랜 역사 중 가장 놀라운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18세기 신앙 부흥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건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사건들 중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놀라운 사건일 것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면, 다음과 같이 그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복음적인 각성과 부흥 이전의 이 나라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한심스러웠습니다. 시간이 없으므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상세하게 다루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이름은 <웨슬리 전후의 영국England Before And Wesley>입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합니까? 물론 그 책은 웨슬리안 메소디스트에 의하여 쓰여졌습니다. 웨슬리만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유도하고 있는 사실들은 진실입니다. 그는 그러한 의미에서 훌륭한 역사가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미숙한 신학자요, 진정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데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훌륭한 사실 수집가였습니다. 웨슬리 브레디가 쓴 그 책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나라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 국교회는 죽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엉망으로 얽힌 삶과 술 취함 여우 사냥 등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자주 그렇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단들도 그리 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 측면에서 조금 낫기는 했지만 이 당시의 장로교회들은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빠져 있었고 급기야는 아주 사라져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비국교도들의 집단들도 무기력의 상태에 빠져 죽은 정통을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세대의 조류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노력했습니다. 보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강좌를 개설했고, 버틀러 감독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유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다음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전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국면에서 영국의 국교도는 소생하게 되었고 비국교도도 소생했고, 메소티스트 공회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단체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더 넓은 영역에서 반동적인 여러 가지의 변화가 대단히 놀랍게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자주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는 이 나라의 노동조합 운동도 부흥의 간접적인 결과로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입증될 수 있습니다. 전에는 무지하고 술 취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변화되어 거듭나게 되자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되어 교육과 보다 더 나은 노동조건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윌리엄 윌버포스에 의하여 주도된 노예 제도 폐지운동이 부흥과 관계됨을 압니다. 그는 이 부흥회의 결과로 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이러한 위대한 복음적 각성이 없었다면 1832년의 선거법 개정 법령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복음적 각성에 의하여 깊이 변화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조지 윗필드가 그 복음적 각성 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제일인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무시되고 그에 비하여 존 웨슬리는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일입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만 공정과 정직과 진실을 말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논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윗필드를 무시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고 한심한 것은 그러한 점에서입니다. 그것은 다음 모든 경우에 있어서 조지 윗필드가 선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가 가장 먼저 회심했습니다. 제가 앞에서 인용한 책의 저자는 윗필드를 ‘찰스 웨슬리가 옥스퍼드 시절 회심시킨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윗필드가 회심한 것은 1735년이고, 찰스 웨슬리는 1735년에야 회심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말 뜻은 윗필드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이미 찰스 웨슬리와 다른 몇몇의 사람들이 이미 홀리 클럽을 시작한 뒤였으며, 윗필드는 그 모임에 초청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그것이 그의 회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 내에서 그들 중 첫 번째로 회심한 사람은 조지 윗필드로서 그 해가 1735년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하웰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가 웨일즈에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윗필드가 가장 먼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부흥 방법으로 참된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한 사람은 윗필드였습니다. 윗필드는 1736년에 처음 이러한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사역 중에서 가장 위대한 해 가운데 하나가 1737년이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웨슬리 형제들이 복음적인 의미에서 설교를 시작한 것은 1738년 5월 이었습니다. 그래서 윗필드는 그러한 면에서도 그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1737년 그는 런던시에서도 큰 군중을 모아 놓고 설교를 했으며 그 결과 엄청난 열매가 따라왔습니다.

 

 

그때 일어난 부흥의 특징 하나가 옥외설교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옥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는데, 그 수가 종종 이천 명을 넘었습니다. 옥외 설교의 효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항상 답은 간단합니다-윗필드입니다. 그는 옥외 설교의 선두 주자였으며 존과 찰스 웨슬리를 설득시켜 그렇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 두 형제는 윗필드보다 훨씬 보수적이었습니다. 윗필드는 이들보다 몇 개월 먼저 이 일을 시작하고 그들도 따르게 하려고 많은 힘을 썼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 모든 영역에서 지도자요, 개척자요, 선두였습니다.

 

 

 

그는 단체-종교 단체-결성 면에서 첫째였습니다. 자선 사업에 있어서도 첫째였습니다. 킹스우드 스쿨이라 불리는 유명한 메서디스트 학교가 있는데 수많은 메소디스트 사역자들이 자녀들을 그 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본래 광부들 등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이 킹스우드 스쿨을 누가 설립했는지 아십니까? 조지 윗필드입니다. 선도자는 항상 조지 윗필드였습니다. 그는 지도자였습니다. 이 사람을 무시하는 일에 대한 저의 항변은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음을 이제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외에도 그는 웨일즈의 신앙 부흥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현재 웨일즈 장로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초대 회장이었습니다. 이것은 흔히 웨일즈 칼빈주의적 메소디스트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윗필드는 1743년 이 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가 회장이 된 것이 이때를 위한 것이었다고 밀습니다. 웨일즈에는 위대한 사람이며 위대한 설교자가 두 사람-다니엘 로랜드와 하웰 해리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 중 누가 초대 회장이 되었느냐였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관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경우만은 한 사람을 택하는 것이 훨씬 유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두 웨일즈인들은 아무도 택하지 않고 잉글랜드 사람을 초대 회장에 앉힘으로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웨일즈인은 이 사람을 장로교 협회 초대 회장으로 여겨 기꺼이 굴복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글래스고의 한 지역인 캠버스랑에서 열리는 그 교제의 시즌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제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입니다. 또한 미국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정말 묘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현재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들과 저작들을 재출판하는 데 관계하는 포함한 모든 저자들은 1746년 이후 미국에서 휫필드가 끼진 영향은 정말 압도적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면밀하고 정직합니다. 그곳에는 1735년에 처음 일어났던 것보다 더 큰 제 2차적인 “대각성”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들 중 일부가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는 미국을 일곱 차례나 방문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지금도 대서양을 건너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200년 전에 일곱 차례나 건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윗필드는 열 세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일곱 번째 미국 방문 중에 미국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열세 번 대서양을 횡단한 것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는 열 네 번이나 갔습니다. 그는 설교자로서 34년간 사역하는 동안 18,00회의 설교를 했다고 계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아야 하는 것이 옳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200년 전 런던에서는 이 조지 윗필드만큼 잘 알려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사건들은 어떠합니까? 조지 윗필드로 알려진 기재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 간단하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미 상기시켜 드린 바와 같이 그는 1714년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있는 벨이라는 여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상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글로스터에 있는 벨 여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윗필드는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매우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었고 그래서 윗필드는 자기 일기에서 말하기를, 자기는 젊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예민한 양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학교를 떠났으나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를 떠나 있는 동안 그는 흔히들 하는 대로 글로스터의 술집에 나가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여전히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로 돌아가 끝내는 옥스퍼드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할 허락을 얻었습니다. 그는 찰스 웨슬리와 다른 사람들이 만든 그 홀리 클럽의 영양 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클럽에 존 웨슬리도 후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옥스퍼드에서의 과정을 마친 다음 1736년 6월 20일에 그 당시 글로스터의 감독이었던 벤슨 감독으로부터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습니다. 벤슨 감독은 23세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안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뛰어난 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그를 만나 본 후에는 자기가 정한 원칙을 깨뜨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비록 스물한 살이었지만 안수해 주었습니다.

 

 

 

6월 27일에, 그러니까 안수 일주일 만에 그는 글로스터의 성마리아 크립트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유아세례를 받았고 처음으로 성찬에 참여한 곳이었습니다. 자연히 이 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얻게 되었고 어느 정도 흥분하게까지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여관 주인으로 잘 알려져 있고 해서 그의 모든 친척들과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교회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설교를 통해서 그는 즉각적으로 유별난 사람임을 보여주었고, 그에게 비상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회중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후에 그 감독에게 보고된 내용을 보면 열다섯 명의 사람들이 이 설교를 통해 미쳐버렸다고 했습니다. 벤슨 감독은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서 보고된 그의 논평은 이러했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한 가지는 그 미친 것이 다음 주일까지 망각되지 않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윗필드가 정말 비상한 설교자라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윗필드가 한 최초의 설교는 그가 21세의 설교자라고 믿겨질 만큼 두드러진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면 피곤할 것 같아 계속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173년 8월에 런던에 처음 왔습니다. 런던에서 행한 첫 번째 설교는 비셥스게이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한 다음 런던 타워 예배당에서 대리 목사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설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가 다시 설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관심을 끌게 되었고 많은 청중들을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흔히 설교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산문형 논문을 읽는 대신, 그는 자기의 존재 전체를 들여서 권위와 능력과 확신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설교할 때마다 항상 교회가 가득 차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두 달을 보낸 뒤 햄프셔에서 교구 부목사로 있는 한 친구를 대신하여 일하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거기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교구 목사를 도와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게 되었고, 영국 국교회에서 성공적이고 진보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전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영향을 받아서 조지아로 가라는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조지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마음에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즉각 이용할 배가 없었고 또 여러 가지 준비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마음에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즉각 이용할 배가 없었고 또 여러 가지 준비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어머니와 친척들과 친구들과 작별하기 위해 글로스터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거기서 설교했는데 그때도 굉장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설교는, 그의 생애와 삶에 있어서 진정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한 브리스톨 시에 몇 사람의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지아로 떠나기에 앞서 작별을 하고 싶어서 그곳에 갔습니다. 그는 주중 어느 날이든, 교회에서 설교나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나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톨에서도 어떤 교회를 갔는데 거기 회중석에 앉아 있을 때, 설교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내려와서 대신 설교 좀 해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습니다. 윗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 제 포켓에 한 편의 설교를 할 수 있는 간단한 메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하겠습니다.” 그래서 설교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조지 윗필드라는 비범한 인물의 시작이었습니다. 온 회중이 전율했습니다. 그는 다른 교회들에서도 설교했고 그때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교회들마다 등을 켜 놓아야 했습니다. 2층 좌석이나 2층 회랑 같은 곳에서도 등을 켜 두어야 했습니다. 그 건물 내에서 그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브리스톨에서 처음으로 설교한 것은 1737년 1월이었습니다. 지연 사태가 일어나 아직도 조지아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1737년 5월에 다시 브리스톨에 갈 수 있었고 5월 23일에 거기에 도착했습니다. 이 윗필드라는 인물이 얼마나 비범한 인물인가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줄 만한 일이 여기서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불과 22세의 젊은 교구 부사역자였습니다. 그러나 브리스톨에 다시 돌아간 일에 대해서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군중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 걸어서 왔고, 그 도시 밖에서 1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탈 것들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왔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거리를 따라 걸어갈 때 인사하고 칭송했습니다.”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까? 스물두 살 먹은 젊은 사람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1마일 밖에서 걸어왔고 그를 만나기 위해서 탈 것들을 이용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왕의 행렬”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다 그의 기이하고 놀라운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다시 글로스터로, 다음에 옥스퍼드로, 그러한 다음에 런던으로 왔습니다. 1737년 8월부터 12월 크리스마스 때까지 그는 100회나 설교했다고 합니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는 런던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니 이 나라 전체에서 말입니다. 그 당시 젠틀맨스 메거진이라고 불리는 매우 인기 있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737년 11월에 이 잡지에 조지 윗필드에 대한 칭송시가 실렸습니다. 그는 여전히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737년에는 그의 아홉 편의 설교가 출판되었고 대단히 많이 팔렸습니다.

 

 

그러한 다음에 드디어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고, 1738년을 거의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이해 1738년 5월은 웨슬리 두 형제가 회심하던 해였습니다. 그러나 윗필드는 1738년 말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1739년이라는 이 위대한 해를 맞게 됩니다. 그는 옛본거지로 다시 돌아옵니다-글로스터나 브리스톨 말입니다. 그는 브리스톨의 외곽 지역에 있던 킹스우드 마을에 살고 있던 광부들의 비참한 참상에 대해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부패한 유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윗필드는 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근처에 예배드릴 곳이 있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윗필드는 자신이 그들에게 가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어느 날 가서 100명쯤 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효력은 너무나도 엄청나서 그곳으로부터 설교하기 시작하여 결국 어떤 때는 오천 명이나 놓고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갱에서 올라와서 씻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서서 듣고 윗필드는 거기 서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그의 청중은 금방 이만 명이 되었고, 그들 모두가 옥외에 서서 그의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처럼-에 웨슬리 형제가 그에게 영향을 받아 같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윗필드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런던에 있는 교구 목사들과 사역자들이 자신에 대한 태도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떠날 때는 인기가 대단했었는데 돌아와 보니 많은 문들이 자기를 향해서 닫혀져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로부터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일부 사람들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에 합당치 못한 행동을 했고, 자기들의 교구 목사와 사역자들에게 대들었습니다. 더구나 교구 목사 가운데 일부는 신생(거듭남)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한 윗필드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쓰기 시작했던 일기의 일부가 출판되었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자기 과시라고 생각하며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단한 질투심이 가세하여 많은 교회들이 그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옥외 설교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이즐링턴에 있는 성마리아교회에서 설교하려다가 거부당했습니다. 강단에 올라가려는 순간 사람들이 그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예배를 조용히 끝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는 그는 사람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교회 마당에서 설교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를 향한 공격들이 정말 너무나 거셌습니다. 그의 도덕적인 성품을 의심하는 비난이 일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개인적인 외모에 대해서 중상하기까지 했습니다. 윗필드는 불행히도 눈 하나가 사팔뜨기였습니다. 그래서 군중들 사이에서-특히 런던에 있던 군중-그는 “사팔뜨기 박사”로 통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는 그가 유명한 설교자였다는 것과 그의 삶이 그러한 식으로 진행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어필드 광장에서 설교했고, 메릴레븐 경기장에서 설교하곤 했습니다-그곳은 현재의 메릴레븐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메이페어로 알려졌던 곳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케닝턴 광장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또 블랙히드에서 설교하곤 했습니다.

 

 

윗필드는 넓은 장소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나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 설교해야 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 들었던 회중들의 평균 숫자는 한때 20,0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이 모두 서서 그의 설교를 들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여생 동안 이런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영국 전역에서 그렇게 하였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웨일즈에서도 그렇게 하였고 스코틀랜드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가 가까운 곳에서 설교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가게 주인들은 대번에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들도 그의 설교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밤이든 낮이든 수천 명의 회중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또 눈이 내리는데도 회중들을 꼼짝없이 서서 듣게 했고 서릿발이 서고 비가 오는 날씨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날씨가 문제시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도 아주 추운 겨울에 이 사람이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듣기 위해 1,000여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대단한 기회와 특권을 얻기 위해서 아주 멀리서부터 여행해 왔습니다.

 

 

 

그 나머지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1739년 그러한 방법으로 노천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이후 계속 모든 나라들에서 일을 해 나가다가 결국 1770년 9월 30일 이른 아침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젊은 설교자로 사역하던 초기부터 그처럼 갈망하던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그답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그때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기이한 일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대개 하루에 5, 6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늘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몸은 엄청난 과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1770년 9월 30일 주일 뉴잉글랜드의 뉴베리 포트에서 설교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엑스터라는 곳을 통과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그가 거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몰려나왔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설교해야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설교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처음에는 말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얼마나 연약한 상태에 있었든지 발음을 정확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점차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시간 동안 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조지 윗필드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능력과 힘이 충만하게 되었고 회중들은 늘 그렇듯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토요일 밤에 머물기로 한 뉴베리 포트에 도착해서 잠을 자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촛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질문을 던지고 그로부터 한 마디를 듣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정말 목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비집고 지나가려고 애를 썼고, 자기 손에 불이 밝혀져 있는 촛불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를 둘러보면서 그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또 다른 권면의 말을 한 것입니다. 촛불이 촛대에서 다 타서 그만 손에 촛대만 들고 있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침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는 우리가 지금 심장성천식이라 부르는 병으로 대단히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고, 결국 그것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그처럼 사랑하던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그의 놀라운 일기를 읽게 되면,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갈망 어린 그의 태도를 눈여겨보십시오.

 

 

 

그것은 단순한 말치레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그러한 말을 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소원이 그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소원이 허락된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기인을 우리가 상기하는 것이 좋은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이 사람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방법으로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기 런던의 귀족들 가운데서도 대단히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았습니다. 헌팅돈 백작 부인은 설교자로서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큰 집에 있는 여러 방들을 개방시켜 놓고 모든 지도적인 귀족들을 초대하여 그의 설교를 듣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윗필드의 설교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린 바와 같이 그는 역시 광부들에게도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또한 무어필드나 케닝턴 광장 또는 어느 곳이든 거기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에 있는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잘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나고 얼마나 기이한 사람입니까?

 

 

 

그는 돈을 모으는 일에 있어서도 탁월했습니다. 그는 조지아에 고아원을 설립해서 그것을 유지하는 데 대단히 많은 돈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 나서는 마지막에 돈을 모금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그는 궁핍한 사람이나 난관에 처한 어느 사람이든지 도와주었습니다. 잉글랜드 전체가 그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가 런던에 있을 때면 모든 사람이 그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계층, 사람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이 특이한 인물을 어떻게 설명해야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기조차 우리는 매우 어렵지 않습니까? 우리는 매우 안타까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8세기가 얼마나 놀라운 시기였습니까!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겠습니까?

 

 

먼저 윗필드 자신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본래부터 그는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소년으로서 그는 빈틈이 없었고 매우 사랑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뛰어난 것은 언어 구사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어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여관에서 설교자들을 흉내냈습니다. 그는 타고난 배우였습니다. 그는 대단한 웅변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웅변가가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웅변가는 태어납니다. 이 사람은 웅변가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셰익스피어의 희극 일부를 낭송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어느 한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또는 만일 글로스터 시에 있는 저명인사들에게 어떤 연설을 해야 된다면 그 소년이 뽑혔습니다. 그것은 그의 기이한 웅변술과 그가 쉽고 은혜롭게 그 모든 것을 해내는 수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웅변가였습니다. 다른 모든 웅변가처럼 그는 몸짓에 있어서 대단히 자유로웠고 아주 적적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학자연하는 존 웨슬리는 웅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때로 이러한 방면에 대해 조지 윗필드를 비평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웨슬리의 일기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한 번은 그들이 같은 시기에 더블린에 있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가 윗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갔습니다. 웨슬리는 그 예배를 얘기하면서 윗필드의 몸짓이 마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프랑스 사람과 흡사하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입술과 입으로 뿐만 아니라 손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웅변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웅변가 중 한 사람이 데모스테네스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데모스테네스에게 어느 날 이렇게 물었습니다. “웅변의 제일가는 원리가 무엇입니까?” 데모드테네스는 대답했습니다. “웅변의 제일가는 원리는 동작입니다. 웅변의 둘째가는 원리도 동작입니다. 셋째 원리는 동작입니다.” 웅변가는 단순히 입술과 혀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온 몸을 다 동원하는 사람입니다. “동작!”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웅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합니다. 조지 윗필드는 타고난 웅변가였습니다. 데이비드 개릭이 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데이비드 개릭은 그 당시 런던의 일류 배우였습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윗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갔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복음보다는 윗필드는 말과 몸짓에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개릭은 자기가 만일 조지 윗필드처럼 “오!”라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일백 기니를 내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윗필드처럼 “메소포타미아”라는 어휘를 발음할 수만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훨씬 더 큰 권위를 가지 사람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18세기 중엽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볼링부르크였습니다. 그는 유능했고 교양 있는 사람이었고 해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웅변과 연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볼링부르크는 자기가 여러 번 들어왔던 윗필드의 설교에 대해서 윗필드야말로 “자기가 들어본 사람 가운데 가장 유창한 웅변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정치가들이나 정치 웅변가들의 말을 다 들어 보았고 또한 모든 유형의 웅변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는 윗필드를 그 목록의 맨 위에 놓고 “가장 위대한 달변가”라고 했습니다. 이에 덧붙여서 윗필드는 다스하고 동정심이 우러나오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천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조지 윗필드의 기이함을 전부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제 영적인 부분을 봅시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거의 우스꽝스럽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아십니다. 그래서 이 사람 조지 윗필드를 선택하시고 그에게 이러한 천부적 재능을 부여하실 때 자기가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아셨습니다.

 

 

 

조지 윗필드는 획기적인 회심을 했습니다. 그 회심은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 회심에는 많은 단계가 있었습니다. 이미 상기시켜 드린 바와 같이 그의 양심은 소년 적부터 그를 괴롭혔습니다. 또 청년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가 옥스퍼드에 들어갔을 때 자기가 초대받은 여러 파티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진지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홀리 클럽”에 나갔습니다. 그 모임이 그로 하여금 더 진지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헨리 스쿠갈이라는 스코틀랜드 사람이 쓴 한 유명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17세기 말엽에 산 사람입니다. 그 책의 제목은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자기가 거듭날 필요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한 삶을 살거나 이것저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함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래서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하곤 했습니다. 또한 밖으로 나가 야외에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는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죄를 자각하는 그 무서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그에게 미소를 던지셨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조지 윗필드의 회심은 “결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죄의 자각과정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야 빛이 그에게 비쳤습니다.

 

 

 

이 외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성령으로 인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그것을 인치셨습니다. 이 사람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처음부터 그의 설교가 그처럼 특이했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합시다. 비록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그는 그의 삶을 살아나가면서 정말 놀라운 경건의 삶을 보였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 생활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부끄럽게 합니다. 때로는 저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느끼게 합니다. 저는 이미 이 사람의 겸손과 성자다운 면모를 언급했습니다.

 

 

그가 설교를 두렵게 생각한 것만큼 그 점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가 목회 사역을 위해서 훈련을 받았다고 안수를 받을 때가 왔지만 그는 설교하기를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설교가 너무나 거룩한 임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설교하지 않기 위해서 천리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설교에 대한 그의 관점이었습니다. 그 자신과 그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그의 관점도 그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윗필드로 하여금 강단에 올라가 설교하도록 설득하는 데 애를 먹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여, 우리가 여기서 교훈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신문의 주목을 받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러한 주목을 받을 때면 언제나 괴로워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는 특이하게 겸손하고 성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자기가 생각하기로는 성자다움에 있어서 윗필드를 따라갈 만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고 했습니다.-생각컨대 그 사람이 이 다른 사람을 조금 더 높게 생각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그 사람은 메들리의 존 플래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가 윗필드의 생이 끝마칠 즈음에 그러한 말을 했고 그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생각하면, 그러한 말을 한 것이 윗필드의 성자다움과 경건에 대단한 찬사를 보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그의 열심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의 형제애와 그의 특징인 보편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그 사람이 칼빈처럼 복음적인 연합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음을 상기시킨 바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작은 것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한 좁은 것이란 없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사이의 교리적 문제로 의견 차이를 나타냈고 그들의 의견을 반대할 채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로 하여금 고지식하고 편협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파당적인 작은 사람으로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스킨의 두 형제 랄프와 에베네절이 스코틀랜드 국교에서 분리한 장로교에서 탈퇴했는데-그들은 그렇게 할 충분한 증거가 있었음-그 사람들은 윗필드로 하여금 스코틀랜드에서 자기들만 위해서 설교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을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교회만 있다면, 또한 나의 복음 설교에 무능ㄹ 열어 놓을 준비를 한 사람들에게도 설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스킨 형제들에게 매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설교했습니다. 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글래스고와 캠버스랑과 에딘버러와 다른 여러 지역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이것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결과 였습니다-사랑과 형제애와 넓은 마음과 진정으로 복음적인 설교를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는 그의 간절한 소원이 바로 그러한 결과였습니다.

 

 

그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이제 그의 메시지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는 그것을 “정직한”것으로 묘사했고, “명백한”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직설적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에 관해서 설교했습니까? 그의 위대한 제목들 가운데 하나는 원죄였습니다. 조지 윗필드만큼 강력하게 자연인의 중생치 않은 마음 상태를 잘 파헤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는 중생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 안의 신생의 본질과 필요성”에 대한 설교가 런던과 브리스톨과 글로스터와 글로스터 주에서 각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대각성을 일으킨 것도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유명한 설교였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주요한 주제였습니다.

 

 

그의 설교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다른 주제는 이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광을 믿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일을 하도록 그를 잡아주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와 다른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서 윗필드와 얘기를 한 일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고록에 나와 있는데,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내적 영향에 대해서 강조한 문제를 가지고 그와 대면하려고 나는 애썼습니다.” 윗필드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지적인 의미에서 훨씬 더 유능한 사람이었고 훨씬 더 위대한 천재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점에 있어서 불행했습니다. 에드워즈가 기록한 것을 보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것을 윗필드가 사실상 듣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윗필드는 그것을 설교했고 그것을 대단히 강조했습니다.

 

 

물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는 것(이신칭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어째서 중생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보다 앞에 두는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윗필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를 설교하기 전에 중생을 설교했습니다. 그가 이 면에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처음의 그의 설교는 거의 중생치 못한 자연인의 마음의 부패성과 신생의 필연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스쿠걸의 교훈의 영향이었습니다. 1737년 출판된 그의 아홉 편의 설교 가운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주제를 언급하면서 의미 있게 이렇게 진술합니다. “비록 내가 그때는 그 후처럼 그것에 대해서 명백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1737년까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에 대해서 명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바로 그 진리에 있어서 그를 바로잡아 준 것이 웨슬리 형제들이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윗필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윗필드가 이 면에서 더 균형을 갖추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윗필드가 편당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저도 편당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윗필드로 하여금 설교자의 메시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가 얼마 중요하며, 그것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도록 도와 준 것은 웨슬리 형제였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그 두 사람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그의 설교에 칼빈주의적 강조가 드러난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 명백했고 모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특징짓는 또 다른 것은 회심하지 않은 설교자들에 대한 그의 혹독한 질책이었습니다. 특별히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윗필드는 수많은 사역자들이 그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회심하지 않은 채 목회 사역을 하는 것을 비난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가 그것을 지적한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이 볼 때 “느끼지도 않는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느끼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한없이 비난했습니다.

 

 

이제까지 그의 사람됨과 메시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끝으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 즉 그의 설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구별과 분열의 차이를 아십니까? 제가 이 질문을 던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메시지와 설교하는 것 사이를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처럼 저를 낙심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르고 정통적인 메시지를 가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것이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윗필드로 하여금 로랜드와 다른 부류에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설교하는 것(Preaching, 여기서 로이드 존스는 설교 내용과 설교하는 행위를 구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함. 이 사람이 말하는 Preaching은 설교 내용을 가지고 강단에서 설교하는 설교 행위 전체를 말하는 것임-역자 주)입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메시지를 나타내고 전달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같은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조지 윗필드의 설교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그의 설교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의 설교는 사도적, 천사적인 설교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설교를 많이 들었고 그 중 일부를 출판하는 일을 맡았던 한 미국 설교자의 논평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는 윗필드의 설교 스타일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설교 스타일에는 고상한 자유분방함이 흐릅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윗필드는 앉아서 멋진 문학적 원고를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장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완전하게 문장이 끝나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그러한 문장으로 설교를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문을 작성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는 즉흥 설교가였습니다.

 

 

이 사람이 “고상한 자유분방함”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설교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문법의 법칙을 깨뜨렸고, 그 문장을 언제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설교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상한 자유분방함!”-우리가 이것을 좀더 많이 알고, 이 타락한 세대에서 설교로 통하는 매끄러운 메시지를 좀 덜 알았으면! 그러나 설교를 특징짓는 것은 열심히요, 불이요, 열정이요, 불꽃입니다.

 

 

그는 가장 확신 있고 가장 위력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글로스터에서 처음 설교할 때 어떤 일이 있었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계속 산출해 낸 효과는 그와 같았습니다. 그는 자연인의 마음의 어둠과 죄악성을 얼마나 들춰내던지 사람들은 겁을 먹고 놀랐으며, 그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에는 정념, 사랑, 항거할 수 없이 녹이는 성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설교하는 것(설교 행위)입니다. 저는 이 설교하는 문제에 대한 윗필드 자신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가 한 설교 원고를 부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출판하려고 하니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 설교와 함께 빛과 우뢰와 무지개를 인쇄할 수 있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설교를 차가운 활자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설교의 내용들을 옮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 자체를 옮길 수는 없습니다. “빛”을 인쇄할 수도 없고, “우뢰”-빛의 번쩍임과 천둥소리-를 인쇄하거나 “무지개”를 포착할 수는 더욱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설교지가 한 말, 행동, 설교자의 모든 것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윗필드의 설교를 읽을 때 흔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설교를 한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놀라운 인물이나 놀라운 설교자가 될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뿐입니다. 설교하는 것을 종이에 옮길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중엽이나 그전부터 우리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그러한 견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설교들을 인쇄하고, 말한 모든 것을 인쇄하는 것은 그러한 설교에 엄청난 힘을 줍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보다는 설교를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습니다. 평판과 문학적이고 현학적인 체하는 비평가들의 말이 관심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윗필드의 말을 기억해 둡시다.

 

 

물론 그러한 설교의 효과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는 과거 킹스우드의 가난한 채탄 광부들의 모습 속에서 관찰한 것을 스스로 말합니다. 이 가나한 사람들은 갱에서 곧바로 올라왔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석탄 먼지로 검게 칠해져 있었는데 그대로 윗필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설교할 때 갑자기 그들의 검은 얼굴에 흰 골이 생기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눈물이 얼굴로 흘러내리자 석탄 먼지와 검댕 묻은 얼굴에 흰 줄기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교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죄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술 취함과 방탕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기이하게 설교하는 것을 듣고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위대한 찬송시를 슨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살펴봅시다.

 

 

 

위대하신 경이의 하나님이시여! 주의 길은 모두 비할 데 없고

하나님답고 신성합니다.

 

 

사무엘 데이비스는 자신이 뛰어난 설교자였고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미구그이 부흥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한 대학의 학장이었습니다. 사무엘 데이비스와 길버트 테넨트는 그 대학을 위해서 모금하기 위해 이 영국으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힘든 항해 끝에 영국에 도착했는데 그 항해 기간 동안에 여러 번 배가 파손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토요일 아침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후 첫 번째 한 질문은 “윗필드 씨가 이곳에 있습니까?”였습니다.

 

그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일 아침에 설교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곳이 무어필드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설교를 들을 매우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데이비스는 그 예배 상황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예배에 참석하자마자 나는 윗필드가 정말 바쁜 주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분명히 그는 그 설교를 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그 사고의 구성과 배열에 있어서 그의 설교는 매우 빈약했고 결함이 있었습니다. 정말 형편없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에 수반된 기름부음은 너무나 놀라워서 은혜로운 감화를 받기 위해서라면 대서양의 그 무서운 파선의 위험을 여러 차례 감수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설교입니다. 빈약한 설교 형식 그러나 엄청난 설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설교하는 것을 “연설하는 것” 또는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까? 설교! 그것은 하나님 아래서 엄청난 부흥을 산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에드워즈 부인이 윗필드의 설교를 듣고 느꼈던 것에 대한 기록을 읽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체스터필드 경이 말한 것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체스터필드는 18세기의 전형적인 휴머니스트로서 그의 아들에게 주는 충고 형식의 유명한 책을 쓴 멋쟁이였습니다. 그는 윗필드의 설교를 듣기 좋아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그 설교를 듣고 그 설교의 능력에 압도당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윗필드는 죄인의 처지가 얼마나 위험천만한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한 예화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죄인이 깨닫지도 못한 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을 개를 따라가고 있는 눈먼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개를 따라서 인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가 줄을 끊고 도망쳤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혼자 지팡이로 더듬거리면서 애써야 했습니다. 윗필드는 말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가련한 사람은 절벽 끝까지 더듬거리며 갔습니다. 그만 그 지팡이가 계곡으로 떨어졌고 그 떨어지는 소리가 계곡에 메이리쳐 들려 왔습니다.

 

 

그 소경은 조심해서 그 지팡이를 다시 잡으려고 앞으로 손을 더듬거렸습니다. 순간적으로, 그 소경이 허공을 향하여 내디딜 순간이 왔습니다. 그 순간 체스터필드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 안됩니다! 그를 붙잡으십시오!”라고 소리치면서 그 소경이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앞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것은 웅변일 뿐만 아니라 설교이기도 합니다. 그 설교는 체스터필드 경과 같은 사람에게도 특별한 방법으로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벤자민 플랭클린이 조지 윗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온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도 천재였습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과학자로서, 또 문학가로서, 아메리카 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프랑스 주재 미국 초대 대사로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종종 런던에 왔습니다.

 

 

이 유능하고 교양 있는 사람은 자신을 퀘이커 교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에서 살았었는데 윗필드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인쇄업자였습니다. 그는 빈틈없는 사업가였고 윗필드의 설교를 인쇄하여 팔았습니다. 그는 윗필드의 설교를 들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러한 기회들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윗필드는 설교가 끝나면 틀림없이 조지아에 있는 자기 고아원을 위해서 모금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프랭클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을 그도 보았습니다. 그도 얼마인가를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하는 데에 아주 진력이 났습니다. 윗필드가 자기 돈을 너무 많이 가지고 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윗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가던 그날은 설교가 끝나 모금할 때 절대 헌금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작정을 했습니다. “내 호주머니에는 금화, 은화 그리고 동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난 나는 그 모든 것을 주지 않을 결심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 번 헌금했던 것입니다.”그러나 그의 다음 말을 들어보십시오. “설교자가 나오자 나는 마음이 풀려 동전을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웅변가가 또 일격을 가하자 나는 은화를 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설교를 마치자 나는 주머니에 있는 것을 몽땅 그 모금 접시에 놓고 말았습니다-금화와 모든 것을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설교입니다! 이것은 웅변 이상입니다. 영감된 웅변입니다-성령으로 영감된 웅변, 하나님의 말씀에 메시지와 그 영광스런 복음을 전파하는 웅변이란 말입니다.

 

 

 

조지 윗필드가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들을 제가 몇 가지로 제시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상세히 설명할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상황은 절대로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1736-37년까지의 기간처럼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절대적인 절망의 상황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글로스터의 벨 여관에서 태어난 이 무명의 소년 조지 윗필드에게 손을 얹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기독교의 장래를 걱정하느라고 사간을 너무 많이 보내지 마십시오. 단순히 우리 앞에 직면한 상황을 묘사하거나 분석하는 데만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마십시오. 상황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행하신 가장 놀라운 일들 중 하나였습니다.

 

 

둘째로, 칼빈주의와 전도의 관심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거짓말에 영원한 종식을 고합시다(나는 이러한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이 사용되기 때문에 그 말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바로 이 사람인데 그는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지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던 찰스 하돈 스펄젼은 자신이 어느 누구를 본받았다고 한다면, 조지 윗필드라고 고백합니다. 그도 역시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우리 중 일부가 현대 복음주의의 어떤 측면들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은 칼빈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현대 복음 전도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을 우리가 반대하는 만큼 반대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반론은 칼빈주의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사악한 행위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의 계획을 강조하는 교리는, 언제나 그것을 참되게 설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 전도를 하도록 강권하고 종용했습니다. 윗필드 한 사람만을 들어도 이 점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큰 은하수 속에서 뛰어나게 반짝이는 하나의 별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정통 신학의 절대적인 필요성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이 전했던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청교도들과 그들의 저작들을 연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때로 어쩔 수 없을 때는 청교도들의 설교를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웨슬니는 말하기를, 윗필드가 분명히 매튜 헨리의 설교를 가지고 설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메시지가 같았습니다. 메튜 헨리가 이미 준비한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통 신앙과 진리를 믿는 믿음의 절대적 필요성입니다. 우리는 패커 박사의 강연을 통해서 매우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통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윗필드가 다른 어느 것보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도 정통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교적 쓸모가 없었습니다. 죽은 정통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통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통만 가지고는 부흥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제가 이 강연을 마치면서 말씀드립니다만 칼빈과 윗필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정당하고 중요한 이유가 뜻하는 바는 이러합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가진 위험은 너무 이지적이 되거나 아니면 “경화(硬化)된 정통”으로 빠지는 성향입니다.

 

 

여러분이여 그것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 위에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진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그 진리가 진술되어야 합니다. 이 능한 사람 윗필드가 바로 그 점을 놀랍게 예증합니다. 그는 정통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놀라운 일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안수 받을 때에도 무엇인가를 느꼈다고 말합니다. 마치 자기가 성령께로부터 친히 사명을 받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가 이것-성령이 물결치듯 임하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이 사람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잘 안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그를 압박했고 육체적으로 그를 거의 부숴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눈물로 목욕을 하곤 했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통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금물입니다. 우리는 조지 윗필드가 받았던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모든 계층과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능력과 확신으로 설교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또 다른 것- 이것은 오늘날 매우 중요합니다-은 그가 종교단체의 가치를 크게 믿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전 세기에 시작된 여러 가지 종교 단체가 윗필드의 시대 초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통해서 크게 도움을 입었습니다. 그가 1736년 6월 27일 주일에 글로스터에서 처음으로 설교한 것도 사실상 “종교 단체의 가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이 소그룹을 통해서 모이는 것을 격려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알기로는 오늘날 영국의 여러 지역에서 그렇게들 함께 모이고 있는 줄 압니다. 그들 중 어떤 소그룹들은 매주 마다, 어떤 그룹들은 매월 마다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윗필드는 그러한 종교 단체에 대해 말로 할 수 없는 큰 가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것과 다른 이유들을 근거로 다음의 것을 말씀드리고 끝마쳐야겠습니다. 제가 믿기로, 윗필드는 우리로 하여금 설교로 돌아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설교를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독서를 크게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독서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독서로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문을 읽는 것과 설교를 듣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쓰여진 설교를 사용하실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서 직접 전해지는 설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독서만으로 설교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위험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간단한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성령의 자유케 하심이 필요합니다. “빛과 우뢰와 무지개”를 필요로 합니다. 책들을 통해서는 그것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는 이 현대적인 매체들을 통해서 제공되는 통제되고 시간 제한을 받는 프로그램에 의지해서 그러한 것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프로그램이 잊혀 집니다. 시간도 잊어버립니다.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과 내 영혼과 이 복되신 구세주 외에는 모든 것을 잊게 됩니다.

 

 

윗필드가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주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18세기 설교의 영광스러운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설교로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단순히 정확한 신조들을 기계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조지 윗필드와 같은 설교자가 될 수는 없다 해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설교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모방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치는 것을 주의 깊게 받아들여 이 진리를 생생하게 깨닫고,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그의 은혜의 부요함과 영화로움을 말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사람을 기념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우리의 사역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시고, 우리 속에 강한 신앙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타나는 것을 이 나라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소원하는 마음을 우리 속에 창조하소서!

 

<청교도 신앙과 그 계승자들>, 마틴 로이드존스, 생명의 말씀사, pp. 108-136.

출처 : 청교도 도서관
글쓴이 : 천국 도서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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