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차. 고난으로 부르는 노래
본문: 행16:25-34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덜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1. 감옥에서
선교 여행 중 바울이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바울은 실라와 함께 심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실라입니다. 헬라어로는 실라스 혹은 실루아노스인데 아람어인 쉐일라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영어로는 사일러스(Silas)인데 사전에는 특별한 뜻은 없고 그냥 남자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실라는 ‘남자 중의 남자’ 즉,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라는 바울을 따라나섰다가 봉변을 당한 꼴이지만 성경에는 실라에 대해 일언반구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실라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가 같았으면 벌써 불평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에게 충성하는 당신의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은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감옥은 3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잡범들을 가두는 ‘코모리어’이고, 다른 하나는 중범죄자들을 가두는 ‘인테리어’이고, 마지막 감옥은 지하 땅굴 깊숙이 설치한 곳으로 일명 하옥이라 하는 ‘풀리아노이’라는 곳인데 이곳에는 사상범이나 사형죄에 해당하는 범법자들을 가두는 곳입니다. 나중에 이 감옥들은 초대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몰래 모여 기도하던 ‘카타콤’으로 사용되기도 했을 것으로 봅니다. 바울과 실라는 바로 이 하옥에 지금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경험에 대해 바울은 고후1:8-9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과 실라는 실제로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이제 죽는 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두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감옥 안에 갇힌 몸인데 무엇이 소망이 있겠습니까? 돈이 많아서 보석금을 낼 형편도 아니고 변호사를 고용할 처지도 아닙니다. 무슨 특별한 ‘세상 빽’이 있어서 급히 연락을 취해 빼내 줄 것을 부탁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낯선 땅에서 이유도 없이 사형수들을 가두는 제일 무서운 감옥에 갇혔으니 두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기도와 찬송
그래서 두 사람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25절에 보니 ‘한밤중에’ 기도한 것으로 보아 이때서야 비로소 바울과 실라가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과 실라는 심하게 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심한 폭행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의 신앙을 주눅 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감옥이라는 막다른 곳에 이르니 더욱 기도가 강렬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박할 때 기도합니다. 솔직히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할 때엔 기도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목숨이 경각에 달릴수록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건강하고 만사형통하고 인생살이가 흡족하면 기도가 잘 안 됩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환경이 열악하고 자기 인생이 꼬일 대로 꼬이고 목숨이 위태로울 때 그제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것이 실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도 기도하지 않으니까 이런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자녀들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다 경험한 이야기이지만 기도를 하다보면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뭔가 뜨거움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바울과 실라도 그런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분을 잘 압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뭔가 뜨거워지면서 갑자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바로 이런 마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처음엔 너무 힘들고 답답하고 억울해서 제발 형통케 해 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하나님의 마음과 접선되면 지금 내 상황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이래서 나를 감옥에 집어 넣어셨구나’하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성적인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경륜이 느껴지고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반응은 찬송입니다. 찬송은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랑과 감사입니다. 바울과 실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모진 고문과 매질에도 끄덕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기쁜 얼굴로 찬송을 부르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랬고, 야고보 사도가 그랬고, 폴리캅이 그랬고, 주기철 목사가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자연히 찬송을 부릅니다.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었네’라는 찬송가가 있듯이 바울과 실라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강하게 느꼈습니다.
제아무리 세상에서 지체가 높고 점잖은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접하면 찬송하게 됩니다. 체면이고 권세고 다 내려놓고 모두 노래합니다. 대개 한국 사람들은 체면의식이 강해 맨 정신으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모였다 하면 노래합니다. 모든 타종교는 노래하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노래 부르는 것을 경박하게 여깁니다. 물론 요즘엔 불교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현대 불교는 기독교를 페러디한 종교인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용어뿐 아니라 각종 예식들이 기독교회를 따라갑니다. 염불을 드리던 그들이 어느 날부터 새벽기도회를 드립니다. 주일예배를 본 따 일요법회를 개최합니다. 알다시피 불교에는 주일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어느새 절간에서 찬불가가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절 지붕에 십자가만 세우면 될 것 같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초기 기독교의 찬송과 관련하여 대체로 세 개의 단어들이 나옵니다. 엡5:19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먼저 ‘시’는 시편이나 구약의 시가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낭송되는 것으로서 곡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고전 14:26에 의하면 초대교회 신자들의 예배의 내용이 소개되는데 찬송시와 말씀(설교)과 계시와 방언과 통역함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때까지만 해도 계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때까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계시가 종료되었습니다. 모든 계시는 성경 안에 기록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찬송’ 혹은 ‘찬미’는 히브리사회에서 구전되는 노래들로서 예수님이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면서 부른 찬송(“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 막14:26)이나 오늘 바울과 실라가 부른 노래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곡조는 있으나 악기는 없이 불려진 노래입니다. 상황적으로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악기를 사용하며 노래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령한 노래’(엡5:19, 골3:16)는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들로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계5:8-9, 14:2-3, 15:2-3에 따르면 거문고라는 악기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서양의 하프(harp)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악기가 등장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유발이 처음으로 악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보통 구약에서는 ‘수금’으로 번역하고 신약에서는 거문고로 번역합니다. 수금과 비슷한 종류로 비파가 있는데 원래 비파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것이지만 히브리인들에게 두 악기는 같은 종류의 악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북이 있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전송하면서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즐거워했다고 말했습니다(창31:27). 작은 북은 ‘소고’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바울과 실라가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 성도들이 서로 알고 있었던 공동의 노래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노래들은 과연 어떤 노래들이었을까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노래는 시편찬송밖에 없습니다. 다윗 시대 이후로 히브리인들은 시편을 노래하면서 점점 곡조가 나타나고 이것이 구전으로 전승되었습니다. 지금도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는 마치 우리의 아리랑 노래처럼 구전된 시편의 노래들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3. 지진이 일어나다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지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26절) 지진은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나타날 때마다 일어나는 전매특허의 사건입니다. 모세를 대적했던 고모라 일당은 땅이 갈라져 몰살당했습니다. 여리고성은 일주일 만에 지진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또 행4장에 보니,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서 풀려나 동료들에게 가서 모든 일을 고하니 이에 동료들이 일심으로 기도할 때에 모인 곳이 진동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지진이 일어나면서 옥토가 흔들리더니 옥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입니다. 주로 지진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옥문이 열렸다는 것은 죄수들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지진으로 말미암아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로 알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한 간수는 검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27절). 바로 여기에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극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심한 고난 중에도 기도하고 찬송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불행이 닥치면 한숨짓고 비관하며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롯한 죄수들이 도망을 갔습니까? 그렇다면 사건은 끝입니다. 아닙니다. 바울과 실라가 단지 일신상의 자유를 위해 기도한 것이라면 옥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심지어 다른 죄수들도 옥문이 열렸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도망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25절에 보니,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그 고통 중에도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듣다’라는 단어가 특이합니다. 그냥 듣는 것은 보통 ‘아쿠오’(ακουω=hear)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에페크로온토’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경청하다’(listen carefully)는 뜻입니다. 즉, 죄수들이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소리를 매우 주의 깊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린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너무 기막힌 일이 일어나면 꼼짝을 못하는 법입니다. 지금 죄수들이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들은 이 기막힌 기적으로 목격하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속으로 바울과 실라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진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전율입니다. 누가 감히 이 전율 앞에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4. 구원
28절입니다. 간수가 칼을 빼어들자 바울이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다’며 크게 소리 질러 간수의 자결을 막습니다. 이에 간수가 사실을 확인하려 등불을 들고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갑니다(29절). 등불을 들었다는 것은 한밤중이기도 하지만 바울과 실라가 갇힌 곳이 매우 깊고 구석진 곳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순간, 그는 격렬한 무서움으로 온 몸을 떨었습니다. 자동적으로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한 죄인의 완전한 복종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행동입니다.
결국 오늘의 사건의 목적이 드디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가장 깊숙한 감옥을 지키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름 없는 한 간수를 구원하고자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를 감옥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섭리를 깨달으면 불평할 일이 사라집니다. 역설적으로 억울하다고 생각되어지면 아직 하나님의 진정한 섭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목적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제 간수의 입에서 이제 어떤 말이 터져나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여기서 두 가지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선생들이여’라고 번역했지만 실상은 ‘주님’으로 불려지는 ‘퀴리오스’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바울과 실라에게 맡기겠다는 항복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구원’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위기에서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분명히 영혼의 구원을 말할 때 사용되는 ‘소조’(σοζω)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전율스러운 광경 앞에서 간수가 물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경험하면서 거꾸러집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드디어 하나님에게로 돌아섭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하심으로 회심을 합니다.
바로 이 때가 한 죄인의 영혼에게 전도를 하는 가장 적합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즉시 간수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31절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나아가 구원의 복음은 간수 한 사람에게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간수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집니다. 이것은 31절에서 ‘너와 네 집’이라 선포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허비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의 의문점은 언제 간수의 가족들이 감옥으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간수가 급히 자기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옥과 간수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으므로 간수는 인편에 단단히 일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속히 오라고 전했을 것입니다.
이제 간수와 집안의 식솔들 모두가 구원의 복음을 듣자 완전히 달라집니다. 33절에 보니 간수가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씻어주고 치료해 줍니다. 그런 다음 복음을 들은 모두가 세례를 받습니다. 물론 이때의 세례는 약식으로 행하는 물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약식으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꼭 물속에 깊이 빠져야만 물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 안에 몸을 다 빠트릴만한 물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34절에 보니, 간수는 아예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갑니다. 동틀 때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음식을 차려 두 사도를 대접합니다. 이 때의 대접이야 말로 가장 기쁜 대접입니다. 성도들이 존경하는 목사님을 모셔다가 맛있는 음식상을 차려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가 아니면 한 밤중에 자다가 일어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귀찮은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대접을 못합니다. 그저 기쁜 것입니다. 34절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기쁨이 영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 드립니다. 아멘.
[출처] 8주차. 고난으로 부르는 노래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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