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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삶의 방식

순종

by 김경호 진실 2015. 5. 2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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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삶의 방식


Prof. dr. Ad de Bruijne (캄펜신학교 교수, 윤리학)

번역: 이충만 목사1)/해외필진(네덜란드) 


<!--[if !supportEmptyParas]--> <!--[endif]-->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중요한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달리 이 질문을 그리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필자가 현재 머물고 있는 미국의 상황도 네덜란드와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이 질문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구체적인 선택과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윤리에 있어 하나님의 법이 특정한 위치를 차지했다. 성경의 계명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과거 하나님의 법이 윤리와 관련하여 차지하고 있던 이 위치가 오늘에는 논의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윤리적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덜 강조 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이제 우리 자신의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타인 또한 그 자신의 뜻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는 이제 과거보다 더 상대화되었고 더욱 임의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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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금의 상황과 맞물려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관점에 대한 비판이 있다. 필자는 이 비판들을 네덜란드에서 뿐만 아니라 여기 미국에서도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다.


첫번째 비판은 해석학적인 문제이다. 즉 성경의 계명들은 오늘의 윤리적인 선택을 충분히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몇몇 계명들은 오늘에 더 이상 적용 될 수 없다. 또 다른 계명들은 적어도 번역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계명들뿐만 아니라 기사들과 찬송시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다양한 윤리적 질문들에 대해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에 사람들은 일상의 지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두번째 비판은 윤리학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종의 의무론적 윤리학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이미 추한 단어가 되었다. 수 십년 동안 '덕'(virtue, 悳) 윤리학이 중요한 논의를 이끌었고,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한 개인적 성찰과 심리학적 처방이 유행하였다.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윤리학의 일면에 동의하기도 했다. 윤리적으로 모호할 수 있는 특정한 행위보다 성품과 태도가 중요하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한, 구체적인 윤리적 선택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세번째 비판은 기독교 영성의 변화와 관련있다. 사람들은 계명에 대한 강조를 율법적이라며 비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쉬이 여긴다. 서방의 기독교인들에게 은혜라는 단어는 무미건조한 표어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용납하신다고 여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애당초 우리 자신과 서로에 대해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행하는가 혹은 행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어떤 윤리관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리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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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판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 비판들은 과거 반율법주의(anti-nomism)’가 제시한 타당하지 않은 주장들과 얽혀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집과 세속화된 자율을 이러한 비판들 뒤에 숨긴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윤리적 선택과 그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윤리적 선택에 있어 다른 어떤 것에 구애 받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 다울 수 있는가능성을 찾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내린 임의의 선택에 타인이 관용적이기를 요구하고, 그 선택이 존중받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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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흐름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삶의 방식과 윤리 문제를 숙고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노력(해석학적 측면)과 다른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의무와 함께 덕을 강조해도(윤리학적 측면) 역시 유효하다. 뿐만 아니라 은혜아래에 산다고 생각해도(영성의 측면) 이것은 변함이 없다. 모든 선택에 있어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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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필자의 사견에 지나지 않는가? 필자는 이를 주기도문을 통해 주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윤리에 대한 간청을 의도하신다. 이 간청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우리로 주님의 뜻을 지금 곧 행하게 하소서를 의미한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씨름을 묵상하다면, 그 장면이 그저 자기자신다울 수있도록 행동하는 것과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26:39)”. 즉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도록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순종 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씨름은 우리의 숨은 아집을 벌거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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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삶의 방식과 윤리의 문제에 있어 임의적인 태도에 대한 처방약이다. 그런데 이 간청은 문자 그대로 기도이다.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이 베푸셔야 하는 은혜이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매일 간청해야 하는 바로써,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이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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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충만 목사(네덜란드)는 현재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파)에서 세운 캄펀(Kampen)신학교에서 박사과정 유학 중에 있다.

 

 

http://reformedjr.com/xe/board05_02/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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