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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2편 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배현주목사

겸손

by 김경호 진실 2015. 5. 14. 21:20

본문

시편 32편 1절 묵상

[본문]
1 {다윗의 마스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원문 직역]
1. 다윗의 묵상.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가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되다.
1. 다윗의 묵상. 불법자들이 사함을 받는 것과 죄인들이 허물의 가리움을 받는 것은 복되다.

[본문 주해]
이 시편은 다윗의 묵상시이다.

히브리어 “마스길”은 “묵상하다”, “찬찬히 보다”, “정관하다”, “심사 숙고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다윗의 묵상시라는 의미는 그가 이미 시편 1편에서 찬송한 그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자의 복”에 대한 진술과 일치한다.

경건한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깨달아 알 수 없다.

분요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자들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경건의 연습을 쉼 없이 반복적으로 해야하리라.

다윗은 마스길이라고 하는 묵상의 시편을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복이 무엇인가 진술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가장 먼저 “아쉐레”가 나온다.

이것은 “복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구문은 “아쉐레” 다음에 나올 모든 진술들이 복되다는 것을 말한다.

첫째 “허물에 사함을 얻는 것이 복되다.” 여기에서 “사함을 얻고”가 히브리어로 “네수이”라고 하는데 이는 “나사” 동사의 수동 분사형이다.

그 의미는 “제거된자”, “치워진자”, “철거된자”, “일소된자”라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수동태이기에 그 본래의 주어는 항상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허물을 사하시는 분이 되신다.

무엇보다 수동태는 그야말로 인간 편에서 스스로 죄를 제거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홀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실 수 있으시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한 “허물이 제거된 자는 복되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복되다.

이제 후반부에서는 “그 죄가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되다”고 말한다.

“가리움을 받다”도 히브리어로 “케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카사” 동사의 수동태 분사이다.

그래서 “죄가 덮혀진 자들은 복되다”가 된다.

그것은 죄를 죄로 여기시지 않고 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죄를 드러내서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가려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사죄이다. 그 죄를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어 달고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기억하심이 없는 자가 복되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32편 1~2절을 해석하고 있다.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그리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시편 32편 1~2절을 해석한다.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가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증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의 의의 인증이다. 무할례를 통하여서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고자 함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믿음으로 여기심을 받게 하고자 함이다. 12. 그리고 할례받은자들에게 조상이 되었다. 이는 할례받은 자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그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니라. 13. 세상의 후사가 되라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신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의를 통하여서이다.”(롬 4:9~12)

사도 바울은 시편 32편 1~2절을 할례와 관련하여서 풀고 있다.

사죄의 은총이 할례와 연결이된다는 것이다.

그때에 사도 바울은 단지 할례는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의 증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실지로 속죄의 은총을 받게된 것은 오직 믿음의 의를 따라서 된것이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믿음의 의의 인증으로 받은 증표이며 그것은 칭의의 외적 표징이다.

할례는 칭의의 외적 표징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여겨주신 것이다.

그것이 칭의이다. 그런데 그 할례는 모든 믿는자에게 칭의의 표시로서 주어졌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두 믿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는다.

그때에 세례란 구약의 경륜과 다른 경륜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워주신 믿음의 징표이며 칭의의 증표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여겸을 받은 신자들은 이제 세례를 통하여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아브라함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참된 신앙이란 아브라함의 신앙이 전형이 되어서 그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나님 나라의 후사로서 약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믿음의 의를 통하여서 나온다.



우리가 시편 기자의 목상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의 실체를 깨달아야한다.

왜 시편 기자는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가 가리움을 받은 자가 복되다고 하였는지를 깨달아야한다.

왜 허물의 사함과 그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인생에게 최고의 복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서 강림하셔서 그가 친히 십지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우리 죄를 위하여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이러한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매우 중요 하다. 그에 앞서 모세를 통하여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 율법을 단 한가지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됨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께서도 공생애 기간에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속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건만 스스로 의롭다 하니 죄가 그져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서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라고 말씀하셨다. 실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은 타락 후 가장 먼저 자신의 실체에 대하여서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인의 작은 허물이라도 잘 들어내는 이중적 잣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의에 빠져서 헤매이고 사는 것이다.

결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는한 그 허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는 의롭고 다른 사람은 불의하다는 어리석은 그 마음이 가장 죄악된 마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라고 한 것이다.

대부분의 인생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서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긍국적 원인은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원인을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다하여서 멸망으로 간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각성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존전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참된 신자들은 이제 각성하고 자신의 의를 버리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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