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그리스도인의 핍박
본문: 16:19-24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장터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1. 귀신에게 풀려난 여종
귀신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울이 소리치자 여종을 붙잡고 있던 귀신이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하나님의 권세와 은혜를 알았다면 바울에게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기록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믿음으로 감사하지 않음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예수님 시대에도 재현됨을 봅니다. 눅17:12-19절을 보면, 사마리아의 어느 마을에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영광을 올립니다. 이에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9)
2. 여종의 주인들
점 잘 치던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귀신 같이 예언을 하고 점을 잘 치던 여종이 무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속된 말로 ‘점빨’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종의 주인들이 곤란해 졌습니다. 수익의 원천이 사라졌으니 생계의 문제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여종의 주인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 한 사람으로 인해 여러 주인들이 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의 수익을 모조리 없애버린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은 일이 주인들에게는 치명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재산권에 대한 현저한 침해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사유재산권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장했습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재산권을 침해한 자들은 자신들처럼 로마시민도 아닌 이방인이었으며, 특히 로마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싫어하던 유대인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고대 사회에서 반유대인 감정은 거의 노골적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받는 핍박과 유사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자기들과 완전히 다른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여타 종교인들은 잘도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서로 비슷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판이하게 다른 종교입니다. 물론 기독교 안에는 유사 기독교가 있어서 헷갈리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WCC부산총회를 계기로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가를 확연하게 구별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시종일관 WCC부산총회에 대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올려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동안 성도들 입장에서는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이젠 아주 간단해졌습니다. 주변에 교회문제로 누가 상의를 하면 제일 먼저 그 교회가 WCC를 찬동하는지 반대하는지 확인하라고 충고하십시오. 그 다음에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여부를 따져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이런 위치를 가지고 있듯이 로마시대의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로마시대에서 다른 민족은 로마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다 받아들이고 별 문제없이 지내는데 오직 유대인들만이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수용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못마땅한 것입니다.
3. 고발당하는 바울과 실라
그래서 이들은 바울 일행을 고발합니다. 특이한 것은 네 사람들 중 바울과 실라만 고발을 당합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두 사람만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헬라인이고 디모데는 어머니만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이기에 고발 대상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여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의 고초를 통해 또 예비하신 백성을 구원케 하지만, 남은 누가와 디모데를 통해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다음 사역을 준비토록 하시는 용의주도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가마저 구속된다면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치유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선교의 속도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장터로 데려가 관원들에게 넘깁니다. 이 장터는 ‘아고라’라고 하는 곳으로 로마의 사람들은 도시마다 이런 장터를 마련하고 물물교환을 비롯한 시장의 기능을 가동시켰습니다. 당연히 장터에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였으므로 로마의 관원들이 질서유지를 이해 순시를 했던 것입니다.
로마도시에는 두 종류의 관료가 있었다고 합니다. 빌립보는 로마 식민지이기에 당연히 이 도시에도 두 종류의 공무원이 로마제국의 녹을 받고 근무했습니다. 그 하나는 두움빌(duumvir)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릭토르’(lictor)라고 하는 공무원입니다. 두움빌은 ‘프라에토르’(praetor)라는 좀 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20절에 나오는 ‘상관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릭토르는 집정관을 수행하는 공무원들로서 19절의 관원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오늘날의 경찰관 정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릭토르들은 직책의 심볼처럼 도끼 한 자루와 함께 회초리 다발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이 다발을 라틴어로 ‘파시스’(fassis)라 합니다. 훗날 2차 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의 뭇솔리니가 만든 당 이름이 파시스트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에서 질서유지를 담당하고 있던 릭토르에게 두 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고발합니다. 그러면 고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여종의 주인들의 수익이 감소했다는 이유 하나로 고발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로는 지금의 민사상 손해배상의 문제이지 감옥에 가고 안가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이유를 갖다 붙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0-21절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정리하면 첫째,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으로서 도시를 소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로마인들이 싫어하는 풍속을 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풍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상한 종교를 퍼트리고 다닌다는 것을 이렇게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요즘 용어로 치면 ‘풍기문란죄‘에 해당합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더니 한 목소리로 바울과 실라를 관청으로 끌고 가라고 일제히 입을 모읍니다.
관청에는 프라에토르라고 하는 고위 관료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지역 재판관들입니다. 그들은 송사의 내용을 들어보고 나서, 이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재판 절차도 없이 무조건 옷을 벗기고 매질부터 합니다(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최초로 번역한 에라스무스는 이 부분에서 상관들이 자기 옷을 찢었다고 번역했는데 칼빈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만큼 유대인 소리만 들어도 이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을 싫어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이 이뿐 아닙니다. 이미 1차 선교여행 때에 루스드라 성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5년 후엔 세 차례나 몽둥이로 맞은 사실을 고후11:25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에 대해 너무 환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어떤 단체에서는 ‘문화선교’라는 이름으로 단기 선교를 한답시고 청년들을 모집하고 있는데, 선교를 간단한 여행쯤으로 인식하게 만들지 않나 염려됩니다. 선교는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번 쯤 경험하고픈 추억여행도 아닙니다. 선교는 주님의 명령을 받아 복음을 가슴에 품고 사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자기 목숨을 이미 주께 맡긴 사람들의 사역입니다.
드디어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힙니다. 간수는 가두어 두라는 지시를 너무 엄하게 해석하여 두 사람의 발에 차꼬를 채우고 감옥 가장 깊은 곳에 가두었습니다. F.F.브루스는 이 간수가 아마 퇴역한 군인일 것으로 보고 군대에서 훈련 받은 대로 따뜻한 인간미는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 차꼬에는 발을 채우는 구멍이 두 개 있어 두 발을 찢어질 정도로 넓게 강제로 벌려 채워놓아 죄수에게 극도의 불편과 경련을 일으키는 고통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좀 융통성이 있는 간수라면 별 중죄인도 아니므로 차꼬도 느슨하게 묶고, 편의를 봐 줄 수도 있을 터인데 이 간수는 곧이곧대로 합니다. 군대말로 이런 사람을 'FM'이라 부릅니다. 이런 사람에게 잘못 걸리면 고생깨나 합니다.
4. 교훈
오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첫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든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세상은 생리적으로 우리를 미워합니다. 요15:18을 함께 읽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온전한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처럼 예수 믿으면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초를 받는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최고의 복인 구원의 복과 영생의 복을 이미 받은 존재이기에 더 이상 이 땅에서의 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머지 복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어떤 대접을 받든지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내게 주신 복음의 능력에 따라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며 상처투성이가 되는 일을 각오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광의 상처’입니다. 이 상처를 서로 보듬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날 성전에 모인 형제자매들을 다시 만날 때에 생사를 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전우를 반기듯이 맞이해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주님에게 찾아온 여러분들을 주님은 너무 따뜻한 품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 주간 동안 세상과 짝하고, 세상일에 푹 빠져 있다가 오신 분들에겐 주님의 위로가 아니라 심한 질책이 뒤따를 것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멀쩡하게 오시지 말고 모두 이마에 반창고 하나씩 붙여 오시길 바랍니다. ㅎㅎ)
둘째,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 보시다시피 오늘 이야기에서 여종의 주인들은 오직 자기 수익이 손해 보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한 여인이 귀신의 종이 되어 귀신에게 붙들린 인생을 살다가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만약 자기 자식이 귀신 짓을 하다가 목사님의 안수기도로 낫게 되었다면 춤이라도 추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구원보다 당장 내가 손해 보느냐, 아니냐로 모든 일을 판단합니다. 모든 것을 ‘이익의 관점’에서 봅니다. 이런 풍류를 통틀어 ‘실용주의’(pragmatism)라 말합니다. 실용주의의 뿌리는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일을 나에게 득이 되느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실용주의가 인간관계에 접목되면 도움 되는 인간과 도움 되지 않는 인간으로 나누어집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인간관이기도 합니다.
-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라는 지방에 이르렀더니 미친 사람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귀신이 든 사람입니다. 귀신도 한 개가 아니라 군대 귀신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광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군대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들이 돼지 떼로 들어가 많은 돼지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몰살을 합니다. 귀신이 하도 많아서 아마 마을 전체 돼지가 몰살하였나 봅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미친 사람을 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는 일언반구 감사하지도 않고 오직 돼지 떼가 죽은 것에 불만을 품고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서 내 좇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한 사람의 생명 따위에 관신 없습니다. 파리 목숨이나 인간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중요합니다. 잘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핍박을 피하지 못할 때엔 당당하게 핍박을 당해야 합니다. 억울하다고 요란 떨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계신 일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아멘.
[출처] 7주차. 그리스도인의 핍박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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