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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렐링후이젠과 길버트 테넌트 목사님

조지 휫필드

by 김경호 진실 2014. 12. 20.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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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조지 윗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에 의해 일어났다. 그런데, 그 불을 지피고, 그 불을 지속시켰던 분들도 있었다. 그 분들은 테오도르 프렐링후이젠과 길버트 테넌트 목사님으로, 윗필드나 에드워즈 목사님처럼 성령의 조명과 내주를 체험하신 분들이었다.

마침 그분들의 1차 대각성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나온 좋은 자료가 인용한다.

 

<인용글>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1730년대에 불붙기 시작했을 때 칼빈주의 목회자들이 주도적인 이을 하였다. 영국 성공회 목사 윗필드, 미국 장로교 목사들인 테넨트가의 사람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각성운동의 시발점은 사실 1720년이었고, 그 주요 인물은 네덜란드 사람은 프렐링후이젠(Theodorus Frelinghuysen, 1691-1747)이었다. 어떻게 네덜란드 선교사가 미국 각성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을까?

네덜란드 개혁파 개신교도들은 뉴저지의 라리탄 강변을 개척하면서 독자적으로 신앙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이들은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관계를 맺어 오고 있었으므로 이민 초기부터 동교회로부터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간청했었다. 1720년 동교회는 성경말씀에 충실하고 선교열이 있는 프렐링후이젠 목사를 뉴저지의 네덜란드인을 위해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프렐링후이젠 목사는 신앙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영접한 뛰어난 설교가였고, 삶 속에 경건한 신앙 실천이 있는 자였다. 그는 신학적으로 칼빈파 개혁주의자였지만, 독일 경건주의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는 경건주의의 열정과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는 윤리적 생활 강령을 실천함으로서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해보지 못한 뉴저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신앙의 회심 경험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삶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이름만의 성도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나 보지 못한 자는 집사,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폭탄 같은 선언도 감행했다. 신자의 생활은 종교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경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뉴저지 일대에서 상공업으로 자리를 잡아 부유해진 나이 많은 회중들은 그의 목회 방침에 반대했으나, 젊고 가난한 이민자들에게는 그의 도전적인 설교가 매력적 영감을 주었다.

부유층들은 프렐링후이젠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말에 고분고분할 목회자를 다시 선택하려 했으나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째는 프렐링후이젠을 초청한 자들이 바로 자신들이었고, 둘째로는 뉴저지의 실력자이며 총독인 버넷이 한사코 반대하였다.

 

사태를 재빠르게 파악한 프렐링후이젠은 선수를 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부유하며 교만한 네 사람을 출교시키고, 네 사람에게 동정적이지만 신앙 교정이 가능한 자들에게는 강하게 꾸짖음으로서 지혜롭게 성도 관리에 임했다.

부임한 지 5년 후인 1725년에는 성도들 중에 가장 자기중심적이며 그에게 가끔 조소적인 태도로 나왔던 한 집사가 회심의 경험을 함으로서 그의 교회는 급진적으로 부흥을 맛보며 성도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프렐링후이젠의 열매 맺는 목회를 본 이웃 교회들은 그를 초빙하기 시작했다. 넓은 미국 대륙을 순회 전도자 자격으로 돌면서 그는 신앙 회심의 중요성과 신앙의 열매인 경건한 삶을 강조하였다. 처음에는 부흥 운동의 형식으로 그의 사역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칼빈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교회들은 프렐링후이젠의 부흥 사역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장로교회, 회중교회,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가 교단이나 교파를 초월하여 동역하였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신학이 같았다. 칼빈의 가르침이 그들의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프렐링후이젠과 특별히 가깝게 지낸 사람은 장로교도인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 1703-64)였다.

 

길버트 테넌트가 부흥 운동의 대열에 서기 전, 가장 신앙적으로 영향을 준 이는 아버지 윌리엄 테넌트였다. 윌리엄은 아일랜드에서 목회하다가 좀더 신앙적으로 자유로운 곳에서 사역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1718년 필라델리피아 장로교회에서 목사로 임명된 후 뉴역 베드퍼드 장로교회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윌리엄 역시 뜨거운 열정과 경건을 소유한 뛰어난 설교자였다. 그는 자기 교회당만 지키며 사역하는 것보다 이곳저곳 순회하면서 복음 전파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또한 미래의 복음 운동 확장을 위해서는 신학 교육의 중요성을 늘 깨닫고 있었다. 그는 불타는 듯 살아있는 신앙 교육을 시킬 곳을 찾지 못해 스스로 신학교를 세웠다. 뉴욕을 떠나 펜실베니아로 가서 미국 개신교 역사에 길이 추억될 “통나무 대학”(a log college)을 건립한 것이다.

이 학교에서 미국 제1차 부흥 운동의 주역이 될 그의 아들 길버트와 다른 4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통나무 대학은 회심의경험이 없는 자는 입학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까다로운 자격 요건은 즉시 장로교회 중진들의 반발을 사게 했다.

 

당시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후보생이 될 조건에 정통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앙 고백에 합당한 도덕적인 행위를 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구태여 내적 신앙 경험을 말하거나 회심의 경험을 신학 공부하는 데 조건으로 달지 아니했다. 점차 윌리엄이나 길버트의 견해를 따르는 자들과 그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이 일단의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자를 신파(New Side) 또는 부흥파라고 호칭하고, 후자를 구파(Old Side) 또는 부흥 반대파로 호칭하기 시작한다.

길버트는 아버지의 신학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신학 공부 이전에 그는 아버지가 말한 신앙 체험을 얻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신앙 체험이 오기 전까지 그는 의학을 공부하였다. 의학 공부 도중에 그가 그렇게 바랐던 신앙 회심과 체험을 경험했고 즉각 신학 수업을 시작하여 1726년 뉴저지에 있는 뉴브런즈윅에서 목사직을 받았다.

길버트는 자신과 신앙노선이 비슷한 프렐링후이젠과 곧 친하게 되었다. 회심의 경험과 내적 신앙의 성장에 대해 두 사람은 의견이 일치했다. 설교도 지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 정, 의를 모두 포함한 열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같은 견해를 가졌다.

 

프렐링후이젠이 미국 목회 초기에 그의 성도들로부터 비난받은 것과 같이 길버트도 너무나 감성적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회에 남았고 길버트를 옹오해 주었다.

통나무 대학교 졸업생들이 뉴브런즈윅 일대에서 사역을 감당함에 따라 뜨거운 복음 운동이 연합 전선을 통해 뉴저지 일대에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존 로우랜드는 순회 설교자로서 소외당하고 가난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씨를 뿌렸다.

길버트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성경에 나타난 심판주 하나님이 바로 설교하는 그 장소, 그곳에 나타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교는 중생을 맛보지 못한 신자들에게 당장에 부딪히는 절박한 위기 상황이었으므로 회심의 동기를 유발시닐 수 있었다. 윗필드는 길버트가 말씀 자체에 흠뻑 빠져 두려움 없이 하나님이 공의와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을 부러워하였다.

길버트 테넌트는 1740년과 1741년 윗필드와 같이 부흥 사역을 감당하였다. 윗필드가 부흥 운동의 열기를 일으켜 놓으면서 테넌트는 그 운동의 지속을 위한 후속 조치를 그의 꾸밈 없는 설교로 잘 감당하였다. 보스턴에 살면서 윗필드는 테넌트의 부흥 운동을 목격한 프린스 목사는 1740년 9월 윗필드가 보스턴에 도착하여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떠난 후 1740년 12월 13일 길버트 목사가 와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부흥 운동을 지속적으로 연결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청교도 인물사>, ‘조지 휘트필드:복음주의 연합 운동, 정준기, 생명의 말씀사, pp.229-233.

출처 : 청교도 도서관
글쓴이 : 천국 도서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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