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교회설립 7주년 기념예배 “믿음이란 무엇인가?”
본문: 창12:1-9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1. 아브라함이 왜 중요한가?
첫째, 기독교는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롬4;16)
아브라함을 알지 못하고선 이 믿음의 세계의 문을 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열쇠입니다. 모든 믿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의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이것을 가장 잘 풀어 설명한 성경이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는 ‘믿음장’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과 신약의 순교자들을 연결시키면서 믿음을 자세히 풀어 설명합니다.
둘째,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2천 년 전에 이미 예수님의 때를 본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또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시작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셋째, 우리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극복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은 믿음 안에서만 주어집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혹의 복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복은 믿음과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믿음의 복이기에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도 믿음 안에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9)
중요한 것은 복을 받기 위해 우리는 먼저 복을 받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복,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알고 만나는 사람은 자연히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복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복은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을 모두 총괄하는 복을 말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복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입니다. 다만 이런 복을 받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까요?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는 아브라함이지만 그가 처음부터 훌륭한 면모를 지닌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통의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오히려 집안으로 치면 우리보다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먹고 살던 장사꾼이었습니다(수24:2). 신앙적으로 보면 부끄러운 집안입니다. 또 데라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순종을 잘 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장 31절에 보니 데라는 가나안 땅에 가기 위해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중간에 하란에 머물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 기록을 통해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에 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머물렀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가나안으로 이동했다고 증언했습니다(행7:4).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고 곧바로 가나안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아버지 데라를 봉양하는 것을 더 우선시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 늦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결과적으로 고향 땅만 떠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절반의 순종’이라 말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 중에 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왜요?’라고 대꾸하지 않았습니다.겸손한 아브라함의 일면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지극히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재주나 특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믿음이 훌륭하여 하나님께 100% 순종을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시었습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이 탁월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렇게 문벌도 없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하나님은 함께 일하십니다. 죄인 중의 죄인들을 골라서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하나도 믿음이 없던 부끄러운 자들을 부르시어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키워 가십니다. 아브라함도 이런 과정을 통해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고 본 받는 것보다 더 훌륭한 모범이 없습니다.
3. (그렇다면)무엇이 아브라함의 믿음인가?
첫째, 믿음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1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순종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부르시다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반응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6:8)
반응은 관계의 시작입니다.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계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친해지려면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관계는 생기지 않습니다. 대화를 시도하지만 한쪽이 반응하지 않으면 대화는 중단됩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흔히 자기중심적이거나 무뚝뚝하거나 고집에 센 사람들이 말을 잘 안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알겠지’하는 겁니다. 말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속을 압니까?(그런 기술이 있으면 좀 소개바랍니다.) 또 말을 걸어도 대꾸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정말 기분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중요치 않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관계를 중요시 여기십니다. 자신과의 관계 뿐 아니라 형제들 간의 관계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형제와의 화목을 매우 강조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관계의 장애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람이 좋아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이웃은 미워한다면 그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했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또 믿음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습니다. 어린아이일수록 호불호가 분명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친절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퉁명하거나 대꾸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어린아이입니다. 믿음의 반응은 언제나 밝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환하게 웃는 얼굴입니다. 믿음은 부드럽고 따뜻한 말씨입니다. 믿음은 빛나고 밝은 색깔로 그려진 아름다움 그림입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반응은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순종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야할 땅을 미리 보여주고 떠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그렇습니다. 믿음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자리로 옮기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알지 못하는 곳으로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두렵지만 하나님이 나를 절대로 실족케 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만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각오를 가지고 낯선 땅으로 나섰고 수많은 고초를 겪은 끝에 주어진 목표들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과 시간들 사이에서 기나긴 고난의 밤을 추위에 떨며 마음을 졸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신이라는 사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믿음의 계보를 계승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것들에서 잘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랜 습관에 길들여지고 익숙하고 있는지 알고 보면 깜짝 놀랍니다.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진 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편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편리와 평안을 추구합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변화가 없는 삶은 한 곳에 정착하고 깊은 뿌리를 내립니다. 익숙함은 편견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편견에서 떠나야 합니다. 심리학을 따로 공부할 때 인간이 가진 ‘편견’(bias)이 얼마나 많은 오류와 왜곡을 낳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육신적으로 익숙한 것들은 믿음의 삶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나에게 오랜 습관으로 굳어진 것들을 떼어내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지금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침대에서 떠나야 합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까? 그렇다면 주저치 말고 떠나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행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떠나라면 떠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셋째, 믿음은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렸습니다. 물론 다 버리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가나안에 들어오면서 아브라함은 다 버리지 못하고 챙길 것은 챙기고 왔습니다. 심지어 하란에서 모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왔습니다. 버리지 못한 결과 아브라함은 고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기근이 들자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고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마누라를 바로 왕에게 빼앗길 뻔 했습니다. 이렇게 버리지 못하면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됩니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욕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하였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왜 버리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버려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버림으로써 천국을 얻었고, 베드로는 생계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한편, 믿음의 사람은 여행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주 주거지를 옮겨 다녔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8절에 보니 벧엘로 옮겨가서 그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장막은 말 그대로 텐트입니다. 임시처소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이렇게 여행자의 삶이었고 이 땅에서 나그네였습니다.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짐이 필요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여행을 다니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다 버리지는 못했지만 가장 무거운 짐이었던 아버지 데라를 버리고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또 믿음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가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가득찬 그릇에는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선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탐욕과 시기, 질투, 미움, 헛된 욕망을 비우지 않고서는 거룩한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탐욕이라는 우상숭배를 버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빈 공간을 가진 악기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욕심을 비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넷째, 믿음은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을 옮기는 곳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세겜 땅 상수리 나무아래에 제단을 쌓았고(12:7),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다 제단을 쌓았습니다(13:18),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3:4).
아브라함의 일생은 예배의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14:20) 예배는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장막 문 앞에 서 있다가 하나님과 천사들을 영접할 때에 몸을 땅에 굽혀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18:2). 아브라함의 일생은 이렇게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함께 지낸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예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배는 자리에 앉아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왔다고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번제로 불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인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던 사람입니다. 번제보다 더 귀한 예배는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적 예배를 드린 최초의 인물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4. 결론
벌써 아리엘교회가 일곱 살 생일을 맞았습니다. <오직 말씀, 더욱 사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멀고도 먼 믿음의 여행을 떠났는데 그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비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참아주시고 인내하신 점에 진심으로 위로와 격려를 드립니다. 사람으로 치면 일곱 살은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는 나이입니다. 말귀를 알아듣는 다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 무엇인지, 부모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눈치 챈다는 뜻입니다. 이제 아리엘개혁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맛있게 양식을 먹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도 기뻐하고 저 또한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믿음의 진군을 해야 합니다.
오늘 특별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아브라함과 같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능가하게 될 것을 소망하면서 새로운 각오와 의지를 다져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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