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 마 7:12-14
요절: 13a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지난주, 2014년 11월 25일은 저에게 인상 깊은 날이었습니다. 그날 교황 프란치스코가 쉬트라스부르크 유럽공동체 의회에서, 각각 상원과 하원에서 연설하고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는 극우파부터 시작해서 좌파(공산당)로부터까지 갈채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교회 지도자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극우나 공산당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당일진대, 어떻게 그들이 교황의 연설에 감동을 받을까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연설에서 예수님만 빼면 됩니다. 복음만 제외하면 기독교 설교는 누구에게나 환영받습니다. 이웃사랑을 말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꺼내는 즉시 그는 배척당합니다.
교황이 강조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경제 문제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거룩함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인간은 복음이 없어도 타고나면서부터 존엄하고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유럽은 병들고, 지치고, 비관적이 되었고, 이제는 위기를 „과거의 활력과 정력으로 극복하지“ 못한다. 유럽은 경제적인 관심이 „진정한 인간적인 가치“를 밀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을 기억나게 합니다. 이 인권선언은 인본주의와 이신론의 꽃으로서 인간이 주인이 되는 하나님 없는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헌장입니다. 그곳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알리바이로 등장할 뿐입니다. 현대 세속사회에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조금 극복하고 이웃사랑의 실천을 실천하여, 약자를 도와서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행복하게 산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설은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프란체스코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환영받기 시작합니다. 1960년대에 시작한 바티칸의 종교통합 정책은 프란치스코에 와서 큰 열매를 맺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가 어느 정도 공정하게 분배되고 사회정의가 실천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해지며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될까요? 사회적으로 보면 옳습니다. 즉,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사회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올바르게 서면 구원이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매우 피상적인 인간의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근본적인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미국독립선언문과 프랑스혁명 인권헌장, 유엔헌장 등의 기본정신입니다. 그런데, 만약 바티칸에서 그들을 부패하게 한 그들의 모든 권력과 재산을 포기한다면 프란치스코의 소망은 달성될 것입니다. 교회의 재산과 권력은 반드시 부패와 타락을 낳습니다. 교회는 권력이 없어야 하나님의 권세, 말씀의 권세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바티칸은 이것을 실천할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기립박수를 하는데, 몇 명 대의원의 비판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망각했나?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체제 변혁을 호소하는 데가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함으로써 영생으로 이끄는 곳입니다. 교황의 관심은 사회 문제보다는 영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회제도의 개선은 물론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죄인을 영생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설을 정치가가 했다면 저도 기립박수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지도자가 할 연설이 아닙니다. 이들은 회개를 외쳐야 합니다.
오늘은 교황이 너무 준동하고, 신교도까지 그에게 영합해서 마음이 울적하므로, 예외적으로 시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미 한국교회도 절반은 교황에게 끌려가고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런데 교황이 모든 사람을 초대하고 있는 길은 바로 오늘 본문과 관련된, 멸망의 길인 넓은 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몇 달 동안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배웠습니다. 산상수훈은 7장 12절로 실제적인 가르침은 끝납니다. 13절부터는 그간 가르치신 것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12절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우리가 남으로부터 원하는 대로 우리도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실행하기 매우 어려운 이러한 종류의 가르침을 많이 접했습니다. 즉,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 받은 자이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가 아니라 슬프고 애통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며, 원수라도 사랑해야 하며, 남을 판단해서도 안 되며,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의 지배를 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려고 모였던 제자들은 이 말씀들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실망하고 낙담해서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13-14절을 보겠습니다:
13a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3b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예수님은 명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려고 온 사람은 이제 두 가지 길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문이고 하나는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구라도 알아듣기 쉬운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은 고대 도시에 마다 (팔레스타인 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것이므로, 이 예가 주는 메시지는 매우 명확합니다: 넓은 문, 즉 대문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통행이 잦은 큰 문이며, 그 옆에 있는 좁은 문은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며, 통행이 제한된 밤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훨씬 쉽고 안락합니다.
그런데 이 두 문의 비유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넓은 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그 문은 인간의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길입니다. 이 넓은 문은 모든 것을 통과시킬 정도로 매우 넓습니다: 짐승, 상인, 마차, 상품, 작은 그룹의 사람들, 큰 그룹의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에서는 큰 문 안에서 재판도 벌어질 정도였습니다(참고 룻 4:1; 삼하 15:2). 당연히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으므로, 문 통과를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을 통과하는 길도 „넓거나“ 혹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길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숫자가 „많으므로“ 서로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귀족들, 가난한 사람, 부자들과 거지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거의 모든 사람이 선호하는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통과할 문이 좁은 문밖에 없다면 애를 써서 좁은 문을 부수고 넓은 문으로 만들 것입니다. 자기 길을 개척한 사람, 나름대로 열심히 자기 삶을 살아간 모든 사람은 이 길에 속합니다. 이상주의자와 물질주의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이곳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시지 않은, 하나님과 분리된 보통 인간의 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는 것, 즉, 멸망,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멸망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심판 시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살전 1:10)이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넓은 길의 최종 목적지는 사망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둘째 길을 묘사합니다. 그 길은 „협착“합니다. 협착하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기본 의미는 좁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어근은 묘하게도 „고난“, „박해“와 똑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말은 박해를 당한다는 뉘앙스도 있습니다. 이 길은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합니다. 이 문은 들어가기가 어려우므로 당연히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 문으로는 단지 몸만 겨우 들어갈 수 있습니다. 큰 상인들은 많은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므로 그곳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허리도 굽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눅 13:24에 따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합니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좁은 문이라서 그렇지 않아도 지원자가 적은데, 마음을 먹도 들어가려고 해도 못 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많은 시험을 통과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이기려면 영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통해 이 말씀을 본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서 그것을 살 만한 분명한 결단이 필요하며, 4종류의 밭의 비유를 본다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뜨거운 햇볕, 즉 환란을 견디어야 하고, 가시밭 밑에 떨어진 씨앗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애써야 합니다.
이 두 문의 가르침은, 듣는 자 각자에게, 자신이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결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대부분 사람이 가는 편한 넓은 길로 갈 것인가, 혹은 어려운 좁은 길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은 문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좁은 문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 10:9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이 영생의 문이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이렇게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며,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이며, 또한 고난이 수반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집중과 투쟁을 요구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산상수훈을 들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있으나, 그분을 실제로 따라서 생명의 길로 간다는 것, 즉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생명의 길에 대해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고되고 힘들다면 그것은 오히려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뜻하지 않는 어느 순간에 다른 세상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넘겨집니다. 더이상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가장 두려운 시간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없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생각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판단 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므로 우리는 항상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이렇게 준비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지금까지 산상수훈에서 배운 대로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제자들의 행동원칙(황금률: 7:12)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앞에서 12절은 산상수훈의 실제적인 가르침 부분을 일단 마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13절부터는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듣던 말씀입니다. 이 지침은 간결하면서도 매우 깊이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랍비들도 이와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잘 사용하는 격언과 비슷합니다: „네가, 상대방이 너에게 행하는 것을 원치 않은 대로, 너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마라.“ 이 말은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며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받기를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해주어야 한다! 철학자 칸트의 윤리에서 그의 가르침의 핵심도 이와 비슷합니다: "네 의지의 법칙인 동시에 언제나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그러나 이것은 차디차고 창백한 이성의 논리이며 실현성이 불가능한 가르침입니다. 그는 이 말은 실제와 모순됩니다. 칸트도 이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해결책에 부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제로 인간의 마음을 찌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원칙적으로 마 5:43 이하와 같이 원수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이웃 사랑의 명령은 칸트와 같이 이성적인 사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의 말씀이므로, 죄인이 결코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 새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마음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이러한 일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수없이 반복합니다: 거룩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욕심을 버려라. 십자가를 져라. 인내하라. 영적인 싸움을 싸우라. 욕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부활의 소망을 가져라… 전부 같은 종류의 표현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이미 심판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사람은 부활 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인생 끝에 있는 하나님의 판단을 생각하며, 여러분은 끝까지 주님의 도우심으로 좁은 길을 가기를 소원합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MvxA/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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